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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LETTER] 정말 간절하게, 공연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No.213]

글 |오세혁 작가, 다미로 작곡가 사진 | 2022-09-28 683

정말 간절하게,
공연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오세혁 × 다미로 첫 번째 편지

 

다미로에게


아주 오래전 여름이었을 거야. 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소설 『데미안』을 꺼내서 너에게 보여주었지. 너는 이미 『데미안』을 읽고 있다고 했어. 그 순간 여행의 방향이 바뀌게 되었어. 그 여행은 포기하기 위한 여행이었어.


어느 순간부터 무엇을 해도 가슴이 뛰지 않았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 가짜 같았어. 그런 마음은 한 번만 찾아온 것이 아니야. 내 몸이 잠시 멈출 때마다 꼬박꼬박 찾아왔어. 어딘가로 정신없이 달려가듯 일하다가, 그 일을 마치고 잠시 숨을 돌리는 순간, 어쩌면 잘못 달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럴 때마다 나는 한 번이라도 제대로 달려보고 싶어서 다시 방향을 바꿔 또 정신없이 달려갔지. 마당극에서 판소리로, 판소리에서 연극으로, 연극에서 뮤지컬로, 그러다 보니 10년이 넘었고, 나는 또 어디로 어떻게 달려야 할지 아득해졌어. 이제는 주저앉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때 네가 말했지.


여행을 다녀오자고. 잠시 중력을 벗어나자고. 그때 처음 알았어. 나는 한 번도 나를 위한 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었다는 걸. 늘 공연을 위한 여행이었지. 


난 어딘가로 떠날 때 늘 부담이 있었어. 많은 읽을거리를 챙겨야 한다는 이상한 부담, 그래야 쉬면서도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것마저 벗어나고 싶었던 거야. 집에 있는 책들은 모두 떠올리기 위해 산 것들이었어. 무작정 서점에 갔지. 보자마자 눈에 띄는 책을 가져가려고. 그때 왜 『데미안』이 눈에 띄었을까? 반가운 마음이 컸을 거야.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선물로 사준 책이거든. 내용이 기억나진 않았어.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정도만 어렴풋이 떠올랐지. 나는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책장을 가볍게 넘겨보았어. 그러다 어느 한 문장에서 눈길이 머물렀어. “전쟁터에 온 병사들은 돌격할 때 모두가 같은 얼굴로 달려가지만, 죽어가는 순간에는 비로소 자신의 진짜 얼굴로 죽어간다”라는 문장이었어. 갑자기 눈물이 흐르더라. 내 진짜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떠오르지가 않는 거야. 난 연극을 시작한 후로 누굴 만나도 웃는 얼굴이었어. 함께하는 동료들과의 갈등이 싫어서, 떠나는 단원들을 잡고 싶어서, 처음 만나는 관계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서, 이유는 다양했지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야. 좋은 사람이 되려면 늘 웃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지. 어쩌면 그 웃는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 잘못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난 『데미안』을 집어 들었어. 여행을 다니는 동안, 한 번이라도 좋으니 진짜 얼굴을 찾고 싶었어. 근데 기억나? 난 여행 내내 웃고 있었어. 비행기가 한국을 떠나는 순간, 여행을 다니는 기간 내내,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순간까지, 나는 계속 웃었지. 너무 즐겁고 행복해서 웃었어. 그건 진짜 웃음이었어. 그리고 정말 간절하게, 공연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데미안』을 다시 읽으며 마음속에 몰아쳤던 뜨거움을 무대 위에 고스란히 꺼내놓고 싶었지. 첫 장면이 곧바로 떠올랐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전쟁터의 폐허에서, 어디로 돌격하는지도 모른 채 달리고 있는 싱클레어가, 생의 마지막을 앞둔 순간에, 자신의 진짜 얼굴을 찾아나가는 여정. 이 공연의 마지막 장면에 그 진짜 얼굴은 어떤 표정일까. 그 폐허는 언제부터 폐허였을까. 폐허의 땅속 깊은 곳을 한없이 파다 보면, 지난 역사의 또 다른 폐허가 솟아나지 않을까. 폐허 위를 질주하던 누군가의 힘으로 길이 생겨나고, 그 솟아난 땅이 또다시 폐허가 되고, 그 폐허 위를 또 다른 누군가가 질주하며 지금의 길이 된 것이 아닐까. 우리의 역사에 흘렀던 폐허를 끊임없이 파다 보면, 어쩌면 그 속에서, 역사라는 거대한 얼굴에 파묻혔던 수많은 싱클레어들의 진짜 얼굴을 마주할 수도 있겠지. 그 진짜 얼굴은 아마 생의 마지막 순간에 완성된 얼굴일 거야. 우리의 진짜 얼굴도 아마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마주할 수 있겠지.


『데미안』을 다시 만난 그날 이후, 나는 지금도 여전히 웃는 얼굴이야. 여전히 정신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고, 그 무언가가 끝나면 잠시 아득해지기도 해. 하지만 예전처럼 내 진짜 얼굴이 무엇일까 고민하지는 않아. 아직 우리의 생은 계속되고 있으니까. 생의 마지막에 찾아올 진짜 얼굴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계속 달려갈 거야.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우리가 다시 『데미안』을 무대에 올리는 날이 오겠지. 그날이 오면 우리는 또 한참 동안 같은 얼굴로 살아가게 될 거야. 그 시간을 생각하면 종종 가슴이 뛰어.


2022.5.2.
세혁


세혁에게


돌이켜 보면 그해 여름 너와 난 절벽 끝에 서 있었던 거 같아. “괜찮다, 괜찮다”라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계속 찾아왔어. 함께, 혹은 각자의 자리에서 쉼 없이 달려온 탓일까? 잠시 숨을 고르면 혹시나 내가 잊힐까, 아니면 내가 설 자리가 없어질까, 불안한 마음으로 위태롭게 많은 계절을 보낸 것 같아. 


나는 한 작품, 한 작품을 접할 때마다 나의 능력이 끊길 것 같은 경험을 하고 있었어. 무서웠지. 이 능력이 멈춰버리면 나도 없어질 거라는 생각에 계속해서 곡을 써 내려갔고, 때론 내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내 안의 그림자를 내 눈으로 보는 걸 무서워하고 있었어. 작곡을 하는 것이 다행이면서도 불행하다고 느껴졌던 그해 여름. 그 계절엔 매일 밤 중력이 더욱 크게 느껴졌어.


알아. 세혁은 언제나 남에게 양보하고 그저 괜찮다고 하는 사람이지. 늘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바람에 손해를 보고도 그저 웃는 사람이고. 하지만 그때의 세혁은 지쳐있다는 위태로움이 느껴졌고, 무작정 같이 여행을 떠나 어딘지 모를 곳을 돌아다니면서 너의 표정이 밝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난 여행 내내 네가 메뉴를 고를 때가 좋았어. 양보 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할 때, 그 순간 오직 우리 자신만을 위한 여행을 하고 있다고 느껴졌거든.


비행기가 이륙하자 서로에게 내민 책 한 권. 필연이었는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었지. 그때 우리는 서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돌이켜 보면 우린 놀라지 않았어. 왜인지 모르겠지만 『데미안』은 우리에게 당연했어. 비행기에서 내내 『데미안』 이야기를 나누며 한 달 동안의 긴 여행이 『데미안』으로 꽉 차오를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어. 설레기 시작했지. 오랜만에 느끼는 두근거림이었고, 알 수 없는 어두움이 있던 우리의 얼굴이 웃음으로 차오르기 시작했어.


한국으로 돌아온 후 6개월 만이었나? 처음 대본이 나왔던 날, 바로 너에게 전화를 했지. 당장 만나자고. 신촌 어디 구석 즈음에서 만난 네가 너무 좋았어. 대본에서 오세혁이 자신의 그림자를 이겨내고 자기 자신의 얼굴을 찾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눈물을 참느라 혼났어. 대본 속 세혁은 폐허 속에서 이제 혼자 어둠 속을 걷지 않겠노라 말하며 다시 일어선 빛나는 별이었지.


<데미안>이란 작품을 만나고 삶의 흐름은 완전히 뒤바뀌었어. 나를 가로막았던 껍데기와 어둠이 때론 성숙한 삶을 위한 악일 수도 있으며 나를 보호하기 위한 선일 수도 있다는 것. 모든 선은 악이 될 수도 있고, 악이 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이제야 조금이나마 들어. 그러므로 어떤 이의 선택이 나에게 악으로 작용할지라도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걸 말이야. 내 얼굴은 결국 내가 선택하는 거니까.


<데미안>이 다시 올라가는 날. 우리는 한 무대에서 아브락사스를 볼 수 있을까? 나 역시 한 명의 관객이 될 그날을 기약하고 싶어.


언제나 너의 얼굴로 살아가길 빌며.


2022.5.5.
다미로가 보냄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3호 2022년 6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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