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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광주>, 역사를 넘어서지 못하는 허구는 어떡해야 하나요? [No.206]

글 |정수연 공연 평론가 사진제공 |라이브 2020-12-08 3,301

<광주>
역사를 넘어서지 못하는 허구는 어떡해야 하나요?


 

광주, 고선웅, 뮤지컬

광주 민주화 항쟁 40주년을 기념하는 뮤지컬에 <광주>라는 제목이 붙는 것이 사실 이상한 현상은 아니다. 하지만 소재이자 주제요, 출발점이자 도착점인 이 단어가 아예 제목이라니. 만약 고선웅이라는 이름이 없었더라면 너무 분명해서 오히려 부담스러운 이런 제목의 작품에 관심이 생기진 않았을 거다. 고선웅의 이름에 쌓인 값어치를 새삼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그에게 ‘광주’는 이미 걸었던 길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는 것일 뿐. 연극 <푸르른 날에>가 광주의 시간을 에두르는 둘레길이었다면 이머시브 공연인 <나는 광주에 없었다>는 그날의 광주를 향해 달려가는 직선로였다. 
 

고선웅은 지금껏 광주를 다뤘던 여타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감각으로 광주의 시공간을 관객과 연결시켜 왔다. 특히 광주의 세월을 살아낸 사람들의 아픈 현재를 통속적인 연애담으로 풀어낸 <푸르른 날에>는 광주를 다룬 공연 중에 관객들이 제일 먼저 손에 꼽는 작품이기도 하다. 무게에 눌리지 않으면서 붙잡아야 할 주제를 놓치지 않는 어려운 작업을 그는 진즉부터 해온 셈이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이번엔 장르가 뮤지컬이라는 점이다. 연극이든 창극이든 텍스트를 비틀어 전혀 다른 맥락을 만들어내며 관객의 호흡을 쥐락펴락하는 그의 솜씨는 능청스런 여유를 잃어본 적이 없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도 해학을 불어넣고 판소리의 고전에도 SF를 집어넣는 등 연극이든 창극이든 그는 텍스트의 권위나 장르의 형식에 초조하게 붙잡히는 작가가 아니다. 
 

그런데 유독 뮤지컬에서는 이런 여유로움을 찾아보기가 어려우니 의아한 일이다. 비장하고(<남한산성>, <아리랑>) 감상적인(<베르테르>, <광화문 연가>) 그의 뮤지컬에서 예의 ‘고선웅다움’은 거의 보이지 않거나 아예 평범해져 버리니 말이다. 연극과 창극 등 고전적인 장르에서는 자유로웠던 그가 오히려 대중적인 장르인 뮤지컬에서는 자주 무거워 보이는 까닭은 뭘까. 아직까지 그에게 뮤지컬은 편안한 장르는 아닌 걸까. 뮤지컬 <광주>는 광주라는 익숙한 주제와 뮤지컬이라는 불편한 형식 사이에서 고선웅의 공력을 보여줄 또 하나의 시금석인 셈이다. 

 

의도와 실현의 엇박자

시금석의 결과는 아쉽다. <광주> 역시 무겁고 불편하니 말이다. 광주의 진실을 다시금 목도하고 되새기느라 생기는 것이었다면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으련만 이 무거움과 불편함의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의도와 실현 사이에서 생겨나는 괴리감이라고나 할까. 의도의 선명함에 비해 구현된 실제 사이의 거리가 꽤나 먼 데서 이 작품의 불편함은 시작된다.  
 

이런 면모는 서사에서부터 드러난다. 이 작품의 서사는 계엄군의 폭력과 그에 맞선 시민들의 투쟁을 따라가며 도청에서의 최후 항쟁까지 5월 광주의 시공간을 정면으로 담아낸다. 자주 봤던 익숙한 서사이지만 이 작품이 여타의 작품과 확연하게 다른 지점은 주인공이 계엄군이라는 데 있다. 실제로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하기 위해 폭력 시위를 조장하는 시민으로 위장한 계엄군 특수부대가 있었다는 최근의 증언에 기대어 이 작품은 시민의 옷을 입은 계엄군을 5월 광주의 중심에 세워놓았다. 지금까지 그해 봄날의 광주를 다루는 시선과 확연히 다른 설정이다. 
 

아쉬운 것은 이 작품의 다름이 의도와 설정의 단계에서 벌써 끝나고 만다는 점이다. 투쟁의 한가운데서 시민들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면서 어느새 계엄군 자신이 시민군의 편에 선다는, 다분히 극적인(!) 설계를 따라가느라 주인공은 평면적이고 피상적인 인물에 그쳐버리기 때문이다. 그 시공간에 있었던 사람으로서의 실체감을 얻지 못했을 때 계엄군이라는 존재는, 실제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장 작위적인 캐릭터로 축소돼 버리고 만다. 그러는 사이 광주의 이야기는 어느새 우리가 아는 사실을 다시금 반복하고 확인하는 자리로 되돌아와 버린다. 지금껏 다른 장르 다른 작품에서 봐왔던 광주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그 장면으로 말이다. 
 

정말 당혹스러운 건 음악이다. 의도와 구현의 과정에서 서사보다 더 크게 어긋나는 게 음악이니 말이다.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음악은 이 작품이 뮤지컬이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연극과 오페라를 넘나들며 다방면으로 역량을 보여줬던 작곡가 최우정의 음악이 원래 쉽거나 단순하진 않았지만 이번 작품은 훨씬 더 멀리까지 나아간 모습이다. 뮤지컬인데 뮤지컬임을 거부하는 것 같은 음악에 솔직히 의아할 뿐이다(어떤 사람들은 이 음악에 손드하임의 방식이라는 이름을 붙이던데 아, 정말 그러지는 말자!). 이 작품의 음악이 이렇듯 과격한 방식으로 장르로부터 거리 두기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평면적인 이야기에 입체성을 부여하기 위한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시대와 사람의 불화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겠고, 분산되어 있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테마가 하나의 노래로 완성되는 과정까지 회복의 서사를 구축하는 음악적 상징일 수도 있겠다. 의도를 찾자면 몇 개라도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무엇이 됐든 간에 분명한 사실은 이거다. 몰입을 요구하는 서사에 몰입을 거부하는 음악은 시작부터 어긋날 수밖에 없다는 것. 선율의 조화를 깨는 것은 음악의 자리를 가슴에서 머리로 바꾸는 일이지만, 이 작품의 이야기는 오히려 뜨겁게 광주를 담아내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음악과 이야기는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거다.

그래서일까? 음악은 자기 안에서도 다른 방향으로 자주 부딪힌다. 뮤지컬 넘버는 현대음악의 차가움을 의도하지만 편곡은 뮤지컬의 뜨거움을 지향하면서 서로 조화롭지가 않고, 불협화음의 뮤지컬 넘버가 장면마다 클라이맥스의 에너지로 구현될 때마다 음악은 더욱 어렵고 힘들어진다. 1막에서는 현대음악을 사용한 오페라 같은 분위기였다가 2막에서는 뮤지컬의 익숙한 정서를 담아내는 음악이 연이어지는 등 작품을 관통해야 할 음악적 일관성 역시 어긋나 버리더라. 이 어긋난 틈 사이로 그나마 짐작했던 음악의 의도마저 사라져버리고 만다. 남은 것은 오로지 과잉된 자의식뿐. 결국 음악은 관객을 설득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들을 무대로부터 밀어내 버리는 결과를 가져와 버렸다. 이 음악에서 가장 크게 어긋난 건 결국 관객이었던 셈이다. 

 

허구를 향해 던지는 질문

이 작품을 보면서 서사와 음악의 괴리보다 더 불편했던 것이 있다. 역사와 허구 사이의 괴리감, 공연을 보는 내내 생각이 복잡했던 건 이 때문이다. 광주의 시간은 흘러가면서도 쌓여왔다. 40년이 지났어도 온전히 밝혀지지 않은 광주의 진실 앞에 아직도 죽지 않은 학살의 주범은 한 번도 자기의 범죄를 인정한 적이 없다. 진실의 측면에서 광주의 시간은 여전히 흐르는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광주의 시간은 이미 완료된 시간이기도 하다. 40년의 시간이 쌓이면서 광주는 이미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40년 동안 ‘광주’는 우리 사회에 스며들어 역동하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한 번도 새롭지 않은 적이 없었다. 40년 전 시민들의 머리띠는 사람다움이 훼손될 위기에 처할 때마다 촛불로 포스트잇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지금의 우리에게로 이어져왔으니 말이다. 역사 속에서 ‘광주’는 큰 걸음 작은 걸음으로 쉬지 않고 갱신되어 왔다.
 

오히려 정체되어 있는 것은 무대 위의 허구이다. 이 작품 속의 광주는 1980년 5월의 ‘사건’에 머물러 있다. 역사에서 광주는 다양하게 변주되지만 허구의 광주는 여전히 과거의 사건에 붙잡혀 있는 거다. 무대 위의 광주는 언제쯤 사건을 벗어나 상징이 될 수 있을까. 역사의 행보를 앞서가지 못할 때 허구는 재미도 의미도 가질 수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다. 허구가 역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역사는 이미 일어난 사건이지만 허구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아우른다고. 그래서 개별적인 사건인 역사보다 보편적인 상상인 허구가 훨씬 진실에 가깝다고 말이다. 이런 진실이 있는지 무대 위의 허구는 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역사를 뛰어넘는 허구의 힘이 발휘되고 있는지 물어봐야 하는 거다. 레스 형한테가 아니다. 지금 여기의 모든 허구를 향해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외부 필진의 리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6호 2020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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