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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인터뷰] <안티고네> 김호정, 자유를 향한 갈망 [No.115]

글 |나윤정 사진 |김수홍 2013-05-28 3,899

국립극단과 한태숙 연출이 2011년 <오이디푸스>를 잇는 연작 <안티고네>로 다시 만났다. 한태숙 연출은 일찌감치 안티고네 역에 배우 김호정을 염두에 두고 캐스팅을 시작했다. 김호정의 안티고네를 상상해 보았다. <갈매기>의 니나, <보이체크>의 마리로 분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처연한 듯 보이지만 강인한 내면을 지닌 그 특유의 여성스러움은 비극 앞에 던져졌을 때 더욱 빛을 발하였다. <안티고네> 역시 그러하리라.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김호정은 예상을 뒤엎었다. 짧게 자른 머리 탓일까? 여성스러움을 털어낸 그녀의 얼굴이 새삼 낯설고 강렬하다. 이렇게 김호정의 안티고네는 묘한 첫인상을 주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셨네요. 역할 때문에 그런 건가요?
한태숙 연출님이 머리 이야기를 먼저 하셨어요. 밀었으면 좋겠다고. 왜냐하면 오이디푸스 왕은 안티고네에게 아버지이자 오빠잖아요. 그녀가 정서적으로 정상일 수 없다는 거예요. 연출님은 안티고네를 달리는 전차처럼 표현하고 싶다고 하셨죠. 제가 그런 모습으로 딱 등장하면 좋겠다고요. 그래서 며칠 전에 머리를 잘랐어요.

 

 

외적인 변화가 심리적인 부분에도 영향을 끼칠 것 같아요. 연기할 때도 그런 변화를 느끼나요?
마음가짐이 훨씬 달라졌어요. 추리닝 입고 있을 때랑 정장 입고 있을 때 자세부터 바뀌잖아요. 연기도 똑같더라고요. 역할에 맞게 머리를 자르고 나니깐 연기의 방향이 더 잘 잡히는 것 같아요. 도움이 많이 되고 있어요.

 

한태숙 연출이 직접 안티고네 역을 권유했다고 들었어요.
연출님과 1999년에 <나운규>란 작품을 같이 했어요. 그때 참 어리고 당돌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절 캐스팅하신 것 같아요. 요즘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당분간 작품을 안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안티고네>라고 하니깐 마음이 확 바뀌더라고요. 순간 너무 하고 싶었죠. 개인이 권력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잖아요. 이길 수 없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네는 속 시원히 할 말을 다하더라고요. 저랑 잘 맞는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제가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성격이거든요. 그래서 안티고네 역을 권유받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 이미지가 이런 것인가? 웃음도 나오더라고요. 사실 영화 쪽에서는 저를 차분한 이미지로 생각하거든요. 아, 연극 쪽에서 내 이미지는 다르구나. 그럼 해봐야겠다. 바로 덤볐죠.

 

배우 김호정의 이미지에도 큰 변화가 느껴져요. 그 자체만으로도 이번 무대에 더해지는 색다른 해석이 기대되네요. 안티고네는 어떤 인물로 그려지나요?
기존 작품들의 안티고네는 대부분 아리따운 여성의 모습이었어요. 하지만 이번 무대에서는 좀 다르게 표현돼요. 처음에 대사 연습을 하는데 한 선생님이 갑자기 화를 내시는 거예요. “네가 왜 이렇게 여자 느낌이 나지?” 안티고네는 아름다움이나 일그러짐 속에서 표현되는 거지 예쁜 모습이 아니라는 거예요. 점점 인물을 중성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정신적으로 굉장히 불안하고 또라이 기질을 지닌 인물로 그려질 거예요.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팽팽한 대결이 극의 백미인데, 신구 배우가 크레온 역을 맡았네요. 노장의 크레온이 주는 느낌이 독특한데요?
신구 선생님은 크레온이 굉장히 인간적이면서 능수능란한 인물로 표현되길 바라세요.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우두머리가 엄청나게 무서운 일을 벌일 때는 절대 흥분하지 않는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어마어마한 기업의 대표이지만 인터뷰할 때 절대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 선생님의 크레온도 그런 느낌을 줄 거예요. 조용조용하게 안티고네의 젊은 기운을 계속 돋우면서 그녀를 코너로 몰고, 욱하게 만든 다음 노련하게 죽음으로 이끄는 거죠.

 

그간 많은 작품들이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립을 격렬한 감정의 폭발로 다룬 반면, 이번 무대는 두 인물의 예민한 지능적 싸움이 펼쳐지겠네요.
미묘한 심리전으로 그려질 거예요. 저도 처음엔 기존 무대들을 떠올리며, 단단히 마음먹고 리딩에 들어갔어요. 한 순간도 가만히 서서 연기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죠. 그런데 한 선생님이 “네가 투사니?”라고 하는 거예요. 비록 정의로움을 따지면서 죽었지만, 안티고네는 왕가의 핏줄이니 얼마나 오만한지 생각해보라고요. 사실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결은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이잖아요. 관객들은 저돌적인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팽팽한 싸움을 기대하고 있지만 연출의 생각은 이런 일차원적인 해석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에요.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결은 날카롭고 예민한 칼날로 서로를 쓱쓱 베는 듯한 싸움으로 표현될 거예요. 신구 선생님 연기가 굉장히 섬세하고 예리하셔서, 크레온과 안티고네의 대결이 재밌어요. 

 

<안티고네>가 품고 있는 동시대성은 오늘날에도 큰 의미를 갖고 있어요. 지금 이 시점에서 안티고네를 연기한다는 것, 어떠세요?
흥미로운 건 이번 역할을 하면서 제 안에 쌓인 응어리를 해소하게 돼요. 특히 저주를 퍼붓는 장면에서는 물 만난 것처럼 연기를 해요. 근래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속상했거든요. 작품을 통해 쏟아내니 어느 정도 해소가 되더라고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 『안티고네』를 다시 읽어 봤어요. 배우들이 어떤 식으로든 자기 역할에 공감하잖아요. 그런데 이번엔 공감을 못하겠더라고요. 안티고네가 오빠의 시신을 묻는다고 할 때 동생이 말리잖아요. 크레온이 시신을 묻는 자를 죽인다고 했는데,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느냐고. 그게 딱 저더라고요. 지금 모든 사람들이 그럴 거예요. 큰 문제에 직면했을 때 권력 앞에 맞서 싸우지 않잖아요. 뒤에서 욕을 하거나 피하죠. 하나의 정의를 위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안티고네에게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내가 이 이야기를 어떻게 설득시키지? 처음엔 많이 고민했죠. 근데 한편으론 왜 굳이 공감해야 하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반적인 역할이 아니잖아요. 안티고네는 영웅이에요. 비참하게 죽었을지라도 역사에 남았어요. 굳이 이해시키려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어느 덧 배우로 활동한 지 20여 년이 넘으셨어요. 어느 순간부터 김호정은 과작(寡作) 배우라는 인식이 생겼어요.
근래에는 1~2년에 한 편 정도 작품을 해요. 일단 여러 작품을 할 정도로 몸이 건강하지 않아요. 처음 대학로에 발을 디뎠을 땐 쉬지 않고 연극을 했어요. 워낙 연극을 사랑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 백수로 있는 게 불안해서 그냥 막 작품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대학 동기들은 브라운관과 영화에 계속 나오는데, 연극은 한 편 한다고 알아주는 게 아니니깐 더 불안했고요. 갑자기 못 견디겠더라고요. 냉정하게 작품을 끊고, 여행을 다녔어요. 중간 중간 공연이 있으면 무대에 오르고 또 여행을 떠났죠.

 

여행 경험이 무대에 설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배우로서 주로 어디서 영감을 받으시나요?
여행을 참 많이 갔어요. 얼마 전엔 산티아고를 다녀왔어요. 그렇다고 여행할 때 특별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에요. 영화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를 보면 체게바라가 끊임없이 여행을 하고 다니잖아요. 나중에 그가 일기에 이런 말을 쓰죠. 무엇이 나를 바꿨는지 모르지만 여행을 가기 전과 후의 내가 달라진 것을 느낀다고요. 명확한 답이에요. 새로운 환경과 만남이 주는 낯설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영감을 주는 것 같아요.

 

과작인 만큼 작품 선택도 신중하게 이루어질 것 같은데,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모든 걸 봐요. 좋은 희곡인지, 누가 연출하는지, 어떤 극장에서 하는지 다 보죠. 때에 따라서 해야 할 명분이 명확한 작품을 선택해요.

 

1995년 <아, 이상>으로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신인상, 2001년 영화 <나비>로 로카르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음에도 주목받는 것이 부담스러워 스포트라이트를 피하셨어요. 유명해지는 것이 싫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배우로서 쉽지 않은 선택 아닌가요?
물론 다른 배우와 경쟁이 힘들긴 하죠. 참 이기적인 생각인데요. 전 조용히 작품 활동을 하고 싶어요. 사생활은 철저하게 자유롭고 싶어요. 모든 것을 만천하에 내놓으면서 사생활이 없어지는 게 싫어요. 지하철 타고 다니는 거 지금도 정말 좋거든요. 배우라는 직업이 화려한 것 같지만 굉장히 처절해요. 그 처절함을 처음 느낀 게 상 받을 때였어요. 지하 연습실에서 햇볕도 못보고 거의 죽어가고 있을 때쯤 드레스 입고 상을 받으러 오라는 거예요. 시상식장은 정말 화려했는데, 전 그동안 너무 고생을 많이 해서 소감도 제대로 말할 수 없었죠.

 

요즘 동국대 대학원에 다니시죠. 작품 활동과 학업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것도 연기가 아닌 연출을 전공하신다고요?
20대 때 미친 듯이 연극을 했어요. 막상 30대가 되니깐 허무해지더라고요. 배우가 어떤 작품을 맡아서 연기적으로 찬사를 받더라도 그게 영원하지 않잖아요. 다음 작품에서 망하면 비난을 듣게 되고요. 연극에서 출발해서 영화도 찍고 했지만, 명성과 부가 따르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고달팠죠. 작품이 잘못되면 정신적 충격도 컸고요. 그래서 마음을 비웠어요. 무대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조리극 몇 편을 하게 됐죠. 그때 아는 감독님이 공연을 보시고 부조리극이 아니라 ‘부소통극’이라고 말하더라고요. 그 말이 머리를 탕 쳤죠. 내가 내 함정에 빠져있었구나. 관객과 만나야 하는 배우인데 새로운 연극을 한다고 하면서도 소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죠. 옳다고 생각했던 길이 잘못됐더라고요.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죠. 더 늦기 전에 이론이든 실무든 전반적으로 연극을 정리해보고 싶었어요. 적어도 연극인이라면 연극 공부를 계속 해봐야겠다. 연기보다 연출 공부가 흥미롭더라고요.

 

어떤 작품을 연출하고 싶으세요?
갑자기 연출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요. 혹시 기회가 된다면 작은 작품을 오랜 기간 준비해서 연출해보고 싶은 거예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전 작품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구성하는 작업에 관심 있어요. 김윤정 안무가와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데, 독특한 작업을 하고 있는 친구예요. 동화를 각색한 작품에 움직임을 넣어서 무대에 올리는 걸 함께 고민 중이에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연극이란 것이 배우에게 참 묘한 존재란 생각이 드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오르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대가 제 삶의 일부분이더라고요. 한동안 연극을 안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작품을 해야 뭔가에 빠져있는 듯해서 좋더라고요. 무대에 있으면 내가 살아있음이 느껴지거든요. 결국 그냥 좋아서 하는 거예요. 연극은 좋지 않고,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없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5호 2013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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