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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ECIAL INTERVIEW] <닥터 지바고> 연출가 데스 맥아너프 [No.102]

글 |김영주 사진 |김호근 2012-03-12 4,819

끝없이 오직 시작만 있는 세계의 승자

 

거대한 대륙을 배경으로 장대한 역사와 개인의 삶이 함께 펼쳐지는 이야기를 무대로 옮기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브로드웨이에서 이미 두 번의 토니상 연출상과 대본상을 받았고, 자신의 연출작으로 최우수 작품상까지 거머쥐었으며 장장 5년간 매진 사례를 기록한 흥행작까지 가지고 있는 연출가 데스 맥아너프에게도 그렇다. 위엄 있는 목소리와 날카로운 통찰력, 그리고 쿨한 태도를 가진 이 캐나다인은 추위를 몹시도 싫어하고 사진 촬영에서 각도까지 지정할 만큼 꼼꼼했으며 4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자신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신작 <닥터 지바고>에 대해 가능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제 프리뷰 공연을 봤습니다. 어떻던가요? 2막이 더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공연을 봤는데 듣던 대로던데요. 좋군요. 2막이 더 좋은 게 낫지 않나요? 1막이 더 재미있다면 뒤로 갈수록 지루해질 테니까.


다른 배우들이 하는 공연을 보면 어떨까 궁금하던데요. 캐스트에 따라서 달라지는 게 많은 공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전에도 이번처럼 동일한 비중의 더블 캐스트로 공연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배우에 따라서 그렇게까지 많이 다를 것 같지는 않네요. 그리고 더블 캐스트로 공연을 해본 적은 물론 있죠. 난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에 많은 것을 경험했어요. 원 캐스트와 한 배역에 여러 명의 배우가 있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저지 보이스> 같은 경우는 주역의 역할이 굉장히 커서 한 배우가 일주일에 여덟 번을 하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여섯 명의 캐스트가 있었습니다. 사실 연출가의 입장에서는 배우가 한 명인 게 일의 양이 적어지기는 하죠.


그 많은 경험 중에 러시아와 얽힌 일도 있었나요? 러시아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소비에트 시절 러시아에서 몇 개의 프로덕션과 작업을 했죠. 러시아 측의 초대를 받아서 방문을 한 거였고, 러시아 군사령부와 미국 군사령부의 두 사람이 제네바에서 벌이는 일을 다룬 연극이었습니다. 당시 내 나이가 서른세 살 정도였는데 러시아에서는 그 나이의 예술감독을 찾아보기 힘들어서 다들 놀라워했죠. 그때 많은 러시아 친구를 만들었고 약 반년이 지난 후에 그들이 우르르 미국으로 와서 내 공연을 보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건 그들이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러시아 밖으로 나온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는 거였죠. 벌써 15년 전 일이군요.


제 주변인들이 말하기를, 러시아 친구들은 하나같이 흥미롭고 특이하다고 하던데요. 한국인들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조용하고 내면을 성찰하는 면이 있죠. 술을 마시기 전까지는 말입니다.(웃음) 밖에서만 본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는 한국 사람들이 연기를 할 때 그 스타일을 보면서 어느 정도 러시아인들의 영혼과 닮아있지 않은가라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러시아는 정말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추워요. 캐나다에서 자랐고 그 나라도 추운데, 러시아는 차원이 달라요.


크고, 춥다는 게 러시아에 대해 한국인들이 가진 가장 강한 인상이에요. 많은 한국인들은 옛날부터 <닥터 지바고>라는 작품을 좋아했는데, 좁은 반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러시아의 그 광활함이 강렬한 매력으로 다가왔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면이 있을 것 같네요.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내전이 있었잖아요. 물론 미국에도 남북전쟁이 있었지만 가장 최근에 일어난 내전은 역시 한국전이니 러시아에서 일어난 내전에 대해서도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 체제의 그늘에 대해 더 잘 안다는 점도 한국 관객들이 이 작품에서 이해하기 쉬운 요소일 거라고 봤습니다.

 


그 장대한 역사를 무대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요. 특별히 공을 들인 장면이 있습니까? <닥터 지바고>는 굉장히 큰 작품이지만 결국 다섯 명의 이야기를 쭉 따라가고 있습니다. 광활한 땅덩어리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이야기를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가는 겁니다. 마치 서로의 운명이 서로가 마주치는 것이 당연하도록 짜여 있는 것처럼 드라마틱한 면이 강한 작품입니다. 그 다섯 명의 인물이 한 공간 안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을 반복하며 그들의 관계가 흘러가면서도 끊임없이 연결이 되는 면을 부각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작가와 디자이너들에게 그로메코 집안의 연회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들의 관계가 친밀하게 이어질 수 있도록 강조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은 러시아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지만 그 중심이 되는 사람들의 연결성도 살리고 싶었습니다.


‘왜 지금 <닥터 지바고>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역경 속에서도 버텨내는 사랑 이야기는 유니버설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작품에는 사랑을 예술의 측면으로 끌어올리는 한 단계가 있는데 유리가 라라가 떠난 후 열흘 동안 시를 통해서 그녀를 붙잡는 것이죠. 이것은 원작자인 보리스가 시를 통해서 사랑을 불멸로 만든 것이기도 하죠. 주인공들이 역경에 처하거나 힘든 상황에 붙들린 것을 보면서 관객들이 단지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거라고 믿고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의 사랑이 맺어졌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은 단순히 맺어진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남기죠. 오늘날의 관객들도 그렇게 중요한 것을 가슴에 담고 가지 않을까요.


<레 미제라블> 이후 이 정도로 스케일이 큰 이야기가 뮤지컬로 만들어진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작품의 스케일이 아무리 거대하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다섯 명의 관계와 그들 사이의 친밀함, 그리고 그들의 내면이 관객들에게 와 닿을 수 있느냐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레 미제라블>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레 미제라블>은 <닥터 지바고>보다는 좀 더 작은 규모의 이야기 같기도 하네요. 러시아의 광활한 대륙을 따라 세계대전과 혁명, 내전의 현장으로 이동하는 것은 다섯 명의 캐릭터를 튼튼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만들면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지에 대해 고민을 정말 많이 해야 했죠. 예를 들어 1막의 마지막은 유리 일가가 유리아틴으로 가기로 결정을 하는 것이고 2막의 시작은 그들이 유리아틴에 도착을 한 것인데, 소설로 치자면 그 사이에 700페이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웃음) 거대한 서사를 가진 이 소설은 오페라적인 강한 울림을 표현하기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완성된 음악이 그런 표현을 하기에 적합한 스케일을 가지고 있었죠. 그리고 주인공들의 감정을 클로즈업 같은 기법을 통해서 하나하나 짚어가야 하는 영화와 달리 뮤지컬은 필요한 부분을 확 잡아당겨서 강하게 부각시키는 것이 어색하지 않으니까 그런 점에서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보통 영화에 비해 뮤지컬이 불리한 점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오히려 장점이라고 말씀하시는군요. 일단 무대와 스크린은 다른 매체잖아요. 어떻게 보느냐 하는 철학적인 관점으로 그 문제를 생각해보자면, 보통 사람들은 영화 속의 기차를 보면서 현실의 단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을 하죠. 하지만 아무리 가깝고 현실처럼 보인다고 해도 스크린에 비치는 건 빛을 이용한 눈속임, 현실의 반영으로 만든 환상일 뿐이죠. 그런데 우리가 무대에서 관객의 눈앞에서 보여주는 것은 진짜 피와 살로 이루어진 형태가 있습니다. <닥터 지바고>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간의 끝에 서서 계속 나아가고 있다.’ 공연 예술이라는 것은 정말로 시간의 끝자락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스크린을 통해 눈앞에 있는 기차를 보는 것도 강렬한 경험이겠지만 뮤지컬 관객들은 연출가인 내가 제시한 철제 덩어리 같은 것을 가지고도 상상력을 통해서 빈 곳을 채워서 ‘기차’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작품을 이해하는 데 관객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경험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장르마다 차이가 있지만 뮤지컬이 부족하거나 못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공연을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등장하는 높이 쌓인 의자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떻게 만들어진 장면인지 궁금했습니다. 이 작품을 보는 사람이 그 장면을 무심히 넘기지 않고 관심을 가져준다는 걸 알게 돼서 기쁩니다. 나는 그 의자들이 사람의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공연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를 대변하고 작품의 전체를 상징하는 물체가 있다면 의자인데, 예를 들어 공산주의자들이나 무정부주의자들이 의자를 부수고 불태우는 장면으로 사람들에 대한 공격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 공연에서 제일 좋아하는, 늙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아내의 옷을 의자에 걸쳐놓고, 또 가족이 정든 집을 떠날 때 어린 손자가 그 의자를 끌어안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장면도 그 연장선에 있지요. 그로메코 가의 연회장을 다섯 명의 인물들이 계속 엮이는 상징적인 장소로 사용한 것처럼 의자 역시 이렇게 꾸준히 작품 속에서 활용했습니다. 사실 볼세비키 혁명이 끝나는 1막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지금의 몇 배로 많은 의자들을 공중에서 떨어뜨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처리를 했는데, 언젠가 미래에는 그렇게 연출하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 드리자면 1막의 세계대전 신에서 의자를 바리케이드처럼 놓고 그 뒤에 사람들이 서 있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지금까지는 정교하게 만든 영상물을 배경으로 사용했다가 이번 주부터 삭제를 했습니다. 그냥 의자만 있는 것만으로도 단순하지만 강렬한 힘이 있었는데 그 신 자체의 힘을 믿지 못하고 군더더기를 덧붙였다고 판단을 했지요.

 


의자를 사용한 장면들이 다 좋았지만, 특히 처음과 끝에서 보여준 서로 엇갈려서 높게 쌓여 있는 의자들은 「신곡」을 주제로 한 그림에 나오는 연옥의 뒤엉킨 영혼들을 연상시키는 것 같습니다. 좋군요. 사실 그 장면에 대해서는 무대디자이너인 마이클 스캇 미첼에게 공을 돌리고 싶습니다. 호주 초연 당시 수석 디자이너였던 그가 의자 신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그는 호주에, 그리고 나는 캐나다에 있으면서 두세 시간 만에 <닥터 지바고>의 전체적인 디자인 구상을 했습니다. 그 대화에서 의자를 쌓는 것과 다섯 인물의 인연이 교차하는 연회장을 고정적으로 사용하자는 두 가지 핵심적인 컨셉이 나왔습니다. 의자를 마구 쌓아서 설치예술처럼 보여주는 것과 함께 또 하나 중요한 포인트는 의자가 충분히 중립적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루이 14세가 썼을 법한 그런 의자라면 캐릭터가 부여되었을 테니까 이 작품에서처럼 쓸 수 없었을 겁니다. 중립성을 가진 딱 적절한 의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저지 보이스>나 <토미>가 음악을 보여주기 위해서 스토리가 필요했다면, <닥터 지바고>는 관객들에게 스토리를 보여주기 위해 음악이 봉사하는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세 작품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 <토미> 같은 경우는 성스루 형식이고 대사도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시각적인 스토리텔링이 강해야 했습니다. 그 작품에는 주제적으로 진행되는 음악이 있고 나는 그 음악을 실제적인 광경으로 풀어서 만드는 작업을 했어야 했습니다. 반면 <저지 보이스>의 경우에는 일단 밴드의 연대기를 다룬 이야기였으니 음악적인 면이 강할 수밖에 없었죠. 만약에 주인공들이 물리학자였다면 전혀 다른 스타일의 작품이 나왔겠지만, <저지 보이스>는 로큰롤 밴드가 곡을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으면서 유명해지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먼저 곡이 있고, 그 노래에 맞는 신이 부여되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Stay’나 ‘Let’s Hang On’ 같은 곡은 실제로는 프랭키 밸리와 밥 고디오가 포시즌스라는 그룹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른 노래인데 그 주제만을 가지고 극에 맞는 다른 이야기를 엮어나간 것이지요.


그에 비해 <닥터 지바고>는 너무 크고 분명한 스토리가 있죠. <닥터 지바고>는 좀 더 전통적인 옛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그렇지만 무대를 꾸미는 예술적인 기술이나 드라마트루기의 기술은 현대적인 기법을 많이 사용했죠. 작품의 문을 여는 첫 곡과 두 번째 곡을 보면, 주요 인물들이 살아가는 두 개의 세계, 그리고 15년간의 러시아 역사가 그 두 곡에 있습니다. 또 ‘그녀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있죠. 작품의 첫 곡에서 유리, 라라, 토냐, 코마로프스키, 파샤 다섯 명은 모두 만나게 됩니다. 부모의 죽음과 이별, 새로운 가족과의 만남, 라라의 어머니가 하는 드레스 숍과 코마로프스키와의 인연이 휘리릭 지나가죠. <남태평양>과 같은 뮤지컬에서는 볼 수 없는 기법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누구인가?(Who Is She?)’라는 두 번째 노래로 넘어가는데 소설을 기준으로 하면 이 곡에서는 거의 스물다섯 군데의 장소가 스쳐 지나갑니다. 이야기나 노래 자체는 굉장히 고전적이지만 표현하는 방식은 큰 붓질을 먼저 한 후에 작고 빠른 붓질로 보충하는 현대적인 스타일을 사용했지요. 


일반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습니다. 제작 과정에서 즐거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다른 어떤 멤버들로도 이 만큼 야심이 큰 작품을 끌어내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마이클 웰러, 루시 사이먼, 마이클 스캇 미첼 정도로 재능 있고 열정적인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 작품을 이 정도 수준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난 이제 늙었지만 이만큼 젊은 컴퍼니와 젊은 배우들, 그리고 젊은 관객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굉장히 행복했습니다. 마치 굉장히 신선한 러브 스토리 같았습니다. 내게 희망을 줬어요.(웃음)


이 작품에 앞으로 더 수정할 부분들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계속 다듬기는 하겠지만 극단적으로 바뀔 부분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표현을 하나 알려드리죠. ‘뮤지컬에는 시작(Open)은 있지만 완성(Finish)은 없다’ 우리는 항상 작품을 다듬어야 하니까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2호 2012년 3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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