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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너와 나의 거리, <아몬드> 문태유 [No.211]

글 |이솔희 사진 |김참 2022-09-15 1,965

너와 나의 거리
<아몬드> 문태유

 

<아몬드>의 주인공 윤재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탓에 주변 사람들과 쉽게 마음을 나누지 못한다. 그런 그가 타인에게 공감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한 발자국 떨어져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어떤 편견도 없이 말이다. 윤재를 연기하는 문태유 역시 스스로를 구성하는 가장 큰 조각인 연기를 자신에게서 떼어 내고, 배우 문태유의 삶과 인간 문태유의 삶을 구분 짓기 시작했다. 배우로서 더 오랫동안, 흔들림 없이 살아가기 위함이다. 사랑하는 대상과의 공존을 위해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겠다는 두 사람의 이 역설적인 선택은 작품 속 윤재의 말처럼 “독이 될지 꿀이 될지 알 수 없더라도 항해를 멈추지 않겠다”라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감정을 사유하는 시간


<개와 고양이의 시간> 이후 약 2년 만에 뮤지컬 무대로 돌아오게 됐어요. 그간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기상청 사람들> 등 안방극장에서 활약했죠. 다시 무대에 서는 소감이 어떤가요?
그동안 공연을 정말 하고 싶었는데, 일정이 미리 정해져 있는 작품들 때문에 도저히 시간이 안 났어요. 그러던 중 딱 스케줄이 비어 있는 시기에 <아몬드>를 제안받았어요. 흔쾌히 참여하겠다고 했죠. 너무나도 그리워하던 무대에 돌아왔지만, 첫 공연이 올라가지 않아서 아직은 실감이 안 나요. 걱정되고 긴장되는 마음도 크고요. 관객분들을 만나고 나서야 ‘역시 이런 현장감을 느끼기 위해 무대로 돌아온 거였지!’ 하고 실감할 것 같아요.

 

지난 2년은 카메라 앞에 서는 것에 집중해 왔잖아요. 더 많은 사람에게 얼굴을 알릴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나의 가능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을 것 같아요. 반면에 무대는 태유 씨가 가장 잘 아는 공간인 만큼 부담이 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긴장이 되나 봐요.
저는 아직도 무대가 편하지 않아요. 앞으로 몇 년을 더 공연한대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고요. 그리고 배우는 무대가 편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관객분들이 극장에 오기 위해 들이는 돈과 시간을 생각하면 늘 최선의 결과물을 보여 드려야 하니까요. 그에 대한 책임감이 있기 때문에 어떤 순간에도 편하게 연기한 적은 없어요. 물론 공연을 만들어 가는 환경 자체는 드라마 현장보다는 훨씬 편하고 익숙하죠.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 스태프 모두가 하나의 목표 아래 한마음이 되어 땀 흘리는 이 소중한 과정이 정말 그리웠어요.

 

<아몬드>의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나요?
제가 연기하는 윤재는 감정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는 아이예요. 마음속에 감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감정을 인식하고 적절히 표현하는 능력이 부족하죠. 그런데 엄마와 할머니의 진심 어린 보살핌과 곤이, 도라와의 만남을 통해 감정을 조금씩 느끼고 표현할 수 있게 돼요. 또 <아몬드>는 윤재의 변화에서 이야기가 끝나는 게 아니라, 윤재처럼 공감받지 못하는 삶을 살았던 곤이와 도라도 윤재를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줘요. 저한테는 그 점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배우는 감정을 극대화해서 느끼고, 표현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인물을 연기하게 됐어요. 감정표현 불능증을 앓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까요?
제가 연기를 처음 시작한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약 20년 동안 노력했던 부분이 감정을 극대화해 표현하는 거예요. (웃음) 그래서 윤재를 연기하면서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감정 표현을 억지로 누르느라 애를 먹고 있어요.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건가 걱정됐는데, 연출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방향을 잡아 가고 있죠. 연습 초반에는 윤재의 감정 표현 수위를 조절하는 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보다 더 어려운 건 뮤지컬 넘버를 부르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뮤지컬에서는 인물이 느끼는 감정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노래가 시작되는데,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친구가 갑자기 감정을 가득 담아서 노래를 부를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멜로디 자체에 담긴 감정, 딱 그 정도까지만 표현하고 윤재로서의 감정은 개입되지 않게 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무덤덤한 윤재와 달리 저희 작품 뮤지컬 넘버는 리듬감이 풍부한 편인데, 음악이 바로 관객분들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게 하는 힘인 것 같아요.

 

윤재가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감정의 샘이 트이게 되잖아요. 윤재가 감정을 깨닫게 되는 흐름을 매끄럽게 표현하는 게 가장 큰 숙제일 것 같아요.
맞아요. 윤재의 변화는 저희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하지만 의도적으로 ‘이때 감정을 터트려야지!’하고 계산해서 연기하는 걸 경계하려고요. 그래서 저는 윤재의 마음을 가만히 따라가 보려고 해요. 곤이를 만나고, 도라를 만나고, 엄마와 할머니의 사랑을 통해 감정을 느끼게 되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저도 천천히 느끼려고요. 공연 중반까지 감정이 없는 윤재의 모습을 보여 드리기 때문에, 작품 후반부에 윤재가 감정을 느끼게 되는 순간을 진심으로, 과장 없이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관객분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일상생활에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오히려 다들 감정을 조금씩 숨기면서 살아가죠. 저는 연기할 때 그 지점이 항상 고민이에요. 연기를 할 때 일상생활에서 표현하는 그 이상으로 감정이 과해지기 쉽거든요. 하지만 관객분들은 배우가 속으로 느끼는 감정보다 겉으로 표현하는 감정이 더 세면 바로 알아차리시죠.

 

배우로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됐겠네요.
그동안은 어떤 작품을 하든 활자 속에 있는 감정을 찾아내느라 바빴어요. 인물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을 끌어내서 악을 쓰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 내가 뭐라도 해낸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윤재와 가까워지면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건 뭘까?’라는 고민에 빠졌죠. 그러다 결국 ‘그럼 감정은 도대체 뭘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고요. 그런 생각의 과정을 거치다 보니 상상할 수 있는 감정의 폭이 넓어지더라고요. 배우는 어쨌든 관객분들께 어떠한 감정을 끄집어내서 보여 줘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해 왔어요. 그런데 이번 작품을 만난 후로는 어떤 감정은 꼭 표현하지 않아도, 그냥 내가 그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관객분들에게 전달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감정 외에 <아몬드>에서 크게 와닿은 키워드가 있다면요?
공감이요. 제게 이 작품이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는 공감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줬기 때문이에요. ‘공감을 표현할 때도 적정 거리가 필요할까?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같이 울어 주는 게 최고의 공감일까?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공감도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연습 내내 제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공감이라고 하면 보통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을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아몬드>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통해 공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게 역설적이면서도 흥미로워요. 사실 공감이라는 이유로 상대방의 상황을 내 시선으로 재단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하지만 윤재는 그 어떤 편견도, 기대도 없이 상대방 곁에 묵묵히 서서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공감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윤재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소외됐지만, 그의 삶을 지탱해 준 엄마와 할머니, 마음의 벽을 허물어 준 곤이와 도라가 있어 세상으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었어요. 태유 씨가 지금의 문태유가 되기까지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나요?
넓은 범위에서 보면 살면서 만난 모든 사람들이 제게 영향을 줬어요.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 행동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면서 저만의 가치관을 쌓아 올려 왔거든요.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제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제 동생이에요.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제 동생은 14년 전에 하늘로 떠났어요. 동생의 죽음은 저라는 사람의 방향성을, 또 배우로서 연기의 결을 바뀌게 했죠. 사실 여태까지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이야기인데, 질문을 받자마자 동생 생각이 났어요. 이제 슬픔으로 느끼기보다는 기억 한편에 소중히 남길 때가 온 것 같아요. 잊을 수 없고, 잊히지도 않는 일이지만 그 시간에 머물러 있는 건 동생도 원하지 않을 테니까요.

 

 

오래도록 연기하기 위해

 

최근에는 여러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죠. 특히 태유 씨를 <슬기로운 의사생활> 속 피곤에 찌든 신경외과 의사 용석민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아요. 꾸준한 도전 끝에 대중에게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는데, 배우로서 심적인 변화가 생겼을까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 가운데 연기를 정말 잘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아직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이죠. 저 역시 온전히 제 실력만으로 드라마에 연이어 출연하고, 얼굴을 알리게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많은 배우들이 기다리는 그 운이 제게 와 줬을 뿐이에요. 정말 감사하게도 끊임없이 평가받는 배우의 삶이 버거워질 때쯤 항상 새로운 힘을 주는 도전이 주어지더라고요. 이번에는 드라마가 그랬고요. 사실 예전에는 무대 배우라고 하면 연기할 때 특유의 억양이 있을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무대 출신의 선배 배우들이 꾸준하게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무대 배우의 능력치를 증명해 주셨고, 후배들이 따라갈 수 있는 길을 조금씩 터 주셨어요. 그 덕에 저를 비롯한 무대 배우들이 매체에서도 주목받을 수 있게 된 거고요. 좋은 타이밍에 뒤를 이을 수 있게 됐다는 것, 이것도 제 운이겠죠?

 

<아몬드>에서 윤재는 달리는 걸 좋아하는 도라에게 왜 달리느냐고 물어요. 그러자 도라는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달리는 거라고 대답하죠. 배우에게는 연기가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저에게 연기는… 직업입니다. (웃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연기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어요. 연기를 못하면 제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죠. 근데 그러다 보니 배우로서 어려움을 겪을 때 인생 자체가 흔들리더라고요. 제 삶의 의미를 연기에서만 찾으려고 했으니까요. 저라는 배우를 대중에게 알려 준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정말 감사한 작품이지만, 첫 번째 시즌을 촬영할 때는 마음이 극도로 불안했어요. ‘공연 대신 선택한 이 작품이 잘 안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에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죠. 그때 제 삶과 연기 사이에 선을 그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삶이 건강해야 연기도 건강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분야를 가리지 않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연기와 맞닿아 있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어요. 의외인데요?
생존 본능이에요.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계속 살아야 하니까요. (웃음) 30대 중반까지 매일 마음을 졸였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몸도 정신도 많이 힘들었죠. ‘내가 행복하기 위해 연기를 하는 건데 왜 이렇게 불행하지? 이렇게 괴로워하면서까지 할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스스로를 몰아세우니까 결국에는 제 자신한테 미안해지더라고요. 이제는 제 삶에 연기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행복을 채워 넣기로 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이게 제가 평생 연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계속 꼿꼿하게 서 있기만 하다가는 결국 부러질 테니까 이제 조금 유연해지려고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1호 2022년 4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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