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아더> 이충주
가지 않은 길
이충주가 <썸씽로튼>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당연히 섹시한 인기 작가 셰익스피어를 연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역할은 셰익스피어에 밀려 열등감에 시달리는 닉 바텀이었다. 이충주가 <킹아더>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초연 때처럼 다크한 매력의 악역 멜레아강을 연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역할은 멜레아강의 적수 아더였다. 뮤지컬 무대 밖에서도 크로스오버 가수로, 또 드라마 배우로 활동 반경을 넓히며 새로운 도전을 이어 가고 있는 이충주. 정해진 운명보다 자신의 선택을 믿고 성장해 가는 아더의 이야기는 어쩌면 배우 이충주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나를 보여 줄 기회
지난 2월 종영한 <공작도시>는 충주 씨가 처음 출연한 드라마였죠.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는 인물들 속에서 한 사람을 향한 순애보를 보여 주는 검사 박정호 역을 맡아 눈길을 끌었는데, 이 작품에는 어떻게 캐스팅되었나요?
매체 연기에 도전해 보고 싶어서 계속 문을 두드리다가 <공작도시> 오디션을 보게 됐어요. 제가 연기한 박정호는 야망을 위해 자신을 떠난 연인을 끝까지 도와주는 인물인데, 원래 감독님께서 대본을 보고 떠올린 정호의 이미지는 저와 정반대였다고 하시더라고요. 저처럼 날카로운 이미지의 배우가 우직한 역할을 맡으면 오히려 신선할 것 같아 캐스팅했다고 하셨어요.
드라마 촬영을 경험해 본 소감이 어때요?
2021년은 거의 일 년 내내 <공작도시>를 촬영하면서 보냈어요. 100% 사전 제작 드라마인 데다 요즘 보기 드문 20부작이라 촬영 기간이 길었거든요. 그런데 영상을 통해 연기하는 제 모습을 보는 건 아직도 너무 부끄러워요. 드라마가 방영하는 동안 공연이 없으면 집에서 본방을 사수했는데 잘 보다가도 제가 나오면 자꾸 고개를 숙이게 되더라고요! 드라마 촬영을 경험해 보니 매체와 무대 양쪽을 오가며 활동 중인 선배님들이 새삼 존경스러워요. 저도 그렇게 양쪽을 성공적으로 넘나드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2021년은 <팬텀싱어 올스타전> 방송을 통해 충주 씨가 속한 남성 사중창단 ‘에델 라인클랑’이 다시금 주목받은 해이기도 해요. 지난 2월에 첫 단독 콘서트를 여는 등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활동 중인데, 그동안 개인으로만 활동하다가 그룹 활동을 병행하면서 생긴 변화가 있을까요?
배우로 활동할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는 통로가 생긴 것 같아요. 뮤지컬이나 연극, 드라마에서는 어디까지나 제가 아닌 특정 배역을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는 거잖아요. 반면 에델 라인클랑의 이충주로 관객 앞에 설 때는 배역의 틀에서 벗어나 훨씬 다양한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그리고 제가 INFP라서 낯을 가리는 편인데, 진짜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만 나오는 숨겨진 모습이 있거든요. (웃음) 에델 라인클랑 멤버들과 함께하는 무대 그리고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그런 모습도 만나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작년에 ‘너라는 가사가 끝나도’, ‘너와 나’ 같은 솔로 음원도 발표했잖아요. 뮤지컬에서 주로 어둡고 카리스마 있는 역할을 맡았는데 밝고 부드러운 발라드를 부르니까 색다르게 다가왔어요.
음원 발표는 순수한 취미 활동이에요. 음악 하는 지인들끼리 모여서 재미로 시작한 거라 정해진 룰이 없어요. 그때그때 이번에는 이런 장르를 시도해 보자, 이런 가사를 써 보자 의논하면서 곡을 만들고 있죠. 이 활동으로 제 음악적 역량을 쌓거나 수익을 내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나중에 음원이 늘어나면 커버곡 없는 콘서트를 해 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갖고 있어요. 아, 이것 자체가 원대한 소망인가. (웃음)
<썸씽로튼>에서 닉 바텀 역은 어떻게 맡게 된 건가요? 밝고 코믹한 작품에 출연하는 게 오랜만인 데다 닉 바텀보다는 자신감 넘치는 셰익스피어 역에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저도 처음에 출연 제안을 받고 ‘닉 바텀? 셰익스피어가 아니고?’라고 생각했어요. 연출님께 여쭤보니 “배우로서 이미지 변신도 해봐야 하지 않겠냐”라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체력적으로는 굉장히 힘들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공연을 이끌어 가면서 어마어마한 양의 대사와 노래, 춤을 소화해야 하니까요. 근데 공연이 끝나면 오히려 에너지가 채워지는 기분이에요. 공연이 주는 기운이 워낙 좋아서 몸은 힘들지만 마음이 벅차오른달까요. 공연하는 날이 기다려질 정도로 즐겁더라고요. 그리고 <브로드웨이 42번가> 이후로 춤을 많이 출 수 있는 작품을 다시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 한편에 품고 있었는데 좋은 시기에 좋은 역할을 만나서 감사해요. 지금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더 도전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썸씽로튼>에 패러디된 뮤지컬과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해서는 어떻게 공부했나요?
처음엔 그렇게 많은 작품이 패러디되어 있는지 몰랐어요. 그러다가 황석희 번역가님이 대본을 번역하면서 참고한 레퍼런스를 정리해 놓은 블로그 글을 읽었는데, 대사의 토씨 하나까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따온 걸 알고 깜짝 놀랐죠. 닉 바텀과 노스트라다무스가 부르는 ‘A Musical’이라는 곡에는 수십 편의 뮤지컬이 패러디되어 있어서 인터넷으로 일일이 작품 정보와 영상을 찾아보고 공부했어요. 배우들끼리도 서로 알고 있는 정보를 알려 주었는데, 특히 노스트라다무스 역의 남경주 선배님께 굉장히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충주야, 지금 이 안무가 어디서 나온 건지 알아? 바로 이 작품이야.” 하고 꼼꼼히 알려 주셨거든요. 저도 꽤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제목조차 몰랐던 작품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남경주 선배님이 “이것도 내가 출연한 작품이고, 저것도 내가 출연한 작품”이라고 말씀하셔서 더 놀랐어요.
‘A Musical’은 노스트라다무스가 닉 바텀에게 뮤지컬의 매력을 깨우쳐 주는 곡이잖아요. 뮤지컬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입장에서 뮤지컬만이 지닌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글쎄요, 한마디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뮤지컬은 종합예술이잖아요. 무대에서 연기를 하면서 노래하고 춤까지 추는데 거기에서 오는 어마어마한 희열이 있어요. 노스트라다무스의 말처럼 이렇게 재밌는 게 또 어디 있겠어요! 아무리 활동 영역이 넓어진다 해도 저의 뿌리는 뮤지컬에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뮤지컬을 놓는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선택의 갈림길에서
<킹아더>는 초연에 이어 두 번째 출연이에요. 초연 때 맡은 멜레아강은 엄청난 고음을 소화해야 하는 역할이었죠. 원래 음역대는 바리톤이라고 알고 있는데 멜레아강의 노래를 소화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성악도 시절 바리톤으로 공부를 시작하긴 했지만 여러 뮤지컬을 거치면서 음역이 훨씬 넓어졌어요. 어떤 곡이든 제 스타일로 불러내는 데 익숙해지기도 했고요. 물론 멜레아강의 뮤지컬 넘버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불러야 하는 노래예요. 언제든 거뜬히 부를 수 있겠다 싶은 노래는 아니죠. 하지만 멜레아강의 솔로곡 ‘빼앗긴 나의 시간’을 정말 좋아해서 초연이 끝난 뒤에도 여기저기서 많이 불렀어요. 듣는 순간 가슴을 뛰게 하는 곡이라 관객 호응도 좋더라고요.
<킹아더>는 초연 당시 가요 같은 음악과 안무 때문에 ‘뮤직뱅크’, ‘클럽 브리튼’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잖아요. 이런 관객 반응이 어떻게 다가왔나요?
하하, ‘뮤직뱅크’는 들어봤는데 ‘클럽 브리튼’이라고 불리는 건 지금 처음 알았네요. 솔직히 연습 기간에는 이 작품의 노래가 가요 같다고 느끼지 못했어요. 공연을 올리고 관객 반응을 보고 나서야 그렇게 느껴질 수 있구나 깨달았죠. 게다가 저는 멜레아강 역할을 맡은 다른 배우들에 비해 춤을 적게 추는 편이었거든요. 채현원 안무가님은 배우가 짜여진 안무대로 춤추기를 요구하기보다 각자 개성을 살려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편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멜레아강은 무거운 감정을 짊어진 채로 현란한 춤을 출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안무가님과 상의해 소위 골반 댄스로 불리는 몇몇 동작을 뺐어요. 배우마다 멜레아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랐던 거죠.
이번 시즌에 역할을 바꿔 멜레아강이 아닌 아더로 돌아온 이유는 뭔가요?
아더 역을 제안받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저의 멜레아강을 기억하고 다시 만나길 기다린 관객분들도 계실 텐데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게 좋을지, 배우로서 새로운 역할에 도전해 변화와 성장을 꾀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 많았죠. 결국 후자를 택했지만 쉽지 않은 도전이에요. <썸씽로튼>에서 ‘이충주는 셰익스피어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시선을 깨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이충주는 멜레아강을 다시 해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시선을 깨야 하니까요. 그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 가는 작업이 저한테는 의미 있을 것 같아요.
어찌 보면 멜레아강일 때 그렇게 원하던 왕좌를 차지한 셈인데 감회가 남다르겠어요.
네, 드디어 제가 엑스칼리버를 뽑네요. (웃음) 저는 연기를 할 때 철저하게 제가 맡은 역할에 집중하는 편이에요. 멜레아강을 연기할 때도 아더가 무슨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생각하지 않고 오직 멜레아강 입장에서만 생각했죠. 그래서 저에게 멜레아강은 악인이 아니었어요.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자신이 원한 모든 것을 아더에게 빼앗긴 멜레아강이 복수를 다짐하는 게 납득이 가고 연민이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아더의 관점에서 대본을 읽어 보니 새롭게 다가오는 점이 많더라고요. 아더 입장에서 보면 멜레아강은 왜 이러나 싶고…. (웃음) 그리고 아더에게는 멜레아강 말고도 처리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아요. 모르간도 상대해야 하고 백성도 구해야 하고요. 이제는 오롯이 아더에게 집중해서 작품을 바라보고 있어요. 대본과 음악도 초연과 조금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작품을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앞으로 아더를 연기하는 데 있어 가장 기대되는 장면과 고민되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이번 시즌은 검투 장면을 멋지게 연출하는 데 힘을 쏟을 예정이라고 들어서 어떤 장면이 탄생할지 기대돼요. 그리고 이제는 제가 엑스칼리버를 들고 싸우잖아요. 그냥 일반 검이 아니라 엑스칼리버를 휘두르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요. (웃음) 또 아더 역으로 새롭게 공연을 준비하면서 아더의 마지막 연설을 좋아하는 관객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중요한 장면인 만큼 잘 해내고 싶은데, 그 장면이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앞에서부터 아더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가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리숙한 청년이 왕이 된 후 고뇌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러데이션으로 잘 표현하고 싶어요.
아더 역의 뮤지컬 넘버를 불러 본 소감은 어때요?
이건 아더의 노래뿐 아니라 <킹아더>란 작품 전체의 음악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똑같은 멜로디가 가사만 바뀌어서 1절 2절 3절 반복되는 곡이 많아요. 그래서 관객들이 가요 같다고 느끼는지도 모르겠어요. 눈에 띄는 고음이나 다양한 변주 없이 같은 멜로디가 반복될 때, 이걸 어떻게 조금씩 다르게 불러서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감정을 전달할 것인가에 신경 쓰고 있어요.
작년부터 드라마 촬영, 에델 라인클랑 활동, 뮤지컬 무대에서의 이미지 변신 등 새로운 도전을 이어 가고 있잖아요. 이렇게 새로운 도전에 나설 때 두려움을 이겨 내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나요?
솔직히 말해 이겨 내는 방법 같은 건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항상 저지르고 후회하는 편이에요.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고 스트레스를 잔뜩 받으면서 ‘더 쉬운 길을 갈 수도 있었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할까’ 하고 제 자신을 원망하죠. 근데 또 그 스트레스가 없으면 일을 못 하나 봐요. 그렇게 힘들어하고 다음번에 또 어려운 길을 택하거든요. <썸씽로튼>의 닉 바텀 역도 지금이야 즐겁게 연기하고 있지만, 연습 과정에서 살이 쪽쪽 빠졌어요. 연기 결을 어떻게 잡아야 할지조차 모르겠더라고요. 너무 어려워서 속으로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을까’ 되뇌었어요. 그래도 누가 “너 셰익스피어 할래?” 하고 물어보면 “아니, 나 닉 바텀 할래”라고 대답할 거예요. (웃음) 마찬가지로 <킹아더>에서 아더라는 새로운 역할 대신 멜레아강을 다시 맡았더라면,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초보처럼 헤매는 대신 십 년 넘게 경험해 온 뮤지컬 무대에만 계속 섰더라면 모든 게 지금보다 쉬웠겠죠. 그런데 그러고 싶지가 않아요. 어려운 길을 선택하고 힘들어하면서도 꾸역꾸역 이겨 내는 걸 좋아하나 봐요.
한동안 코로나19로 인해 <썸씽로튼> 공연이 중단되고 충주 씨도 확진되어 자가 격리를 해야 했잖아요. 몸과 마음이 모두 힘들었을 텐데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요?
이전에도 코로나19 때문에 출연하기로 한 작품이 모두 취소돼서 수개월간 일을 못 하고 쉬어야 한 적이 있어요. 그때부터 일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어요. 사실 배우라는 직업이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공연이 없으면 백수나 다름없거든요. 배우에게 일이 주어진다는 게 얼마나 특별하고 감사한 일인지 절감했죠. 앞으로 일이 많아서 힘들다거나 쉬고 싶다는 말은 농담으로라도 절대 꺼내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건 죽을 때까지 감사해야 할 일이에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0호 2022년 3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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