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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TM PICK] 서로를 비춰 주는 거울, 한정석 작가·이선영 작곡가 인터뷰 [No.211]

글 |안세영 사진 |표기식 2022-09-14 1,837

서로를 비춰 주는 거울
한정석 작가·이선영 작곡가 인터뷰

 

한정석 작가와 이선영 작곡가는 전작에서부터 꾸준히 정반대의 인물이 화합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려 왔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에서는 6·25전쟁 중에 만난 남한군과 북한군의 우정을, <레드북>에서는 빅토리아 시대 보수적인 신사와 도발적인 글을 쓰는 여성 작가의 사랑을 그렸다. 신작 <쇼맨_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배우>(이하 <쇼맨>)는 독재자의 대역 배우였던 70대 노인 네불라와 그의 화보 촬영을 맡은 냉소적인 20대 청년 수아의 이야기다. 인종도 성별도 세대도 다른 두 주인공은 좀처럼 접점을 찾기 힘들다. 게다가 유쾌한 분위기의 전작에 비해 <쇼맨>은 무겁고 현실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세 번째 작품을 통해 어느 때보다 멀리 나아간 두 창작진은 관객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었을까?

 

 

한정석 작가


<쇼맨>은 독재자의 대역 배우였던 네불라를 포함해 누군가를 대신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소재가 독특한데 어떻게 구상한 작품인가?
오래전에 우연히 히틀러가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연설 연습을 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군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를 타고난 줄 알았던 독재자가 고도로 쇼맨십을 훈련한 사람이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동시에 그런 사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추종자는 왜 생겨나는지 궁금하더라. 그러다가 『대리사회』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으로서 사유하지 못하고 사회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고 있다는 글을 읽고 크게 공감했다. 그 책에 “이 사회 안에서 온전히 주체적일 수 없다는 자각이야말로 주체성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러한 생각을 신격화·우상화 현상과 접목한 작품을 쓰고 싶었다. 상업성이 부족해 보이는 소재라 미뤄 두었다가 국립정동극장으로부터 신작 제안을 받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정권에 순응해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전범 아이히만의 사례를 통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무사유가 곧 악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무비판적으로 주어진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네불라는 바로 그 아이히만을 연상시킨다.
네불라는 무사유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회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네불라처럼 맹목적으로 행동하는 순간이 있다. 작품 제목 <쇼맨>에는 연예인이나 정치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구성원으로서 ‘쇼맨’ 같은 역할을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관객들이 네불라를 통해 그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길 바랐다. 극 중에서 수아가 네불라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수아와 네불라는 인종도 성별도 세대도 다르다. 두 주인공을 이렇게 동떨어진 인물들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인물들끼리는 서로 이해하기 쉽고 갈등이 약할 수밖에 없다. 의도적으로 서로 엮일 일이 없고 이해하기 힘든 극과 극의 대척점에 있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단순히 ‘우리도 조심하지 않으면 네불라처럼 될 수 있다’는 경고에 그치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그럴 때 타인이 나를 비춰 주는 거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공연을 보는 이유 중 하나도 가공의 세계를 통해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지 않나. 네불라와 수아의 관계도 그렇다. 서로를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성찰하게 된다.

 

 

네불라와 수아가 처음 만나는 장소로 유원지를 선택한 이유도 궁금하다.
네불라는 사람들의 관심을 갈구하는 인물이니까 세탁소를 퇴직한 후 유원지에 취직했으리라 생각했다. 수아는 극 중에서 유원지를 찾는 사람들 대부분이 잠깐 머물다 떠나기 때문에 그곳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혼자만 이방인이 된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수아가 유원지에서 행복한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내심 대리 만족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략되었지만 원래 수아에게는 먹방 시청을 즐긴다는 설정도 있었다. 수아는 자기가 직접 누리지 못하는 걸 미디어 등을 통해 간접 경험하며 대리 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대본을 썼다.

 

전작들은 오프닝 뮤지컬 넘버를 통해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에 반해 <쇼맨>의 첫 곡 ‘인생은 내 키만큼’은 가사가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작품의 시작과 끝부분에 배치되는 이 곡이 어떤 역할을 하길 기대하나?
전작에서는 첫 곡을 통해 관객을 작품 속 세계에 안착시키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쇼맨>에서는 관객이 수아의 의식을 따라 서서히 네불라라는 인물에게 다가가길 바랐다. 모호한 프롤로그로 시작해 후반부 리프라이즈를 통해 이미지가 선명해지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가사 “인생은 내 키만큼 깊은 바다, 파도는 계속 쉼 없이 밀려오는데 나는 헤엄칠 줄을 몰라 제자리에 서서 뛰어오른다”에는 사람은 모두 자기 몫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나의 평소 생각이 담겨 있다. 후반부에 이 곡을 사용함으로써 수아가 네불라와의 만남을 통해 타인을 연민하게 되는 걸 은유적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결말에서 수아는 어릴 때 자신이 돌보다가 떠나온 장애인 동생과 다시 대면한다. 네불라와 수아의 이야기로 끝내지 않고 수아와 동생의 재회로 이야기를 끝맺은 의도가 궁금하다.
구시대의 유물인 네불라는 무대에서 먼저 퇴장시키고 미래를 살아갈 수아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수아는 네불라를 만나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한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동생과도 다시 마주 볼 수 있게 된다. 그게 앞으로 세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각자의 사정 때문에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낯설기 때문에 기피하고 배척한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서로가 서로를 비춰 주는 거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담아 마지막 장면을 썼다.

 

창작자로서 이번 작품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동안에는 대중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극작법에 맞춰 기승전결이 뚜렷하게, 관객이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 이번에는 시시콜콜 설명하려 애쓰지 않고 좀 더 자유롭게 썼다는 점에서 스스로 만족도가 높다. 지금의 나 자신이 가장 재밌게 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선영 작곡가

 

이번 작품의 전체적인 음악 콘셉트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곡은 무엇인가?
세 번째 곡 ‘모두가 나를 봐’다. 네불라가 어린 시절 누군가를 흉내 냄으로써 가족들의 관심을 끌고 행복해하는 순간에 나오는 곡이다. 여기서 파생된 테마가 나중에 독재자의 대역 배우로, 멍청이 쇼의 주인공으로 사람들 앞에 서서 관심을 받을 때 다시 흘러나온다. 이 과정에서 처음에는 반짝거리는 느낌이었던 밝은 테마가 뒤로 갈수록 어둡게 왜곡된다. 네불라는 어린 시절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사랑받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을 깨닫는다. 하지만 사랑받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테마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네불라의 캐릭터가 드러나길 바랐다.

 

본지에 연재 중인 에세이에서 이번 작품은 ‘익숙하고 편한 것보다는 어려운 선택을 해 보자’라는 마음으로 작곡했다고 쓴 바 있다. 그 어려운 선택이란 무엇이었나?
<쇼맨>에는 6명의 배우와 6명의 밴드가 등장한다. 밴드를 무대 위에 올리는 건 처음부터 작가, 연출가와 합의된 부분이었는데 악기 선정이 고민이었다. 네불라를 대표하는 악기로 처음 떠올린 건 그가 독재자의 대역으로서 맛본 영광과 쓸쓸함을 표현할 수 있는 트럼펫이었는데, 사실 트럼펫이라는 악기를 이번에 처음 써 본다. 작곡과 편곡, 음악감독까지 혼자 소화해야 하는데 낯선 악기를 감당할 수 있을까? 소극장에서 커다란 트럼펫 소리가 다른 악기와 잘 어우러질까? 이런 두려움과 우려가 있었지만 처음 떠올린 답이 맞을 거라는 생각에서 강행했다. 뒷일은 미래의 내가 책임질 거란 생각으로. (웃음)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노래가 대사 장면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레드북>은 노래가 대사 장면과 어우러져 드라마와 긴밀하게 연결되도록 만든 작품이라고 들었다. <쇼맨>은 어느 쪽에 가까운가?
완전히 후자다. <쇼맨>은 대본을 읽었을 때 음악 없이도 드라마를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음악이 드라마를 확장하기보다는 전개를 도울 수 있도록 작업했다. 전체 곡 수는 14곡으로 전작에 비해 적은 편인데 곡 하나하나의 길이가 길다. 본격적으로 노래가 시작되기 전에 2~3분 동안 연주만 이어지기도 한다. 배경 음악도 19곡이나 된다.

 

에세이에서 음악 연습을 시작한 날 배우들이 ‘인류 멸망을 앞둔 듯한’ 표정을 지었다고 쓰지 않았나. (웃음) 고난도의 노래가 예상된다.
배우들 입장에서는 제약이 많은 음악이다. 방금 이야기했듯이 노래가 시작되기 전 2~3분 동안 연주가 깔린 상태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하는데, 이때 무조건 정해진 템포에 맞춰 대사를 쳐야 한다. 호흡이 조금이라도 늘어지면 제때 노래를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뮤지컬에서는 보통 이럴 때 뱀프(2~4마디 단위로 일정한 코드나 리듬을 반복하는 것)를 넣어서 배우들이 대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음 소절로 넘어간다. 하지만 나는 5년간 음악조감독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날그날 달라지는 배우의 호흡에 맞춰야 하는 연주자의 심정이 얼마나 초조한지 잘 안다. 또 뱀프를 쓰면 음악을 매끄럽게 연결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뱀프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여신님이 보고 계셔>, <레드북>에 비해 코러스의 비중이 커진 점도 음악적 변화처럼 보인다.
전범 네불라에게 발언권을 주는 게 그를 옹호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에, 음악적으로 인물과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네불라의 감정에 지나치게 동조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네불라가 직접 노래를 부르는 대신 코러스가 그의 내면을 대변하여 노래하는 방법을 썼다. 자기 연민이나 변명처럼 들리지 않도록 말이다. 더욱이 네불라는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코러스가 그를 대신해 노래하는 형식이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등장인물이 직접 노래하지 않고 코러스가 인물의 상황과 감정을 대신 노래한다는 점에서 박소영 연출가와 함께한 음악극 <섬: 1933~ 2019>가 연상되기도 한다.
<섬: 1933~2019>에는 1960년대 소록도에서 일했던 수녀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직접 자신들의 선행에 대해 노래하는 건 인물의 성격과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들의 이야기가 소록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 전해지는 것처럼 음악에도 코러스를 활용하면 좋겠다 싶어 그런 방식을 제안했다. <쇼맨>에서 코러스를 활용한 의도는 다르지만 형식은 일맥상통한다.

 

창작자로서 이번 작품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작업 과정에서 매일 체력과 능력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그 한계를 깨고 어떻게든 해내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이전에 <섬: 1933~ 2019>를 작업할 때도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공연을 올리고 나니 앞으로 뭐든지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에너지를 소진했을 때 오히려 차오르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쇼맨>을 완성하면 또 다른 원동력을 얻지 않을까 생각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1호 2022년 4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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