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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인터뷰] 장현성, 무대에 서는 즐거움 [No.104]

글 |배경희 사진 |김호근 장소협찬 | Fifty(02-544-8050) 2012-05-08 5,220

장현성은 5년 만에 재공연 되는 <노이즈 오프>에서 배우 장현성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연극 연습실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남자, 공연을 앞둔 설렘과 확신에 가득 찬 그를 만났다.

 

 

장현성의 배우학개론

드라마 <아내의 자격>을 보면서 굉장히 놀랐어요. 지적인 이미지의 장현성은 온데간데없이 속물적인 인간 한상진만 있어서요. 대국민 찌질이, 진상 중의 진상이 됐죠. 안판석 감독님이 저하고 굉장히 친한 감독인데, <아내의 자격>을 하자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현성 씨, 아주 골 때리는 캐릭터가 있는데, 나는 이 역이 어울릴 것 같은 배우가 아니라 현성 씨가 이걸 했으면 좋겠어, 꼭.” 그 순간 자연스럽게 이건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상진은 지켜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한심한 인간이지만, 진짜 무서운 게 뭐냐면, 남자들은 열에 여덟이 ‘한상진’이라는 사실이에요.

 

열 명 중 여덟 명이나요? 깜짝 놀랐죠? 다들 사회적 체면 때문에 치사스러운 본성을 억누른 채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면서 살고 있는 거예요. 한상진은 그 속물적 근성을 드러나게 하는 사건을 맞닥뜨리게 된 것 뿐이고요. “봤다, 내 마누라 바람피우는 거. 근데 난 그동안 옆에서 병신처럼 이러고 있었단 말이야? 내 체면은 어떻게 되는데? 이런 씨!” 이렇게 본성이 확 튀어나오는 거죠. 그 사건을 만나지 않은 남자들이 열에 여덟이라니까요.

 

그렇다면 장현성 씨는 그렇지 않은 두 명 중의 한 명? 물론이죠! (일동 웃음)

 

작품을 하는 동안 일상생활에서도 캐릭터에 영향을 받는 편이세요? 네, 저는 평상시에도 그 캐릭터가 좀 묻어난다고 하더라고요. 유쾌한 작품을 하고 있으면 유쾌하고, 우울한 작품을 하면 아무래도 사람이 조금 우울해져요. 그리고 주위에서 그러는데 연극 연습실에 있을 때하고 촬영장에 있을 때하고 제가 조금 다르대요.

 

연극 연습실에서는 조금 더 마음의 여유를 느끼세요? 연습실에 있을 때는 벽돌을 한 장씩 쌓아서 내가 원하는 집을 만들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요즘 며칠씩 밤을 새워 가면서 촬영하고, 촬영이 끝나면 연습하러 가야하는 생활을 하고 있지만, 연극 연습을 하면서 얻는 성취감이 제겐 너무 큰 위로가 돼요.

 

드라마는 제작 여건상 촬영이 촉박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대본을 외우기에 급급하고 며칠씩 밤샘 촬영을 하다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밤샘 촬영을 할 때 육체적인 피로가 문제가 되기보다는, 그 환경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목적이 내일 오후 다섯 시까지 편집실에 촬영 테이프를 넘겨야 한다가 되면, 그 시간이 고통스러운 거죠. 현장에 모인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 안에 이 물건을 납품해야 한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과, “우리는 지금 원하는 장면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 하는 마음으로 촬영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잖아요. 후자의 경우엔 피곤하지만 화학적 에너지가 생기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별로 피곤해 보이지 않으시네요. 재미있으니까요. 내가 어제까지 해결하지 못했던 장면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오늘은 이 장면을 탄탄하게 만들어 놓아야지 하는 설렘을 가지고 연습실로 가는 그 시간이 참 좋아요. 그 희열이 완성되는 순간이 관객들의 집중된 시선으로 긴장감이 팽팽한 공간에 제가 발을 ‘톡’ 하고 내딛을 때고요. 문학으로 치면 연극은 시에 가까워요. 한 작품을 놓고 몇 달씩 토론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서 불필요한 것들을 다 잘라내고 정제해서 만드는 거니까. 그렇게 조각해 놓은 시간을 표현해 내는데 관객들이 우리가 꿈꾸었던 그 시간 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들면, 그건 말할 수 없는 희열이죠.

 

 

배우로서 연극이라는 장르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이런 점 때문인가요? 영화든 드라마든 모두가 함께 만드는 거고, 창작의 즐거움은 다 같이 누리는 거지만, 최종적으로 영화는 감독의 예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일 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연극은 누가 뭐래도 배우의 예술이에요. 연극은 배우가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창조할 수 있는 장르죠.

 

장현성 씨가 예술가라고 꼽는 배우는 누구예요? 다니엘 데이 루이스나 케빈 스페이시? 그런 배우들을 보면 예술가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럽죠.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촬영 현장에서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해 동료 배우들하고 일절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자신을 철저히 고립시킨대요. 아무래도 영향이 있긴 하죠. 그렇다고 해서 제가 동료들하고 일부러 대화를 안 하는 편은 아니에요. 캐릭터에서 헤어나지 못해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컷 하면 바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요. 전 그 중간쯤 되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주로 안정적인 선택을 했지만, 준비가 되면 전과 다른 새로운 역을 해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장현성 씨가 감독이라면 장현성이라는 배우를 어떤 역에 캐스팅하고 싶으세요? (한참 생각하다) 나이는 사십대. 대기업은 아니고 중견기업 영업부 과장이에요. 상사에게 쪼이고, 스펙 장난 아닌 후배들에게 치이죠. 그런데 애들이 곧 대학에 들어가야 하니 다른 도리가 없어요. 최대한 버텨서 받은 퇴직금으로 동네에 치킨집이라도 하나 차리리라 하는 꿈을 가지고 살죠. 어느 날 밤 12시. 아, 집은 신도림역이에요. 집에 가려면 6번 출구로 나가야 하는데, 갑자기 3번 출구로 방향을 틀어요. 그쪽으로 가면 물품 보관함이 있거든요. 물품 보관함을 열면, 거기엔 가발, 스타킹, 뽕 브라 이런 게 담긴 쇼핑백이 있죠. 화장실로 가서 그 소품들을 가지고 변신을 한 다음 이태원 게이바에 가는 거예요. 거기서 남자들을 꼬시면서 너무너무 밝은 시간을 보내는 거죠. “오빠앙~ 어우, 너무 오랜만이다앙!” 이러면서. 그러다 택시 할증이 풀리는 새벽 4시가 되면 클럽에서 나와 집으로 가죠. 물론 신도림역에서  다시 양복으로 갈아입고요.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잠에서 깬 와이프가 “당신 왔어?” 그러면 “어, 야근이 늦었어” 하고 대꾸한 다음 애들 방에 가서 “많이 컸네, 이 자식” 머리 한 번씩 쓰다듬어 주고 나서 샤워하고 자는 아빠.

 

 

2년 만에 다시 서게 된 무대 <노이즈 오프>

<노이즈 오프>는 어떻게 참여하게 되신 거예요? 프로듀서가 하자고 해서요. (웃음) 저는 연극도 재미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깔깔거리는 코미디여야 한다는 게 아니라, 또 예술 이야기인데,(웃음) 제가 생각하는 예술이라는 건 상념을 잘 정리해서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는 거예요. 안 그래도 어려워서 손에 잡히지 않은 관념을 더 어렵게 만들어 놓고, “이게 예술인데 왜 이해를 못해?”라고 말하는 건 거만한 거죠. 삶의 모습을 쉽게 시각화해서 ‘그래, 저런 거였지!’ 하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걸 좋아하는데, 그런 점에서 <노이즈 오프> 대본은 너무너무 똑똑해요. 깜짝 놀랄 만큼 수학적으로 똘똘한 대본이에요.

 

<노이즈 오프>는 백스테이지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 배우로서 재미가 있겠어요. 극 속에서 가장 공감한 이야기는 뭐예요? 이 연극을 연습하면서도 대본 안에 있는 상황들이 벌어져요. “연출, 알다시피 나는 동기가 없으면 움직이질 못해서. 내가 여기서 이걸 왜 해야 하지? 안 하는 게 맞지 않아?”, “그냥 하시자구요, 선배님”, “그래, 알겠는데, 나는 연극을 공부하면서 동기가 중요하다고 배웠고, 그게 몸에 배어 있어서.”, “선배님, 내일이 공연이거든요? 일단 하시자구요!”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 있거든요. 이런 일은 실제로도 많이 벌어지죠. 작품이 쓰인지도 오래됐고, 여러 도시에서 공연이 됐는데도 공감할 수 있는 걸 보면 연극하는 사람들은 시공간을 떠나서 비슷한가 봐요.

 

배우가 연출을 맡은 작품에 참여하는 건 어떠세요? 연출이 넌버벌 퍼포먼스를 많이 한 연출가인데, <노이즈 오프> 하고 어떤 지점이 맞아서 연출을 하는 거지, 하는 의문이 있었죠. 역시나 연출이 신체를 효과적으로 움직이는 재능이 굉장히 뛰어나요. 그런데 그게 본인의 장점이라고 해서 작품을 그런 쪽으로 만들려고 하면 틀림없이 부작용이 생기거든요. 사람은 누구나 칭찬받는 걸 계속 보여주고 싶은 유혹을 느끼잖아요. 특히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더 그렇죠. 그런데 이 친구는 진행 방식이 유연해요. 그래서 좋죠.

 

말씀대로 배우는 튀어 보이고 싶은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돋보이고자 하는 욕구를 억누르고 조화를 이뤄야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죠. 글쎄요. 좋은 배우가 된다는 게 뭔지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그게 좀 애매한 거잖아요? 누가 정해주면 좋을 텐데. (한참 생각하다) 김석만 선생님이 배우란 상처받기 쉬운 영혼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가 참 마음에 와 닿아요. 한국 사회의 남자들은 ‘사나이는 울면 안 된다’는 식의 교육을 받으면서 크잖아요. 마음에 견고한 갑옷을 덧입혀 나가는 것이 좋은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길이라고 교육을 받죠. 그런데 배우는 감정 노동을 하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남들이 보기엔 사소한 일이라도, 배우는 말 한마디에도 큰 상처를 받을 줄 알아야 해요. 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죠.

 

감정적으로 쉽게 자극을 받을 수 있도록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배우는 하다못해 동화책을 한 권 읽더라도 배우로서 뭔가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혹시 그 전에 <노이즈 오프>를 보신 적이 있으세요? 초연 때 봤어요. 그때 공연을 보면서 ‘연출가, 저거 언젠가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콕 집어 연출가 역할이 하고 싶었던 이유는 뭐예요? 제가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하하. 어떤 공연을 볼 때 제가 매혹되는 장면들이 있어요. 나라면 이렇게 표현해 보고 싶다, 그런 마음이 생길 때가 있죠.

 

 

‘연출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나요? 저는 연극을 학전에서 배웠으니까 김민기 선생님이 떠오르죠. 선생님은 한 사람의 예술가로도, 한 명의 인간으로도,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완성에 가까운 사람이었어요. 내가 뭘 물어봐도 이 사람은 다 알 것 같은 느낌 있잖아요. 그런데 얼마 전에 생각해 보니까 그때의 선생님이 지금의 저보다 어리셨더라고요. 그런 선생님을 우리는 세계적 거장 대하듯 졸졸 따라다녔으니까 사실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어요. 본인의 인생에도 틀림없이 불안함이나 쓸쓸함이 있었을 텐데, 그 부담감이 얼마나 컸을까 싶더라고요.

 

예전에 김민기 선생님이 남자 배우로서 가장 좋은 나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서른셋이라고 답하셨다면서요. (웃음) 지금 생각에는 50살 정도가…, 하하. 선생님도 얼마 전에 그 이야기를 하셨어요. “현성이, 너 옛날에 나한테 배우는 서른셋이라 그랬다. 너 지금 몇 살이냐?” 어느새 마흔셋이 돼버렸죠. (웃음) 그때가 제가 이십대 중반쯤이었을 테니, 서른셋이라는 나이가 저한테 안 올 줄 알았죠. 내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나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어느 시기가 전성기일지는 몰라도, 지금만큼 쓰임새가 있는 배우일 수 있어서 자다가 깨서 감사할 만큼 다행이에요.

 

배우 생활을 하는 데 경제적인 여유를 무시할 수 없죠. 사실 배우로 먹고 산다는 게 힘든 일이거든요. 편당 개런티가 몇 억씩 되는 영향력 있는 배우들보다 연기 더 잘하고, 더 잘생기고 예쁜 배우들, 수두룩해요. 근데 뭔가 잘 안 맞아서 지금도 전기세를 걱정해야 하는 배우들이 많다고요. 저도 아침을 먹으면서 ‘점심을 어떻게 먹지?’ 하는 걱정으로 보낸 시간이 3~4년쯤 돼요. 그래도 좋은 작품을 만들어 보리라는 그 꿍꿍이 때문에 그 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작품을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하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작품도 인연이라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제가 1년 전에 이 대본을 받았거든요. 홍기유라고 친한 프로듀서가 방실방실 웃으면서 “내년 6월에 같이 공연하지 않을래?”라고 말하는데, “글쎄,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이런 얘기가 안 나오더라고요. 더욱이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잖아요. 공연 기간이 가까워 올수록 드라마나 영화 제의가 들어와서 어쩌나 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딱 몇 마디 하더라고요. “야, 이 작품 좋잖아. 너 이 작품에 맞잖아. 너 연극한 지 2년 됐잖아. 그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에요. 작품 좋고, 멤버들도 좋고, 좋은 환경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가 원한다고 해서 언제나 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다른 대본들을 정리했죠.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고 하셨는데, 이번 무대에서는 장현성의 어떤 매력을 볼 수 있을까요? 저의 모든 것! <노이즈 오프>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안 보면 손해예요. 관객 여러분께  ‘그래, 어쩌면 인생은 그런 걸지도 몰라’ 하는 생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할 자신이 있다니까요. 이런 확신을 가지고 연습하는 건 처음이에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4호 2012년 5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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