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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VER STORY] 류정한, 한국 뮤지컬의 찬란한 역사 [No.199]

글 |배경희 사진 |김현성 styling | 이영표 hair | 제롬 make-up | 창대 2020-05-04 12,315

류정한
한국 뮤지컬의 찬란한 역사 

 

<오페라의 유령>, <지킬 앤 하이드>, <맨 오브 라만차>, <쓰릴 미>, <스위니 토드>,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프랑켄슈타인>. 언뜻 보면 별다른 공통분모 없이 나열해 놓은 듯한 이 작품들은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은 뮤지컬이라는 점에서 하나로 묶인다. 그리고 교집합의 범위를 조금 좁히면, 초연에 모두 류정한이라는 배우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그렇다, 한국 뮤지컬 스테디셀러의 역사 그 태초에 류정한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드라마틱한 데뷔 스토리

 

<드라큘라> 티켓 예매 페이지에 프로듀서의 지속적인 러브콜로 스페셜 한정 공연을 하게 됐다고 나와 있어요. 이번 공연에 한정적으로 참여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겠죠?   2015년에 <지킬 앤 하이드> 지방 공연과 <팬텀> 서울 공연을 병행한 적이 있어요. 주중에는 <팬텀>에 출연하고 주말에는 <지킬 앤 하이드>를 하는 식이었는데, 그때 앞으론 이렇게 두 편을 번갈아 가며 공연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 공연계 특성상 한 배우가 동시에 두 편에 참여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솔직히 그게 제작사나 배우, 그리고 관객 모두에게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올해 제 상반기 일정은 <레베카>를 하는 거였고, 사실 <드라큘라>는 계획에 없던 일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이 아니면 내가 이 작품을 다시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드라큘라>는 초연을 하고 나서 한 번쯤 꼭 다시 해보고 싶었거든요. 결국 두 작품의 공연 일정이 겹치지 않게 출연 횟수를 조정하는 걸로 결론지었죠.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새삼스레 놀란 점은 훗날 스테디셀러가 된 작품의 초연에 거의 빠짐없이 출연했다는 거예요. <지킬 앤 하이드>(2004), <맨 오브 라만차>(2005), <쓰릴 미>(2007), <영웅>(2009),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2010) 등등 성공 사례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죠.   저는 성공으로 가는 좋은 작품이 따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관객들이 그 작품에 얼마나 공감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뿐이죠. 때문에 어떤 작품이든 관객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디테일하게 만드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흥행에는 운이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고요. 그런 면에서 저는 운이 정말 좋았고, 많은 혜택을 받은 배우 중 한 명이에요. 초연 때는 어느 누구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데, 자기가 참여한 많은 작품들이 오래도록 사랑받는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잖아요. 세상에 처음 나온 어떤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고 캐스팅과 상관없이 계속 공연될 수 있는 것처럼 공연계에 고무적인 일은 또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참여한 많은 초연작 가운데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작품을 하나 고를 수 있을까요. 내가 이 작품의 시작을 함께했다는 사실이 두고두고 영광스러운 작품이요.   이건 정말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네요. 하지만, 아무래도 데뷔작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저한테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이죠. 사실 학교 다닐 때는 뮤지컬에 큰 관심이 없었고, 제가 배우가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거든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오디션도 대학 선배이자 당시 삼성영상사업단에 계셨던 박용호 대표님(두 사람 다 서울대 성악과 출신이다) 권유로 보게 된 거였는데, 저 혼자 정장 차림을 하고 오디션을 봤던 기억이 나요. 저는 그때만 해도 오디션 같은 자리에는 당연히 정장을 차려입고 가야 하는 줄 알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진짜 웃기죠. 뮤지컬배우로 활동하는 데 발판이 되어준 <오페라의 유령>이나 저라는 배우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던 <지킬 앤 하이드>도 소중하지만,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영영 뮤지컬하고 관련 없는 다른 삶을 살았을지 몰라요.
 

성악과 재학 시절엔 어땠나요. 기억나는 일화가 있을지요.   학교에 막 들어갔을 때 음악적 지식이 별로 없는 상태였어요. 세 달인가 레슨을 받고 덜컥 성악과에 붙었거든요. 오페라가 뭔지도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알게 됐죠. 성악 대가들의 공연 비디오를 틀어주던 학교 앞 카페 생각이 나는데, 그때는 그런 자료를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친한 동기들하고 매일 거기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대가들의 노래 영상을 보고 또 보면서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낼까? 소리를 뒤로 돌려내나?’ 애들하고 만날 똑같은 이야기를 했죠.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름다운 소리를 그 자체로 순수하게 즐기지 않고 왜 자꾸 계산해서 분석하려고 하지? 음악을 즐기지 못하는 내가 음악을 해도 되나. 이건 뮤지컬배우로서도 한동안 유효했던 질문이었어요. 어쨌든, 제 어린 시절 오랜 친구들은 제가 이런 일을 하는 걸 굉장히 의아해해요. 사람 앞에 나서서 주목받는 것도 싫어하고, 무리를 지어 어울리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 애가 뮤지컬을 한다니 참 희한하다, 그런 이야기를 하죠.
 

다시 뮤지컬 이야기로 돌아가면, 뮤지컬계에 성악과 출신이 드물던 때에 데뷔작에서 주인공을 거머쥐다 보니 이를 보는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았다면서요.   솔직히 저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데뷔하고 나서 많은 제작자들에게 프러포즈를 받게 될 줄 알았어요. (웃음) 그때 당시에는 노래를 잘한다는 배우가 많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공연이 끝나고 어느 누구도 저를 찾지 않더라고요. 이제와 생각해 보면 연기를 배운 적도 없이 바로 주인공으로 무대에 섰으니 얼마나 부족했겠어요. 하지만 그땐 내가 부족하단 생각보다 ‘내가 뭐가 그렇게 부족한데?’ 하는 반항심이 더 컸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성악과 출신이란 이유로 기본기 없이 타이틀롤을 맡았다는 따가운 시선이 많았거든요. 오기가 생겨서 연기를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선생님급 선배님들이 하시는 정극에 참여했지만, 세 편 연속 무리한 도전을 하다 보니 오히려 이건 내 길이 아니란 생각만 커졌어요. 실제 프로듀서 공부를 하러 미국 유학을 준비했으니까요. 그러다 드라마틱하게 만나게 된 작품이 <오페라의 유령>이에요. 


 

<오페라의 유령> 한국어 초연을 못 봐서 너무 아쉽지만, 귀족 청년 라울은 누가 봐도 삼십 대 류정한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배역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라울이라는 오디션 결과를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죠.   미국 유학행 비행기를 타기 전날인가 전전날, 큰 기대 없이 1차 공개 오디션을 봤어요. 그런데 얼마 후 뉴욕에서 2차 오디션 연락을 받은 거예요. 당시 <오페라의 유령> 오디션은 꽤나 장기간에 걸쳐 진행됐거든요. 사실 제가 원했던 역은 ‘유령’이었기 때문에 처음에 라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안 하겠다고 했어요.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 (웃음) 이후 진행된 추가 콜 오디션에서도 계속 라울을 하라고 하기에 몇 번이나 “그럼 안 하겠습니다” 거절했는데, 당시 한국 공연 연출을 맡았던 아티(아티 마셀라)가 그러더라고요. 유령 역은 사십 대가 넘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라울은 지금 네 연령대에만 할 수 있고, 젊어서 라울을 하다가 나중에 유령을 하는 배우는 있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없다고요. 그 말에 못 이기는 척 유학 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왔던 게 제 새로운 시작이 됐어요. 
 

<오페라의 유령> 한국어 초연은 한국 뮤지컬 역사에서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잖아요. 당시 그 무대를 통해서 뮤지컬배우로서 조금 더 확신을 갖게 됐을까요.   그때까지도 그런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공연하는 게 너무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됐죠. 매 공연 객석이 관객들로 가득했거든요. 오디션을 통해 배우들을 선발하다 보니 팀에 스타 배우라 할 만한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요. ‘<오페라의 유령>을 한국에서 한다고? 당연히 봐야지’ 하고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오죽하면 원 캐스트라 일곱 달 넘게 매일 무대에 섰는데도 힘들지 않더라고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들이 이 작품에 참여한다는 자긍심이 대단했는데, 누가 요즘 뭐하냐고 물어보면 딱 두 단어로 답했어요. “나? <오페라의 유령>.” 작품에 대한 저희의 프라이드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되시죠? (웃음) 그땐 앞으로의 미래 같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울타리 안에 내가 섞여 있는 게 그저 행복했어요. 
 

사실 <오페라의 유령>은 워낙에 세계적인 대작이니까 어느 정도 흥행이 점쳐졌겠지만, <지킬 앤 하이드>는 개막 전에 쉽게 흥행을 예상하지 못 했을 것 같아요. 류정한이라는 배우 개인에게도 센 역할은 커다란 도전이었을 테고요.   배우들은 우리나라에 아직 들어오지 않은 작품들도 열심히 찾아보잖아요? <지킬 앤 하이드>는 자료를 찾아본 배우들마다 다들 재미있다고 한 작품이에요. 2004년 초연 당시만 하더라도 살인마를 주인공으로 선악을 다루는 어두운 뮤지컬은 흔하지 않았는데, 한 배우가 전혀 다른 성격의 1인2역을 맡는 파격적인 퍼포먼스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저는 당연히 잘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실제 초연 첫날 공연부터 대단한 반응을 얻었고요. 긴장한 탓인지, 집중한 탓인지, 첫 공연을 어떻게 했는지 아무 기억이 없지만, 커튼콜 때 경험했던 특별한 기분만큼은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어떤 점에서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졌던 걸까요.   커튼콜 장면에서 무대에 등장했을 때 극장 안의 공기가 아예 다르게 느껴졌어요. 마치 객석 저 끝에서 무언가 확 밀려오는 느낌? 음향 감독님께서 소름이 돋을 정도로 짜릿했던 커튼콜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하셨어요. 모든 배우와 스태프 들이 그렇게 느꼈죠. 후배들도 그런 비슷한 감정을 경험할까, 그런 무대가 많았으면 좋겠다, 종종 그런 생각이 들어요.


 

마음을 따른 길

 

지난 20년 동안 한결같이 뮤지컬계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작품 선택에서 유리했을 거예요. 작품 제안이 많았을 거고, 선택의 폭도 넓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해서 성공 확률이 자동으로 높아지는 건 아니잖아요. 가능성 있는 작품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배우 자신이죠. 2000년대 중후반에 <쓰릴 미>나 <스위니 토드>, <이블 데드> 같은 실험적인 작품을 일찌감치 알아본 걸 보면 본능적인 감을 타고난 게 아닐까 싶어요.   어떤 작품을 하든 대본을 읽었을 때 마음이 끌려야 하는 것 같아요. 모든 배우가 마찬가지일 거예요. 물론 작품 외적인 이유로 출연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선은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인지가 제일 중요하죠. 방금 말씀하신 작품들 모두 다른 걸 다 떠나서 대본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특별한 의도나 목표를 가지고 선택하지 않았어요. <쓰릴 미> 초연 때가 기억나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서 동성애를 소재로 하는 작품이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질까 하는 우려의 시선이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이 작품이 진짜 잘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인간이 인간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는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두 주인공의 심리전이 무척 흥미로웠고요. 
 

개인적으론 2014년 <프랑켄슈타인> 초연에서 오만한 젊은 과학자 빅터와 싸구려 격투장 주인 자크라는 1인2역을 한 것도 꽤나 놀라웠어요.   <프랑켄슈타인>의 경우에도 대본에 재미있는 요소들이 있었어요. 거기에 제가 아주 조금 아이디어를 보탰죠. 원래 설정은 빅터와 자크를 각각 다른 배우가 하는 거였거든요. 캐릭터 설정상 주요 배역 출연진 모두 1인2역을 맡기로 되어 있었는데, 빅터 역할 배우만 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아쉽더라고요. 정반대의 성격인 빅터와 자크를 번갈아 연기하면 극적인 재미도 커질 것 같았고요. 다행히 왕용범 연출가가 좋은 아이디어라고 제 의견을 받아주었죠.
 

아이디어라는 표현은 안 어울릴지 몰라도, 2007년 <스위니 토드> 초연에서 냉혈한 살인마 캐릭터를 처연하게 표현해 엇갈리는 반응을 얻기도 했어요. 뮤지컬배우로서 참여한 첫 손드하임 작품이었는데, 어떤 기억으로 남았나요.   손드하임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곡가이지만, <스위니 토드>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빨리 공연될 줄은 몰랐어요. 즐거운 이야기도 아니고, 음악 역시 쉽지 않잖아요. 흔히 말하는 중독성 강한 멜로디와는 거리가 있죠. 사실 저도 처음엔 손드하임 음악을 어렵게 느꼈는데, <스위니 토드>를 해보니 그만큼 배우에게 친절한 작곡가가 또 없더라고요. 손드하임은 캐릭터가 극 중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악보에 담아놓거든요. 그래서 노래를 할 때도 마치 대사를 읊는 느낌이에요. 캐릭터로서 느끼는 감정하고 동떨어져 있는 멜로디에 맞춰 노래를 부를 일이 없죠. 어쨌든 뮤지컬 관객층이 두텁지 않았던 당시 한국 시장에서 <스위니 토드>는 흥행이 되는 게 도리어 이상할 작품이었어요. 어느 제작사에서도 선뜻 무대에 올릴 엄두를 못 냈는데, 결국 박용호 대표님(당시 뮤지컬해븐 대표)이 제작에 나서더라고요. 정말 용기 있는 분이에요. 비록 재연이 다시 올라오기까지 9년 가까이 걸렸지만, 오디컴퍼니에서 새롭게 제작을 맡았단 소식을 들었을 때 굉장히 반가웠어요. 너무너무 사랑하는 작품이 무대에 다시 올라간다는 건 그자체로 정말 기쁜 일이니까요. 
 

작품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까 싶은데, 혹시 못해서 마음에 남은 작품이 있을까요.   그럼요, 너무 많죠. <레 미제라블>의 장 발장이나 자베르 같은 역할 얼마나 멋져요. <미스 사이공>의 엔지니어도 멋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오페라의 유령>, 지금도 하고 싶어요. 유령은 정말 멋진 캐릭터잖아요. 여담이지만, 2009년 라이선스 재연 때 오디션 제안을 받은 적이 있어요. 그때만 해도 오디션을 보면 유령을 맡을 가능성이 조금은 있었거든요.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안중근 의사 이야기를 다룬 <영웅> 초연이 예정되어 있어서 고민 끝에 오디션 제안을 고사했죠. 저 스스로도 안중근이라는 인물에 대해 좀 더 많이 알고 싶었고, 사람들이 그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도록 뭔가 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요. <오페라의 유령>에 대한 아쉬움은 남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출연에 욕심을 내기보다 좋은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뮤지컬을 막 시작했을 때, 이건 꼭 봐야 한다는 생각에 챙겨봤던 첫사랑 같은 작품들은 그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달까. 관객으로서 그 작품을 응원하고 싶어요.
 

그럼 배우로서 스스로 아쉬웠던 점도 있나요.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때 왜 그랬을까, 그러지 말걸’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들이요. (웃음)   물론, 너무 많죠. (웃음) 옛날에는 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나이를 먹고 되돌아 보니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구나 싶어질 때, 그런 순간들이 꽤 있어요. 마음 쓰지 않고 지나쳐도 됐던 일들인데, 그때는 왜 그렇게 거기에 목을 맸을까 제 자신이 아쉽죠. 예전에 어떤 분이 대가는 ‘외유내유’의 품성을 지녔다는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사실 이 이야기는 옛날 인터뷰 때 많이 했던 말인데, 타인에게 관대함을 베풀 줄 알고 자기 자신에게도 너그러워야 진짜 대가라는 거예요. 근데 저는 어렸을 때 ‘외강내강’에 가까웠어요. 남에게도 엄격하고, 저한테도 엄격했죠.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이제는 제 일에 집중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돌이켜 보면, 예전에는 명분 없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던 적도 많았거든요. 물론 지금도 그럴 때는 있겠죠. 하지만 이젠 그래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요. 과연 이게 내가 에너지를 쏟아야 할 일인가? 이게 시간이 지나도 신경쓰일 일인가? 잠깐 멈추고 생각해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들이 많죠. 

 


 

무대에서 찾은 새로운 즐거움

 

2017년 <시라노> 제작을 맡으면서 프로듀서 데뷔식을 치렀어요. 사실 뮤지컬 제작에 대한 의지는 데뷔 초부터 여러 인터뷰를 통해 꾸준히 밝혀왔는데, 프로듀서 공부를 하러 유학길에 올랐던 당시에 막연하게 이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있나요.   아주 오래전 이야기지만, 옛날에는 액션 영화 <장군의 아들>을 뮤지컬로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장군의 아들>은 1990년대 우리나라 대표 액션 영화로 꼽히는 작품이니까, 무대에서 안무로 액션 장면을 연출하면 근사할 것 같더라고요. 예를 들어, 마이클 잭슨의 ‘Beat It’ 안무를 오마주해서 액션 신을 만들면 멋있지 않을까 혼자 그런 생각들을 했죠. 근데 저 그때 미국에 가서 진짜 밑바닥부터 시작해 볼 마음이었어요. 어차피 영어도 잘 못하는 거 몸으로 부딪혀볼 각오였죠. <오페라의 유령>에 출연하면서 한 달 만에 돌아오게 됐지만요. (웃음) 옛날이야기를 하니까 어렴풋한 기억이 떠오르는데, 학창 시절 처음 뮤지컬을 접했을 때 그간 오페라를 보면서 느꼈던 아쉬웠던 부분들이 채워지는 느낌이었어요. 뮤지컬은 뭐랄까, 조금 더 이해하기 쉽고, 조금 더 즐길 수 있는 장르 같은 느낌? 막연하게 뮤지컬과 관련된 일을 하면 재미있겠다 싶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배우를 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어요. 제 인생에서 드라마틱했던 사건들은 대개 예고 없이 찾아왔죠. 제가 계획하지 않았던 일들이거든요. 인생은 정말 알 수 없어요. (웃음) 
 

첫 프로듀싱 작품 <시라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처음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 연출이 아닌 제작에 도전한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배우들이 보통 도전에 욕심내는 분야는 연출이잖아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기준이 뚜렷한가 봐요.   연출가는 배우의 연기 방향에 대해 디렉션을 줘야하는데, 저는 그런 재능은 없는 것 같아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설령 재능이 있다고 해도 거기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랄까요. 왜냐면 제가 배우로서 하지 않으려고 하는 행동 중 하나가 모니터링이라는 이유로 서로의 연기에 대해 쉽게 조언해주는 거거든요. 물론 후배들이 연습하는 걸 보면서 ‘여기서 조금만 이렇게 한다면 훨씬 좋아질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왜 없겠어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데뷔작에서 처음 무대에 서는 배우라고 해도 그 배우는 돈을 받고 무대에 서는 거잖아요. 그럼 우리는 같은 동료 배우인 거죠. 배우들끼리 함께 의견을 나누고 서로 디테일을 맞춰가는 게 아니라, ‘여기 이렇게 해야 해’라고 가르치듯 조언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봐요. 굉장한 실례라고 생각하죠.
 

<시라노>는 어떻게 제작 결심을 하게 됐는지 궁금해요. 처음부터 대극장 작품을 제작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이 작품을 한국에 올려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있었을까요.   프랭크(작곡가 프랭크 와일드 혼)는 저한테 친구 같은 사람이에요. <지킬 앤 하이드>로 인연이 된 후에 꾸준히 그의 작품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특별한 이유 없이 만나서 편하게 차 한 잔 하는 사이가 됐어요. <시라노> 이야기도 사적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건데, 이 작품이 언젠가 한국에서 공연되면 저보고 꼭 시라노를 해줬으면 좋겠대요. 아직은 관심을 보이는 국내 제작자가 없다면서요. 원작 소설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궁금한 마음에 대본하고 음악을 보내달라고 했죠. 그런데 그 음악에 완전히 꽂힌 거예요. 대본을 읽었을 때는 이건 내가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캐릭터란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제가 프랭크한테 <시라노>를 제작하겠다고 했을 때, 처음엔 저보고 용기가 대단하다면서 웃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나는 이 작품이 한국에서 공연돼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도 이걸 올리지 않겠다고 하면 내가 직접 제작을 하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요. 2015년에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2017년에 공연을 올렸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거죠. (웃음)


 

배우와 프로듀서의 역할은 너무나 다르니까 첫 번째 작품을 제작하면서 아마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을 테죠. 아까 사진 촬영 현장에서 <시라노>를 제작하면서 인생 공부를 많이 했다는 이야기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들렸어요. (웃음)   배우는 주로 부탁을 하기보다 부탁을 받는 쪽에 더 가깝잖아요. <시라노> 때는 그 반대의 일을 해야 했는데, 어떻게 부탁을 해야 할지조차 잘 모르겠더라고요. 사람 마음은 똑같을 수 없다는 걸 많이 배웠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나라 제작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변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관객층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변화는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아요.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최근까지도 임금 미지급 사태로 공연이 중단되는 일이 있었잖아요. 물론 제작사에서 돈을 일부러 안 주려고 그러는 건 아닐 거예요. 하지만 제작자는 한 작품의 중심에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든 공연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요. 한두 명의 제작자가 같은 문제를 반복해 일으킨다면, 그 제작자는 임금 체불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건 물론이고 앞으로 공연 제작에서 손을 떼는 게 맞다고 봐요. 임금 미지급 사건 같은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안길 뿐 아니라, 그런 피해 사례가 쌓이면 공연계 전반에 안 좋은 영향을 주니까요. 이런 쓴 소리를 하는 이유는 <두 도시 이야기>가 저한테는 너무너무 속상한 작품으로 남았거든요. 희생과 정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 정말 좋아했는데, 제작자 문제로 사람들의 기억에 안 좋게 남아버려서 두고두고 안타까웠어요. <두 도시 이야기>는 언젠가 꼭 다시 하고 싶은 작품이에요.
 

혹시 앞으로 제작을 구상하고 있는 작품이 있을까요. 구체적인 제작 계획이라든가요.   머지않은 미래에 꼭 창작뮤지컬을 만들어 볼 생각이에요. 창작 뮤지컬 제작 과정은 라이선스 뮤지컬을 제작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힘들고 험난하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어 보고 싶거든요. 사실 저는 원래 여러 사람들하고 모여서 뭔가 같이 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었어요. 굉장히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죠. (웃음) 그런데 <시라노>를 만들면서, 작가, 연출가, 디자이너 들이랑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이 장면에서 조명이 이렇게 들어오면 어떨까 하는 식의 대화를 하는데 어느 순간 흥분해서 말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죠. (웃음)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누가 그러더라고요. 작품 이야기를 할 때 되게 신나 보였다고요. 학교 다닐 때 연극영화과 학생들이 하는 것처럼 워크숍 공연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이렇게 작품의 출발선에 있는 게 엄청 즐거웠나 봐요. 조금 철없는 이야기일지 몰라도, 앞으로도 이런 즐거움을 많이 느껴보고 싶어요.
 

신인 배우들을 인터뷰하다 보면 류정한 선배님을 보면서 뮤지컬배우의 꿈을 키웠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요. 누군가 나를 롤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지만, 한편으론 그에 따른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겠죠.   제가 올해 오십 세가 됐잖아요. 이만큼 나이를 먹고 보니 오랜 세월 무대에 서고 계신 선배님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까지 공연계를 지켜주셨단 사실이 고맙기도 하고요. 그런 선배님들이 안 계셨다면, 저도 이만큼 오지 못했을 테니까요. 제가 선배 배우로서 해야 할 일도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특히 요즘 젊은 배우들에게는 뮤지컬만 고집해서는 오히려 뮤지컬배우로 활동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있잖아요. 물론 후배들이 방송 매체에 진출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게 되는 건 너무너무 축하할 일이죠. 전 국민이 아는 배우가 되는 것은 모든 배우들이 바라지 않을까요. 하지만 뮤지컬이 좋아서 한 우물만 파는 배우들도 분명히 있거든요. 다른 곳 어디가 아닌 뮤지컬 무대에 서고 싶은 후배들이 방송 매체 진출에 대한 부담에 지치지 않고 꾸준히 뮤지컬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제가 먼저 선배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테고, 그런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도움이 되어야겠죠. 개인적으로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이 뮤지컬을 할 때 오직 작품 때문에 출연을 결정했으면 좋겠어요. 신인 시절의 초심을 찾으러 오는 게 아니라 정말 이 작품이 너무너무 하고 싶어서 출연하고 공연하는 기간만큼은 무대에만 집중해주길 바라죠. 그럼 정말 멋있을 것 같아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9호 2020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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