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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ULTURE INTERVIEW] <아마데우스> 차지연, 그가 만들어가는 길 [No.206]

글 |배경희 사진 |김호근 2020-12-02 6,533

<아마데우스> 차지연
그가 만들어가는 길



<광화문연가>의 월하를 시작으로 <더데빌>의 X블랙,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까지. 국내 공연계에 젠더 프리 캐스팅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차지연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여배우’라는 좁은 세상의 성벽을 허물고 있다. 새로운 작품을 선택할 때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역할을 상상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데뷔 15년 차의 배우. 그는 처음으로 남성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아마데우스>가 기대된다고 했는데, 그가 보여줄 살리에리를 기대하지 않을 관객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운명처럼 따라온 만남 
                      
<아마데우스> 캐스팅이 공개되던 날,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에 올랐던 거 아세요? 다들 ‘차지연 살리에리’가 무지 기대된대요.
저 방금 살짝 긴장했어요. 제가 SNS를 안 해서 반응이 어떤지 모르는데, 이 이야기는 처음 듣거든요. 그런데 기대하는 쪽이라니, 아, 다행이다. (웃음) 그동안 소위 말하는 ‘젠더 프리 캐스팅’이라는 명목 하에 맡았던 역할들은 판타지적인 캐릭터였기 때문에 제 자신이 도전해 볼만 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실존인물이잖아요.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던 남성을 내가 연기해도 될까 처음엔 내심 걱정했죠.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정중히 고사했는데, 수개월 고민하다 막바지에 극적으로 결정했어요. (이)지나 연출님이 그러셨거든요. 나는 너를 언제나 믿어왔고, 너도 나를 믿지 않느냐고, 같이 서로를 믿고 해보자고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남자 배우들하고 팽팽히 맞서 힘겨루기를 해본다는 게 재미있겠다 싶더라고요. 결국 이렇게 운명적으로 만날 작품이었나 봐요.  

살리에리 역에 캐스팅된 다른 배우들은 전부 남자라 출연을 주저하게 됐을 것 같아요. 게다가 모차르트는 기존처럼 남자 배우들이 맡잖아요. 생각해 보면 이지나 연출가는 지연 씨한테 항상 무거운 짐을 지워주시네요. (웃음)
선생님께서는 언젠가부터 저를 ‘여배우’가 아닌 ‘배우’로 바라보세요. 저의 성별을 떠나 공연예술을 하는 한 명의 배우로서 제 역할을 생각해주시죠. 배우가 무대에서 에너지를 겉으로 발산하느냐, 안으로 삼켜 표현하느냐에 따라 관객이 느끼는 배우의 몸집 크기가 달라지는데, 선생님은 제가 그 방향을 구분해 표현할 줄 안다고 믿어주세요. 제가 타고난 체격 자체가 크기도 하고요. 남자들하고 나란히 서 있어도 밀리질 않는 이 체격! 하하. 다행인 건, 저도 이런 시도들이 참 재미있어요. 선생님께서 “지연아, 이번엔 빨간색이야, 네 마음대로 빨간색을 만들어봐” 하는 식으로 멍석을 깔아주시니까 이것저것 해볼 수 있어서 신나죠.  

이지나 연출가가 지연 씨한테 처음 젠더 프리 배역을 맡긴 건 2017년 <광화문연가>였잖아요. 지금처럼 젠더 프리 캐스팅 시도가 흔치 않을 때였는데,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어땠나요.
그때 제 첫 반응은 이거였어요. ‘네? (정적)’ 하하. 한 역할에 남녀 배우가 캐스팅되는 건 당시로서는 정말 획기적인 일이었으니까요. 저한테 월하라는 배역이 더 어렵게 느껴졌던 이유는 이전에는 관객들하고 호흡해야 하는 밝은 캐릭터를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게다가 더블 캐스팅됐던 배우가 우리나라 희극 연기 1인자인 정성화 선배님이었잖아요. 성화 오빠는 무대에서 고개를 까닥해 보이는 걸로 객석을 빵빵 터지게 할 수 있는 배우인데, 저는 관객들을 심각한 얼굴로 만드는 역할만 했던 터라 그 부담감이 엄청 났어요. 그런데 어느 시점에 ‘그래, 이런 부분은 내가 좀 부족하지, 대신 할 수 있는 걸 더 적극적으로 하자’ 마음먹었더니 그게 저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더라고요. 가족들도 제가 맨날 ‘으어어’ 하고 죽는 역할을 하다 밝게 ‘으샤으샤’ 하는 역할을 하니까 너무 좋았대요. (웃음) 월하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다시 해보고 싶어요. 

이번엔 살리에리를 연기하는 첫 여성 배우라는 점에서 그에 대한 부담감을 어느 정도 느낄 테죠? 딱히 성별을 의식해 연기할 것 같지 않은데, 공연을 한 달 앞둔 지금 시점에서 고민하는 부분은 뭔가요.
극 중 살리에리와 콘스탄체 사이에 성적 긴장감이 흐를 때가 있어요. 원작대로라면 살리에리는 남성으로서, 콘스탄체는 여성으로서 서로에게 매력을 느껴야 하죠. 아직은 연습 단계라 단언하듯 말하긴 조심스럽지만, 제 캐릭터가 남성임을 의식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 감정을 동성 간의 끌림으로 표현하진 않으려고요. 연습실에서 그 장면을 연습할 때 제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사실 아주 단순해요. 살리에리가 아름다운 여성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렇게만 생각하죠. 그런데 고맙게도 콘스탄체 역을 맡는 (이)봄소리 씨나 (홍)서영 씨가 거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반응해주더라고요. 요즘 제 연습실 별명이 뭐냐면 ‘여자 오빠’예요. 하하. 생각보다 크게 무리없이 저만의 캐릭터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공연의 큰 틀 자체가 달라지진 않을 거예요. 관객분들은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일지 기대돼요.

<아마데우스>는 천재성과 질투심을 다룬다는 면에서 예술하는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하잖아요. 이번 공연 대본을 접했을 때 어떤 마음이 먼저 들었나요.
주위를 보면 신에게 선택받은 것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신이 특별한 축복을 내려준 것 같다는 말로 밖에 표현이 안 되는 사람들이요. 지금까지 공연하면서 동료 배우들에게 그런 질투를 느낀 적이 왜 없겠어요. 특히 어렸을 때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면 쉽게 떨쳐내기가 힘들었어요. 저 배우는 신께서 허락한 재능으로 쓱쓱 공연하는데도 잘되고, 나는 공연 끝나면 FM대로 집에 가서 아무 것도 안 하고 대본만 읽는데 왜 이럴까. 저 사람한테 있는 재능이 나에게는 왜 없을까 많이 좌절했죠. 물론 그런 감정이 때때로 자극제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저는 대체로 신이 어떤 이유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좌절했어요. ‘난, 왜!’ 이러면서. (웃음) 
그런데 꼭 배우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자기가 갖지 못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잖아요? 저희 대본 곳곳에 그 마음이 어떤 감정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대사들이 정말 많아요.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하고 그의 라이벌인 살리에리가 주인공이지만, 두 사람의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내 자신의 이야기처럼 깊게 공감할 수 있죠.




한계를 직시하고 나아가기 

과거 인터뷰를 읽어보면 유독 자신감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요. 남들이 보면 자신감이 차고 넘쳐도 이상할 게 없는 배우인데, 정작 지연 씨는 항상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여겼나 봐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가 하는 말 중에 이런 명대사가 있어요. “왜 신은 내게 열정만 주고 재능은 주지 않은 것인가.” 얼마 전 연습실에서 그 대사 장면을 연습할 때, 지나 연출님께서 웃으면서 농담으로 그러셨어요. “지연아, 신은 너에게 열정도 주고 재능도 주셨어. 자신감을 안 주셨을 뿐이야.” 솔직히 말하면 예전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신감이 부족했어요. 작품을 할 때마다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항상 조급해하고 두려워했거든요. 그게 제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주는지 모르고요. 그런데 올해 <잃어버린 얼굴 1895>를 다시 하면서 내가 무대에 정확하게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공연하는 동안 제가 걸어가는 자리에 뿌리가 하나씩 내려지는 것 같은 기분, 무대에서 그런 안정적인 느낌은 처음이었어요.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니 예전의 저는 단점은 물론 장점도 인정하지 않았더라고요. 그러니 자신감이 부족할 수밖에요. 이제는 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조금 생겼어요. 제 삶에는 아주 큰 변화예요.

지연 씨의 공연을 보면 무대에서 모든 걸 쏟아낸다는 느낌을 받는데, 어쩌면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많은 에너지를 썼던 걸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그런 절박함이 있었어요. 관객들이 부족한 저를 보러 와주셨으니 부족함이 드러나지 않도록 내가 가진 모든 걸 끌어내서 공연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관객들이 객석에 앉기까지의 과정을 떠올려 보면 그 기대에 어긋나고 싶지 않아요. 예매 사이트에 들어가서 티켓을 사고, 공연 날짜를 기다렸다 극장에 오고, 한 편의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큰 비용에 적지 않은 수고를 들여야 하잖아요. 관객분들의 귀한 정성에 맞는 공연으로 보답하자는 게 저의 철칙이에요. 간혹 스태프분들이 저보고 그렇게 모든 걸 토해내듯 노래하면 2~3년 안에 목을 못 쓰게 될 것 같다고 그러세요. 그런데 저는 설령 2~3년 후에 노래를 못하게 된다고 해도 감정을 적당히 쓰면서 요령껏 노래하고 싶진 않아요. 치열한 노력이 켜켜이 쌓여야 단단한 티켓 파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단 몇 명이라 할지라도 늘 흔들림 없이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티켓 파워요.

지금까지 한 많은 작품 가운데 어떤 걸 다시 해보고 싶어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요. 보통 부드럽고 차분한 캐릭터에 저라는 배우를 쉽게 안 떠올리잖아요? 저는 그 작품을 할 때 되게 행복했어요. 제 안의 유리막처럼 약한 부분을 드러낼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소위 말하는 생활연기를 할 수 있는 점도 좋았고요. ‘안녕하세요’라는 일상적인 말 한마디에 설렘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을 전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던지. 그 전에는 주로 불을 뿜을 것 같은 연기만 했는데! 하하. 상대역이었던 (박)은태하고 데뷔작을 같이해서 오래 알고 지냈는데, 제가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걱정했대요. 이 자식을 어떻게 안아야 하나 싶어서요. 저희는 서로 육두문자를 날리는 사이거든요. (웃음)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나서 그러더라고요. 네가 모든 배우들을 통틀어 가장 여린 성격인데,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것 같다고요. 제가 진짜 그런가? 하여간 배우는 참 재미있는 직업인 것 같아요. 작품을 통해 자꾸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니까요.

주위에서 차지연이라는 배우를 강하고 센 사람으로만 봤다면, 거기엔 약해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지연 씨의 태도가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게 있다면, 이십 대에 흔히 말하는 꽃다운 청춘을 마음껏 못 즐겼던 거예요. 어떻게 보면 인생에서 제일 아름다운 시기인데, 그때 나를 위해 뭔가를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죠. 그 시절의 저에게는 여행이라는 단어가 사치처럼 느껴질 정도로 저를 위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거든요. 먼 곳까진 바라지도 않고 가까운 바다나 산에 가서 혼자 사색하는 시간을 갖고 스스로를 돌아봤다면, 무섭더라도 제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용기를 좀 더 빨리 내지 않았을까요. 그럼 이렇게 긴 시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힘들게 공연하진 않았을 텐데, 그게 참 서글프더라고요. 그런데 한 편으론 제가 여유 없는 이십 대를 보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무대에서 설 수 있는 것 같기도 해요. 모든 사람은 다 각자 자신에게 맞는 삶이 있나 봐요. 

이제야 비로소 조금의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잖아요. 지금은 배우로서 어떤 꿈을 꿔요?
저는 한 작품을 마칠 때마다 제 삶의 한 조각을 떼어놓고 오는 기분이에요. 제가 참여한 작품이 오랜 생명력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 매 공연 혼을 갈아 넣거든요. 그 작품이 재공연될 때 제가 다시 참여하지 못한다고 해도, 저라는 배우의 향기가 느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저는 관객분들의 머리가 아닌 가슴속에 남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배우 인생에서 그보다 더 값진 재산이 있을까요? 배우는 그럴 때 살아있음을 느끼니까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6호 2020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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