<기후비상사태: 리허설>
국립극단의 저탄소 공연 제작기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는 2021년 11월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지구 종말 시계는 자정 1분 전을 가리키고 있으며, 우리는 당장 행동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국립극단이 선보이는 연극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은 이처럼 지구 종말이 코앞으로 다가왔음에도 여전히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지는 기후위기 문제를 조명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공연을 통해 관객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제작 과정부터 탄소발자국을 최소화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기후위기의 시대, 공연예술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정채영 제작PD, 박지선 에코드라마투르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소한으로 필요한 만큼만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은 어떻게 기획된 작품인가?
정채영 국립극단은 동시대적 화두로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2021년 ‘장애와 예술’, 2022년 ‘기후위기와 예술’, 2023년 ‘기술과 예술’이라는 창작극 주제를 설정했다. 매년 이 주제에 맞춰 작품을 개발한다. 올해는 ‘기후위기와 예술’이라는 주제에 맞춰 전윤환 작가 겸 연출가에게 작품을 의뢰하였고,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이다.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발자국을 산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연계 탄소발자국 절감을 위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에코드라마투르그라는 직책이 생소한데 프로덕션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나?
박지선 생태주의, 탈인간 중심주의와 같은 주제를 어떻게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을지 창작자와 함께 고민하는 역할이다. 드라마투르그와 마찬가지로 창작 과정에서 적절한 참고 자료와 조언을 제공한다. 이 작품에서는 표면적인 기후위기 현상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의 경제·정치적 구조와 어떻게 얽혀있는가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주로 논의했다. 동시에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친환경적으로 공연을 제작할 수 있을까 질문하고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공연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발자국을 어떻게 측정하고 있나?
정채영 지속가능발전경영센터의 도움을 받아 폐기물량과 이동 수단 및 거리를 토대로 탄소발자국을 산정한다. 우선 연습실에서 나온 쓰레기를 일반 쓰레기, 재활용 가능한 쓰레기 등 종류별로 모아 무게를 재고, 설문을 통해 프로덕션 구성원의 이동 수단 및 거리를 기록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2주 치 데이터를 표본 삼아 전체 연습 기간에 대한 탄소발자국을 산출했다. 공연 개막 후에는 매일 빠짐없이 배우 및 스태프의 이동 수단 및 거리를 기록하고 있다. 관객에게도 안내 문자를 보내 극장까지 이동할 때 이용한 교통수단과 소요 시간을 묻는 온라인 설문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저탄소 공연 제작을 위해 참고한 해외 선례가 있나?
박지선 영국에서 만든 친환경 공연 제작 가이드북 ‘시어터 그린 북(The Theatre Green Book)’을 번역해 그 내용을 공유하고 참고했다. 사실 그 가이드북에 대단한 비법이 적혀있는 건 아니다. ‘최대한 재사용·재활용 제품을 사용하라, 이동과 배송을 줄여라’와 같이 어찌 보면 기본적인 안내 사항이 적혀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시어터 그린 북에서 강조하는 것도 프로덕션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독려하는 것이다. 이를 ‘초대(Invitation)’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사전 워크숍을 통해 환경 운동가, 과학자 등 전문가의 강연을 함께 듣고 환경 파괴를 막기 위해 프로덕션에서 어떤 시도를 할 수 있을지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기서 모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저탄소 공연 제작을 위한 목표와 실천 사항을 정리했고, 프로덕션 구성원 전원에게 이에 동의한다는 서명을 받았다. 이처럼 탄소 절감의 필요성을 충분히 알리고 함께 행동하자고 초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습 기간 동안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박지선 연습실에서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았다. 일회용 컵 대신 텀블러를 사용하고, 휴지 대신 손수건을 사용했다. 배우들은 연습 시작 전에 보통 ‘컵차기(종이컵으로 하는 제기차기)’로 몸을 푸는데, 이때도 종이컵 대신 셔틀콕이나 양말을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쓰레기양이 많이 줄더라. 또한 대중교통 이용과 비건 식단을 권장했다.
정채영 대본도 최소한으로 인쇄했다. 원래 배우와 스태프 전원에게 제본한 대본을 배포하는데, 이번에는 배우와 연출부에만 제공했다. 다른 스태프에게는 작가의 동의를 얻어 PDF 파일로 대본을 보내주었다. 창작 과정에서 나오는 쪽대본은 단체 채팅방에 업로드하거나 스크린에 띄워놓고 함께 보며 연습했다. 부득이하게 무언가를 인쇄할 때에는 친환경 폰트를 사용했다. 글씨 안에 작은 구멍이 송송 뚫려있어 인쇄 시 잉크를 절약할 수 있는 폰트다.
포스터, 전단, 프로그램북 같은 홍보물은 어떻게 제작했나?
정채영 포스터와 프로그램북은 친환경 용지에 콩기름 잉크로 인쇄했고, 전단은 만들지 않았다. 프로그램북 인쇄 수량도 최소화하였다. 국립극단은 2018년부터 웹사이트에서 프로그램북을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는 서비스를 운영해 왔다. 실물 프로그램북은 원하는 관객에게만 유료로 판매하였다.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의 경우 아예 프로그램북 판매 수량을 회차당 30권으로 한정하였다. 또 이전까지는 작품에 참여한 배우와 스태프 모두에게 프로그램북을 나눠주었지만, 이번에는 사전 신청자에 한해 제공했다. 덧붙여 극장 내 아트숍에서 기념품을 사면 생분해 비닐봉투에 담아 준다.
무대 세트, 소품, 의상은 가능한 한 재활용했다고 들었다.
정채영 국립극단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보유품을 최대한 재활용했다. 무대디자이너가 경기도에 있는 창고까지 찾아가 쓸만한 대도구를 공수해 왔다. 의상 또한 극장 의상실에서 보유하고 있던 옷과 배우 각자가 가지고 있던 옷 가운데 작품 콘셉트에 맞는 것을 골라 사용했다.
환경을 위한 노력이 미학적 성취에 제약으로 작용할 거라는 우려는 없었나?
박지선 물론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해서 공연의 스펙터클을 전부 포기할 수는 없다. 시각적 요소 또한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제작 과정에서 관습적으로 해온 일을 의심하고,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며, 창의력을 발휘해 새로운 방법을 찾고자 하는 태도다.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의 경우, 유리창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아크릴판이 꼭 필요한가를 두고 무대디자이너와 연출가가 치열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고민 끝에 아크릴판을 사용하는 대신 재사용이 용이하게 만들기로 타협했다. 불필요한 가공을 하지 않고 쉽게 해체할 수 있게 만들어, 공연이 끝나면 그대로 떼어내 재사용할 수 있다. 무대디자이너와 의상디자이너는 이전까지 콘셉트에 맞게 모든 요소를 새롭게 만드는 것에 익숙했기 때문에, 공연 전까지만 해도 재활용 무대와 의상이 작업되지 않은 결과물처럼 보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니멀하면서도 조화로운 무대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친환경적인 무대라고 해서 무조건 완성도가 떨어지는 게 아니며 오히려 또 다른 무대 미학을 보여줄 수 있다.
기후위기 시대 공연예술의 역할
유해 화학물질 발생을 줄이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했나?
정채영 무대 세트는 도색하지 않고, 의상은 식물성 세탁 세제를 사용해 세탁한다. 분장은 최소화하여 분장디자이너 1명이 모든 배우의 분장을 담당한다. 또한 헤어스프레이를 사용하지 않고, 배우들에게 추천받은 비건 화장품을 구입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비건 화장품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 애로 사항이다.
자원을 절약하는 만큼 제작비도 절감될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경우에 따라 오히려 제작비가 상승할 수도 있겠다.
정채영 그렇다. 불필요한 제작물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비용을 절감한 부분도 있지만, 친환경 재료를 사용하는 데 따른 비용 발생도 감수해야 한다. 이번 공연은 전기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백열등 대신 LED 조명, 적은 전력으로도 높은 출력을 내는 스피커를 사용했는데, 이처럼 새로운 장비를 도입하면서 발생하는 비용도 무시할 수 없다. 하다못해 콩기름 인쇄도 일반 인쇄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 콩기름 인쇄가 가능한 업체를 찾는 데에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박지선 해외처럼 공연 단체가 이용할 수 있는 친환경 업체의 목록을 정리해 공유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이 이용하면 그만큼 가격도 낮아진다. 국립극단을 필두로 탄소 절감에 나서는 공연 단체가 늘어난다면 친환경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 또한 늘어날 것이다. 공연에 참여한 스태프들도 준비 과정에서 저마다 자기 분야와 관련된 친환경 업체에 대한 리서치를 많이 했더라. 이를 바탕으로 다른 공연에서도 친환경 업체와의 협업을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이번 공연이 끝나면 저탄소 공연 제작 과정을 기록한 ‘기후 노트’를 제작해 배포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정채영 연습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가 어떤 노력과 고민을 해왔는지, 사소한 시도와 실패까지도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추후 이 내용을 온라인에 업로드해 저탄소 공연 제작에 관심이 있는 누구나 참고할 수 있게 만들 예정이다. 스태프들이 동의한다면 각자가 조사한 친환경 업체를 함께 수록해도 좋을 것 같다.
탄소발자국 줄이기를 실천하면서 아쉬움이나 한계를 느낀 부분은 없었나?
정채영 상충되는 이해관계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더러 있었다. 이번 공연은 탄소 절감을 위해 경기도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대도구를 가져와 재활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1.5톤 트럭이 극장과 창고 사이를 여러 번 오갔다. 이때 발생하는 탄소발자국이 새로운 세트를 만들고 폐기할 때 발생하는 탄소발자국보다 적을까 하는 고민이 생기더라. 또한 배리어프리 공연을 원활하게 진행하려면 점자 전단과 같이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정보 전달 수단을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데, 이것이 탄소 절감이라는 목표와 상충되는 면이 있다.
박지선 환경 문제는 여러가지 사회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탄소발자국 줄이기를 실천하다 보면 종종 어떤 선택이 정답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딜레마와 마주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야?”라는 식의 피로감과 저항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다. 따라서 방법론을 앞세워 이렇게 하라고 강요하기보다 근본적인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왜 탄소발자국을 감축해야 하는지, 왜 예술이 그 일에 동참해야 하는지 인식하고 공감하는 것이 먼저다. 인식이 바뀌면 행동은 자연히 변한다. 인식의 변화가 뒷받침되지 않는 행동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동의한다. 환경을 생각하면 ‘공연을 안 하는 게 가장 친환경적이지 않나?’ 하는 회의론에 빠지기 쉬울 듯하다. 기후위기 시대에 공연예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박지선 아이슬란드 작가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은 『시간과 물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후변화라는 단어가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백색잡음에 불과하다.” 우리는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매일같이 보고 들으면서도 당장 행동에 나설 만큼 시급한 문제로 느끼지 못한다. 예술은 이 백색잡음이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고 감각의 차원으로 들어오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의 무대는 평범한 집 안이다. 이는 우리가 아무리 기후위기라는 문제를 모른 체해도 그것이 이미 나의 일상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기후위기를 개개인의 삶에서 감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 섬섬은 기후위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과학자나 정치인만의 책임이 아니라 예술가의 책임이기도 하다고 얘기한다. 예술가는 상상하는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기후위기가 초래할 미래를 상상하고 인류에게 알려야 할 사명이 있다.
향후 탄소발자국 절감을 위해 또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
정채영 우선 창작극 개발 사업 ‘창작 공감: 연출’을 통해 기후위기를 주제로 한 또 다른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리고 이번 작업을 통해 학습한 탄소 절감 방법을 다른 공연에도 적용해 보려고 한다. 포스터와 전단은 앞으로도 계속 친환경 용지에 인쇄하고, 티켓 봉투는 비닐 창을 없애거나 생분해 비닐로 만들 계획이다. 공연에 사용된 세트와 소품, 의상을 다른 공연 단체에서 재활용할 수 있도록 나눠 주는 ‘나눔 장터’도 진행할 계획이다.
박지선 공공기관에서 주도적으로 나서 길을 닦아놓으면 민간 예술 단체도 그 뒤를 따라가기 쉬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국립극단의 이번 시도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2020년부터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와 기후 운동가가 모여 기후변화에 대해 논의하는 레지던시 ‘예술텃밭 예술가 레지던시―기후변화’를 운영하고 있다. 함께 강연도 듣고 토론도 하며 저마다 기후변화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어나간다. 오는 7월부터 세 번째 레지던시가 시작되며, 11월에는 외부인과 연구 결과를 공유하고 공연을 선보이는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다. 탄소발자국 줄이기를 먼저 시작한 단체와 예술가들이 어떤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공유해 주고, 그렇게 참고할 수 있는 선례가 쌓여나가면서 점차 친환경적인 공연예술 생태계가 만들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3호 2022년 6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