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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인터뷰] 김주원, 춤추는 백조 더 넓은 곳은 향해 [No.106]

글 |정세원 사진 |김호근 2012-07-17 6,237

지난 15년 동안 김주원은 국립발레단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작은 얼굴과 새하얀 피부, 가늘고 긴 목과 팔, 아름답고 매혹적인 어깨선이 만들어내는 우아한 몸짓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풍부한 감성과 섬세함이 돋보이는 표정 연기는
토슈즈에 몸을 실은 김주원을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거듭나게 했다.
하루 열다섯 켤레의 토슈즈를 바꿔 신을 정도의 지독한 연습과 인접 장르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
새로움을 시도한 다양한 무대로 오랜 시간 정상의 자리를 고수해왔던 그녀가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의 타이틀을 내려놓고 감성을 자극하는 진정한 아티스트로 거듭나기 위한
홀로서기에 도전한 발레리나 김주원.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서는 마지막 무대 <포이즈> 연습을 마친 그녀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국립발레단을 떠난다는 소식이 뜻밖이었어요. 언제부터인가 발레리나 김주원과 국립발레단은 같은 단어처럼 느껴졌거든요. 제 인생의 20~30대를 고스란히 바쳤고 모든 것을 함께했으니까요. 발레단을 그만두는 건 꽤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일이에요. 발레단 처음 들어왔을 때도 어렴풋이 15년 정도 머무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요. 제가 가장 최상의 컨디션을 갖고 있을 때 발레단을 나오고 싶었어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예술적으로 성숙하고 완숙되어 있을 때 새로운 작업, 도전해보고 싶은 것들을 해볼 수 있는 넓은 곳으로 나가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결정이 됐어요.

 

최태지 단장님 반응은 어떠셨어요? 서운해 하지 않으셨나요? 워낙 쿨 하신 데다 아티스트들의 삶을 잘 알고 계셔서….(웃음) 아마 발레단에 머무는 게 저한테 더 낫다고 생각하셨다면 끝까지 잡으셨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 작업들을 이해하고 계셔서 정리가 잘됐어요. 게스트 프린시펄로 제가 할 수 있는 작품들은 계속 참여할 거거든요. 국립발레단 공연이 매년 150회 정도 되는데 그중 100회 이상을 소화하면서 발레단을 다녔어요. 항상 4~5편의 작품들을 동시에 준비하면서 지냈고, 한번에 4~5가지 역할을 소화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살았어요. 그게 참 행복했고 지금의 저를 만든 힘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아졌어요. 한 작품에 집중해서 저라는 사람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캐릭터를 연구해보고 싶어요. 지금보다 더 깊이 있고 예술적으로 성숙한 모습으로 관객들을 만나고 싶고요. 시간이나 스케줄도 제가 컨트롤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요.

 

그동안 보여주셨던 무대들이 그렇게 힘겹게 탄생했다니 더 놀라워요. 육체적으로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겠어요. 무엇보다 역할에 몰입하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물론 춤추는 순간마다 역할에 충실하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행복하게 춤추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런 것들이 발레단을 떠나야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오랫동안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주원으로 살았으니까 이제는 발레리나 김주원이라는 제 이름으로 살아보려고요. 더 깊이 있고 몰입된 모습으로 무대에 서고 싶어요.

 

1998년 <해적>으로 데뷔한 이후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에 출연하셨어요. 아마 국립발레단의 거의 모든 레퍼토리를 올린 것 같아요. 같은 작품을 너무 많이 공연했죠. 덕분에 10살 많은 선배님부터 10~12살 어린 후배들과 파트너로 춤을 출 수 있었어요. 제가 키워낸 파트너들이 상당히 많아요.(웃음)

 

파트너들을 키워냈다는 표현이 참 재밌네요. 데뷔시킨 후배들도 꽤 많아요.(웃음) <호두까기 인형>에 참여하지 않게 되면서는 마리 역의 배우들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어요. 초연 때 안무가한테 직접 안무를 받아서 13~14년 가까이 춤춰 온 역할이었거든요. 콩쿠르 나가는 후배들도 많이 도왔고요. 이동훈·김리회의 모스크바 발레콩쿠르, 정영재·김리회의 아라베스크 콩쿠르도 제가 가르친 건데 다행히 결과도 좋았어요. 다들 각자 일정 소화한 후에 작업하느라 힘들긴 했지만 무척 재밌었고, 덕분에 제가 많은 것들을 배웠어요.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무척 부담스러웠는데 언제부터인가 재밌어졌어요. 올해부터는 성신여대 겸임교수로 제 생애 첫 번째 제자를 갖게 돼요. 그동안은 제 무대에 대한 부담이 너무 커서 엄두도 못냈는데, 어느 순간 제가 가진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게 힘들지 않아졌어요. 그래서 더 기대돼요. 후배들이 제가 원하는 예술적인 표현들을 제가 겪었던 시행착오 없이 해내는 걸 보면서 정말 행복했거든요.

 

 

국내 정상의 발레리나로 살아가는 데 동료이자 라이벌인 김지영 씨는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었을까요? 우리가, 동년배로 비슷한 시기에 각자 러시아에서 유학했고, 국립발레단에서 주역을 맡았고, 또 러시아로 유학 떠날 때도 같은 비행기를 탔을 정도로 항상 함께해 왔거든요. 그런데 무대에서 보이는 개성이 다르다보니 비교를 많이 하셨어요. 경쟁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덕분에 각자의 다른 개성을 더 발전시키고 보완하는 데 좋은 촉매가 된 것 같아요. 지영이는 소중한 존재예요. 제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친구고요. 힘들 때 그녀가 미소 한 번 지어주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웃음)

 

평소 연습량이 상당하다고 들었어요. 동료들이 고개를 저을 정도라죠? 파트너들이 저를 좀 싫어해요. 제가 만날 연습하자고 하니까.(웃음) 제가 워낙에 손가락 하나, 눈빛 하나도 소홀히 하지 못하는 발레리나여서, 눈길이 지나가는 길에 의미 부여가 없으면 춤추기가 너무 힘들어요. 파트너와 파드되를 할 때도 서로 왜 바라보는지, 왜 도는지를 알아야 해요. 모든 작품에 똑같이 도는 동작이 나와도 그 이유는 작품마다 달라야 하잖아요. 그런 거 하나하나까지 다 의미 부여해서 만들어가다 보니까 아무래도 연습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만큼 공을 들이고 시간을 투자해 완벽하게 호흡을 맞춰서 공연을 하고 나면 제 파트너들이 누구보다 더 행복해 해요.

 

관객들 역시 주원 씨의 풍부한 감성과 섬세하고 드라마틱한 표정 연기에 감동받는데, 동작들에 의미 부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저는 예술가들의 섬세함을 좋아해요.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무용수나 아티스트, 배우들을 보면 섬세한 감정 처리가 너무나 매끄럽게 잘되어 있고, 하나하나 다 의도해서 만들었지만 누구보다 내추럴하게 표현하는 사람들이었어요. 볼쇼이 발레학교 선생님도 그런 춤을 추셨던 분이고, 제가 만난 안무가들도 저의 그런 섬세함을 높이 평가해주시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높이 뛰는 것보다 왜 뛰는지, 몇 바퀴 도느냐보다 왜 도는지가 더 중요했어요. 저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지나가는 과정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다뤄서 동작을 이어가면 마지막 동작도 아름답게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런 섬세함 때문일까요. 주원 씨에게는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이미지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요?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그런 면이 없지도 않은 것 같네요. 저는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많지 않거든요. 마음을 나누기까지는 시간도 오래 걸리는 편이지만 한번 마음을 주면 오래 가요. 이런 모습은 아무래도 발레라는 걸 하면서 만들어진 것 같아요. 제가 오랫동안 주역으로 무대에 섰잖아요. 토슈즈 위에 올라서서 두세 시간을 긴장된 상태로 춤을 추고 드라마까지 표현하는, 그런 리허설을 하루 8~10시간씩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서는 컨디션 조절이 반드시 필요했어요. 100회 정도의 공연을 소화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타이트한 삶을 살아야했겠어요.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을 15년 동안 반복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도 저만 보시면 ‘어쩜 그렇게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냐’며 신기해하실 정도로. 아마 그런 면들 때문에 여유가 없어 보이는 게 아닐까 싶은데요, 알고 보면 저 마음도 약하고 생각보다 쉬운 여자예요.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요. 호기심 천국이라 이것저것 관심이 많아서 다른 장르에 계신 분들 많이 만나서 새로운 얘기 듣는 것도 무척 좋아해요.

 

 

발레 이외의 다양한 장르의 작업들에 참여했던 것도 그 호기심에서 시작된 거네요. 네. 한편으로는 클래식 발레 외에도 보여줄 수 있는 작업들이 많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요. 한국은 발레 역사가 짧다보니 제가 신기하게 보일 수 있는데 외국에는 순수 발레 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여러 작업들을 하거든요. 그런 작업들을 통해 얻어지는 예술적 영감이 굉장히 커요.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많은 것들을 공부하고 경험한 것들이 제 춤에 그대로 녹아나는 것 같아요. 저는 몸의 언어를 가진 사람이잖아요.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관객들에게도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클래식 발레만 고집해서 틀에 박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요. 15년 동안 같은 레퍼토리를 얼마나 많이 공연했겠어요. 춤을 추는 저도, 그걸 보시는 관객들도 지겹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깊이 있고 새로운 것들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춤 외에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장르가 있나요? 노래요. 오페라를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 춤이 그려지거든요. 목소리로 춤을 추고 다양한 표현을 하는 게 너무 신기해요. 내 목소리로 나를 표현하는 기분이 어떨까, 나도 저렇게 노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제가 노래를 시키면 절대 빼는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자신 있게 노래를 하고 처음 네 마디는 정말 잘 부른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별로 안 좋아해서 그렇지. 제 친구는 제가 파장을 부르는 노래 실력을 갖췄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사회복지에도 관심이 많다고 들었어요. 어릴 때부터 부모님 손잡고 영아원이나 노인 분들 계신 곳에 봉사를 다녔어요.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언니와 동생도 대학에서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했고 지금까지도 봉사 활동을 많이 하고 있고요. 제가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언니의 권유로 결손가정 아이들과 성적으로 학대받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발레 수업을 하면서부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어른의 눈빛으로 스튜디오에 들어섰던 아이들이, 땀 흘리고 같이 호흡하는 동안 그들의 순수한 눈빛을 되찾아가더라고요. 발레라는 예술이 큰 무대, 멋진 공연이 아니어도 감정을 나눌 수도 있구나 깨달았어요. 금전적인 도움을 주는 건 한계가 있지만 재능 기부는 제가 노력하는 만큼 할 수 있잖아요. 전문적인 지식이 있으면 좀 더 효율적으로 잘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했고 이제 대학원 첫 학기를 시작했어요. 어렵긴 하지만 도움이 많이 되고 있어요.

 

생활의 전부가 연습과 배움의 연속이네요. 여가 생활은 어떻게 보내세요? 맛있는 거 먹고 극장에 영화 보러 잘 가요. 그렇지만 휴가는 너무 두려워요.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하루 정도 쉬고 평소 때처럼 발레단 나가서 몸 풀어요. 그러다가 언제부터는 휴가 공지가 뜨면 다른 작업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어요. <컨택트>도 <호두까기 인형>을 후배들한테 넘겨준 한 달이 아까워서 했던 거고, <댄싱 위드 더 스타> 심사위원도 여름휴가 기간이랑 맞아서 하게 된 거예요.

 

<댄싱 위드 더 스타> 출연자들의 무대를 보면 감동스러울 때가 있어요. 뒤에서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까 생각하면 말이에요. 이미 다른 장르에서 성공하신 분들이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 거잖아요. 그것도 수많은 시청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제가 여러 가지 작업에 도전을 많이 해봤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얼마나 큰 용기와 노력이 필요했을지 알아요. 용기 내어 도전한 것도 박수를 받아 마땅한데 일주일 만에 새로운 춤을 준비해 오세요. 진심으로 대단해 보이고 에너지도 많이 얻어요. 그래서 점수를 낮게 못 드리겠어요. 몸으로 땀 흘리고 감정과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는 건 참 신기하고 매력적인 일이잖아요. 그걸 지켜보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춤은 출수록 감동적이에요. 지금도 춤출 때마다 새로운 걸요. 누굴 이겨서 끝나는 일이 아니어서 좋아요. 발레는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고 자기 색깔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발레리나 김주원을 성숙시키거나 변화하게 만든 가장 큰 사건은 무엇일까요. 너무 많죠. 볼쇼이 발레학교에 들어간 일도 그렇고,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것도 그렇고, 브누아 드 라 당스 상 받은 것도 그렇고. 모든 일들이 다 계기가 되었지만 족저근막염으로 고생했을 때 가장 많이 성장하고 성숙해진 것 같아요. 발레리나와 부상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족저근막염 판정을 받았을 땐 제 언어를 빼앗긴 것 같았거든요. 대학병원 서너 군데를 다녔는데 모두가 한결같이 수술을 해도 완치가 안 된다는 얘기를, 너무나 쉽게 했어요. 물론 몸이 망가질 정도로 춤을 춘 건 제 잘못이었죠. 발가락 끝을 바늘로 찔러서 피가 철철 나는데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4년 가까이 춤을 췄으니까. 제가 가장 편하게 자신을 잘 표현해왔던 일을 못하게 된다는 얘기를 계속 듣다보니 오기가 생겼어요. 덕분에 재활 치료 선생님들을 찾아가서 발레를 가르치면서 근육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춤출 때 근육을 어떻게 쓰는지 알아야 다친 근육에 무리되지 않는 또 다른 근육들을 키울 수 있잖아요. 그렇게 1년 가까이 운동선수들처럼 훈련을 받으며 보냈어요. 그러다 11월 어느 날 토슈즈를 신었는데 발이 하나도 안 아픈 거예요. 족저근막염 판정받은 이후로 처음 울었어요. 아주 펑펑. 그리고 3개월쯤 후에 ‘브누아 드 라 당스’를 간 거예요. 꿈의 전설들이 상을 받았고, 오랫동안 우러러봤던 분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그곳에서 상을 받아서 영광이었지만, 무엇보다 제가 토슈즈를 다시 신고 서는 첫 무대였다는 게 더 감동스러웠던 것 같아요.

 

아티스트 김주원으로서의 작업이 결정된 것이 있나요? 아직 구체적으로 계획된 작품은 없지만 여러 가지를 구상하고 있어요. 국악과 접목한 작품이라든지 발레에 국한되지 않은 멀티 장르와 창조적인 작업들을 해보고 싶어요. 확실한 건 춤이 아닌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김주원은 없을 거라는 거예요. 어떤 무대에서든 새롭고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발전해가는 아티스트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지금의 목표예요.

 

지금 이 순간, 발레리나 김주원을 가장 설레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음, 7월 1일에 있을 <포이즈> 무대요. 국립발레단원으로 서는 마지막 무대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관객들을 만날 생각에 무척 설레요. 몸 컨디션도 아주 좋거든요. 그 무대에서 내려오는 순간 제 이름에 더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되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앞으로 펼쳐질 제2의 발레 인생에 대한 생각들로 설레고 즐거워요. 막연히 하고 싶었던 작품들, 협업들을 생각하면서 아이디어들을 정리하는 일도 재밌고, 새로운 시도를 통해 더 아름답고 깊이 있는 춤을 추는 제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저를 설레게 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6호 2012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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