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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ZOOM IN] <웃는 남자> 빅토르 위고, 불행하고 위대했던 대문호의 인생 [No.213]

글 |김주연(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 2022-09-28 1,270

<웃는 남자> 빅토르 위고
불행하고 위대했던 대문호의 인생

 

대문호는 단순히 글을 잘 쓰고 좋은 작품을 남긴 작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예리하고 깊은 통찰로 시대를 비추거나 인류의 길잡이가 되어준 이들을 대문호라 일컫는다. 그런 의미에서 빅토르 위고는 확실히 대문호란 칭호가 어울리는 인물이다. 격동의 프랑스 역사 한가운데서 민중을 이끌고 낭만주의 정신을 문필에 담아 드높였으며, 자유와 박애를 향한 뜨거운 애정으로 걸작을 써 내려간 거장. 그러나 비극으로 점철된 가정사의 주인공이었던 한 남자. 빅토르 위고의 생애를 살펴본다.

 

 

한 시대를 대표했던 위대한 거인


19세기 프랑스는 전쟁과 혁명으로 점철된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다.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의 등장과 몰락, 7월 혁명과 2월 혁명, 공화정과 제정이 교대로 엎치락뒤치락하던 그 혼돈의 시간 동안, 빅토르 위고는 역사 한가운데 있었다. 입헌군주파에서 공화주의 지지자로 정치적 입장에는 변동이 있었지만, 위고는 ‘자유’를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주저하지 않고 나섰다. 집필과 발언뿐만 아니라 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 참여에도 적극적이었던 위고는 작가를 넘어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우뚝 섰고, 스스로도 이에 대해 깊은 책임과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결코 순탄하지 않은 생애를 보내야 했다. 특히 민중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권력에 반대했던 위고는 나폴레옹 3세의 독재에 반대하다 망명을 떠나 오랜 세월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망명지에서의 사색과 집필을 발판 삼아 인생 최대의 걸작 『레 미제라블』을 완성할 수 있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 정신을 위고만큼 작품 속에 생생하고 절절하게 그린 작가도 드물다. 그는 주제 면에서뿐만 아니라 형식과 문체 면에서도 자유를 표방했고, 그 결과 낭만주의의 깃발 아래 선 가장 중요한 예술가로 자리 잡았다. 위고는 당대 프랑스 문예사조였던 고전주의의 엄격한 형식에 저항하면서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예술과 표현의 절대적 자유를 강하게 주장했다. 또 들라크루아, 발자크 등 동시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의 모임을 이끄는 핵심 멤버로 활약하기도 했다. 위고의 ‘에르나니 소동’은 당대 고전주의 대 낭만주의의 치열한 격돌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위고는 시간, 장소, 행동을 통일하는 삼일치 법칙과 12음절로 된 운율 형식인 알렉상드랭 운율 등 고전주의에서 엄격하게 지키던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운문극 『에르나니』를 완성했다. 그리고 이를 고전주의 연극의 성지인 코미디 프랑세즈 무대에 올렸다. <에르나니>의 초연 날, 객석은 야유하는 고전주의자들과 이에 맞선 낭만주의자들이 팽팽한 대결을 펼치며 문학사에 길이 남을 소란스러운 밤을 만들어냈다. 결국 고전주의자들의 조롱을 뒤덮는 우레와 같은 박수로 막을 내린 이 공연은 ‘에르나니 소동’으로 불리며 낭만파의 승리를 상징하게 되었다. 이는 곧 낭만주의의 선두에 섰던 빅토르 위고 자신의 승리이기도 했다.

 

비극으로 점철된 가족사


위대한 문학적 행보와는 달리, 빅토르 위고의 개인적인 가족사는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가정불화와 부모의 이혼은 어린 위고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형 외젠이 정신병으로 고생하다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것도 큰 아픔으로 남았다. 위고는 소꿉친구인 아델과 결혼해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아내와 자신의 절친이 불륜에 빠지면서 행복도 깨진다. 위고 역시 평생 배우 쥘리에트 드루에를 비롯해 수많은 여자와 염문을 뿌리며 관계를 이어갔다. 위고의 생애에서 가장 큰 비극은 그의 자식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레오폴, 레오폴딘, 샤를, 빅토르, 아델 다섯 자녀를 두었지만, 모두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다. 장남 레오폴은 태어난 지 몇 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위고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장녀 레오폴딘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과 사고로 물에 빠져 죽었다. 여행지에서 딸의 익사 소식을 접한 위고는 충격을 받았고,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한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하기까지 했다. 만년에는 아들 샤를과 빅토르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은 자식은 막내딸 아델뿐이었지만, 아델의 기구한 운명은 위고에게 또 다른 슬픔을 남겨주었다. 위고가 망명해 있던 건지섬에서 영국인 장교에게 반한 아델은 그를 쫓아 캐나다의 핼리팩스와 서인도제도의 바베이도스섬까지 갔다. 영국인 장교는 아델에게 큰 애정이 없었을뿐더러, 스토커처럼 따라붙는 그녀에게 염증을 느꼈으나 아델은 이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는 구애를 펼쳤다. 결국 고된 여정과 실연으로 아델의 심신은 완전히 무너졌고, 남은 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아델의 기구한 이야기는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감독 프랑수와 트뤼포가 <아델 H의 이야기>(1975)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면서 널리 알려졌다. 당대를 대표하던 위대한 작가의 딸이 이런 파란만장한 수난을 겪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19세에 이 영화를 찍은 이자벨 아자니의 미모가 깊고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모두가 애도했던 죽음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빅토르 위고는 다섯 아이를 가슴 아프게 떠나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섯 아이를 넘어서 셀 수 없이 많은 자녀가 존재했다. 바로 그의 삶과 작품에 영향을 받고, 그의 정신을 길잡이 삼아 살아간 수많은 프랑스 민중이다. 민중은 그를 사랑했다. 권력이 아니라 자유와 정의를 섬기는 그의 정치적 성향을 사랑했고, 망명을 갈지언정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 그의 용기와 기백을 사랑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담겨있는 그의 위대한 문학을 사랑했다. 위고가 파란만장했던 83세의 일생을 마치고 눈을 감았을 때, 파리의 모든 거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200만 명의 시민들로 가득 찼다.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위고의 관은 개선문 아래 안치되었다가 수많은 인파의 눈물 속에 프랑스 위인들의 마지막 안식처인 팡테옹으로 옮겨졌다. 비록 사적인 삶에 있어서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남았을지언정, 공적인 측면에서 위고의 삶은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하고 사랑받은 위대한 인생이었다고 할 것이다. 

 

참고 문헌 
『빅토르 위고』 델핀 뒤사르 저, 백선희 역
『프랑스 근대 문학』 미즈바야시 아키라 외, 이차원 역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3호 2022년 6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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