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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CULTURE REVIEW] <그라운디드>​, 모래에 발을 묻고 하늘에 머리를 담그고 [No.201]

글 |이수진 공연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우란문화재단, 프로젝트그룹 일다 2020-06-05 3,333

<그라운디드>
모래에 발을 묻고 하늘에 머리를 담그고 




한 인간을 통해 전하는 전쟁의 비극
                      
연극 <그라운디드>는 여성 한 명이 등장하는 모놀로그이기에 배우인 차지연은 아틀라스처럼 극을 어깨에 이고 프로메테우스처럼 꺼지지 않는 불을 향해 나아가지만 시시포스처럼 끊임없이 발목을 잡힌다. 차지연은 이름조차 없는 한 인물에게 ‘인간’ 전체의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 조지 브란트는 전쟁의 비극이라는 담론을 한 인간의 사례를 통해 집요하게 파고들면서도 이 사람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음으로써 대표성을 의도한다. 주인공인 전투 조종사는 극단적인 감시 아래서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 인물이 여성으로 정의될 때, 게다가 그 직업이 전투기 F-16기를 모는 미군 전투 비행사일 때, 그 양상은 더욱 입체적으로 변한다. 

작품은 회상으로 시작한다. 무대에는 비행복을 입은 여성 전투 조종사인 소령이 나타나 비행에 대한 자신의 무한한 애정을 밝힌다. 우주 비행의 하늘이 무색의 영원이라면 자신의 하늘은 ‘블루’다. 최초의 장면만 봐서는 이 인물의 성별을 가늠하기 어렵다. ‘남성스러움’을 표현할 때 흔히 사용되는 거들먹거림과 지나칠 만큼 충만한 자기애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에릭이라는 남자와 뜨거운 밤을 보낸 결과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여성임이 드러난다. 배 속의 아이와 함께한 그의 마지막 비행에서 그는 조종간으로부터 사출되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아기와 그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사출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고,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던 ‘블루’를 포기하고 아이를 선택한다. 그렇게 태어난 딸인 샘은 자신을 위해 어머니가 무엇을 희생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모든 면에서 그와 완전히 다르게 핑크와 조랑말을 사랑하는 아이로 자란다. 더 큰 세계, 즉 블루를 보라고 강요하지만 아이는 관심이 없다. 소령이 ‘블루’를 위해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문득 보이는 순간이다. 아이가 아니었다면 알 수 없었을 ‘일상’이 그의 인생이 된다. 남편이 있고 아이가 있고 그들을 돌보는 일과를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전투기 타이거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의 상관은 그가 임신했을 때만큼이나 복귀 소식을 반가워하는데, 드론 조종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동의 사막이 아니라 네바다의 사막에서, 전투기가 아닌 드론을 조이스틱으로 몰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한 번 무너진다. 창문 하나 없는 네바다의 공군 기지 조종실로 가기 위해 그는 전 세계의 명물들을 축소해 놓은 진짜 가짜의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지나가야 한다. 회색의 방에서 회색의 모니터를 통해 하늘이 아닌 땅바닥을 새처럼 내려다보며 적을 죽이는 역할을 떠맡은 그는 점점 정신을 놓아가고 마침내는 자신의 딸인 샘마저 회색으로 보이는 상태에 이른다. 남편 에릭은 그를 돌려놓기 위해 상담을 받거나 딸이 부르는 노래가 담긴 CD를 선물하지만 이는 오히려 소령을 더욱 깊은 심연으로 이끄는 기폭제가 된다. 결국 적군의 넘버 투를 사살하려는 순간 화면 속에서 튀어나온 아이를 자신의 딸 샘이라고 완전히 믿게 된 그는 드론의 방향을 돌려 처음으로 ‘블루’를 본다. 그의 사지는 결박되고 그의 눈앞에서 샘이 산산조각 나서 모래와 섞이는 모습을 목격한다. 체포된 그는 잔인한 복수를 다짐한다. 




남성이 아닌 여성 전투 조종사
                      
작가 조지 브란트가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애초의 주인공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가 여성 드론 조종사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그 내용이 상당 부분 극에 반영되었고 주인공도 여성으로 바뀌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소령은 전쟁의 비이성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전쟁은 어떠한 방법을 쓴다 해도 참여하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말살한다. 미국 정부는 고급 기술을 익힌 전투 조종사를 전쟁에서 잃는 사태를 막기 위해 드론을 띄워 본국인 미국에서 조이스틱으로 조종하는 방식을 택하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몸은 살아 있으나 정신이 죽어가는 또 다른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통계에 따르면 현실 전쟁에 참여하는 사람보다 드론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발생 확률이 더 높다고 한다.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알렉상드르 뒤마는, 인간이란 지구 반대편의 중국인 관리를 죽이는 데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타인의 죽음은 진짜 죽음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지만 드론이 출격할 때는 달라진다. 반복되는 회색 모니터 속의 무채색의 죽음은 소령의 내면을 심연부터 갈라놓는다. 죽임을 당하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조차 않는 드론이라는 감시 기계는 조종사로 하여금 마치 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동시에 그러한 신이 어디에선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거라는 매우 타당한 의심에 빠져 강박에 가까운 경계를 품는다. 주인공이 여성이 되면서 임신과 출산 문제까지 더해져 그토록 사랑했던 ‘블루’와의 관계가 순식간에 무너진다. 전투기 조종사이기에 다른 남자인 조종사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그들과 어울렸고 그들 무리의 하나가 되었지만 임신은 단번에 그에게 엄청난 ‘징벌’이 된다. 그 징벌은 군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동시에 내려지는 징벌이다. 자신의 전부라 여겼던 블루를 배신한 벌로 그는 홀로 창공을 가르던 인간이 아니라 수많은 그저 그런 신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주체적인 인간에서 그저 그런 수단의 하나로 전락해 버렸음을 깨닫는다. 그의 위에는 번개의 신 제우스가 있다. 드론 조종사임을 의미하는 번개 배지는 제우스의 번개 사용 대행자임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그 자신이 제우스라 착각하고 환호하지만 본능적으로 그는 자신이 제우스가 아니라는 사실과 언제라도 제우스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배지를 극도로 싫어한다. 극이 마지막으로 치달을수록 그는 회색 심연 속에 잠기면서 미쳐가고 결국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반기를 들며 총구를 반대로 돌린다. 그리고 감옥 안 망상 속에서 블루를 되찾는다. 




한국 공연이 되짚어 볼 점
                      
무대는 깊은 원근감을 표현하기 위해 누운 사각뿔 모양으로 디자인되었고 그 위에 선 차지연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낸다. 원작에서는 ‘Fuck’이라고 묘사된 섹스가 사랑을 나눈다는 말로 순화되고, 에어-포스에서 체어-포스로 전락했다는 심란한 말장난도 사라졌지만, 그는 일인극의 한계를 넘어서며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관객의 눈앞에 그려낸다. 아이를 대할 때의 그는 마치 사랑하되 보여줄 줄 모르는 아버지처럼 보인다. 연출이 적극적으로 개입한 부분은 마지막 장면이다. 소령이 샘의 복수를 외치며 관객을 쏘아본 이후, 모래가 천장에서 흘러내린다. 소령은 손바닥으로 모래를 받으며 해방된 듯한 웃음을 띤다. 극 중에서 모래는 소령의 꿈과 야망, 삶 모든 것을 파묻게 하는 ‘블루’의 반대편에 있는 ‘그라운드’다. 모래는 소령에게는 전쟁터다. 파편이 된 샘(이라고 착각한 다른 아이)의 육체는 모래 먼지에 뒤섞이고 자신의 더러운 기억을 묻는 것도 네바다의 사막 모래 속이다. 모래는 그를 파묻고 그의 발목을 잡는 ‘땅’이고 그가 벗어나고자 했던 모든 굴레다. 결국 그 땅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그는 정신을 놓는다. 현실은 ‘그라운드’에 붙박여 있기에 그의 정신만이 비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소령이 마지막에 모래에 손을 씻는다. 그의 캐릭터가 흔들리는 순간은 공연 중반부에 한 번 더 있는데, 공군 기지에 지각해서 선임자의 질타를 받을 때다. 선임자는 남성의 말투와 반말로 소령을 질타하고 그는 주눅 든 소녀처럼 존댓말로 웅얼거리며 사과한다. 그 순간의 소령은 완전히 낯선 인물이다. 그 찰나의 순간에, 소령은 남성 세계에 뛰어들어 남성의 방식으로 성공하려다 추락한 인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작품에 매료된 수많은 배우들과 들불처럼 번져 나갔던 수많은 다른 나라의 프로덕션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늘을 날고자 했던 차지연의 프로메테우스에게 페가수스가 아닌 타이거를 쥐어준 것은 작가일까 연출가일까, 혹은 둘 다일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1호 2020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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