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액터뮤지션> 김지철
멀리 가기 위한 숨 고르기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 <아내의 맛>에 출연해 달콤한 신혼부부의 모습을 보여준 배우 김지철. 그가 무대에서 정반대의 살벌한 부부를 연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출연하는 <미드나잇: 액터뮤지션>은 스탈린의 공포 정치 아래 숨죽이고 살아온 한 부부에게 자정 직전 불길한 손님이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지난 2월 개막한 <미드나잇: 앤틀러스>와 같은 내용이지만 영국 오리지널 프로덕션 그대로 액터뮤지션이 등장하는 색다른 버전이다. 김지철은 이 작품에서 아내를 사랑하는 다정한 남편의 모습 뒤에 어두운 비밀을 숨긴 ‘맨’을 연기한다.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자신이 나아갈 길을 고민하고 있다는 김지철이 이 무대를 거쳐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신중하게 선택한 무대
최근 아내 신소율 씨와 함께 <아내의 맛>에 출연한 게 화제가 됐어요. 대중에게 부부의 일상을 공개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데 출연을 결정한 이유가 궁금해요. 전부터 아내와 함께 추억을 쌓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방송 출연이 특별한 추억을 만들고 또 그 추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더라고요. 3년간 만나면서 공개 연애 기사가 한 번 뜬 걸 제외하면 대중 매체에 저희 모습이 노출된 적이 없는데, 적은 비용으로 스몰웨딩을 올리는 과정이 방송을 타면서 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어요. 그렇다고 해서 저희 일상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어요. 가끔 방송을 보신 분들이 잘 어울린다, 보기 좋다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할 뿐이에요.
뮤지컬배우 손유동, 진태화 씨가 방송에 출연해 프러포즈 이벤트를 돕기도 했잖아요. 뮤지컬배우들을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만나니 반갑더라고요. 두 배우와는 같은 작품을 한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어떻게 친해졌나요? 동갑내기 배우들끼리 만든 모임이 있어요. <위대한 캣츠비>에 함께 출연했던 강기둥이 절 그 모임에 초대했죠. 유동이와 태화는 거기서 처음 만났어요. 원래 기둥이도 저희와 함께 방송에 출연할 예정이었다가 스케줄에 차질이 생겨서 못 온 거예요. 예능 출연은 처음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지만 셋이서 나름대로 혼신의 힘을 다했어요. 함께해 준 두 친구에게 너무 고마워요. 언젠가 꼭 같은 작품에서 만날 수 있길 바랐는데, <미드나잇>에서 드디어 유동이와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네요.
차기작으로 <미드나잇: 액터뮤지션>를 선택한 이유가 뭔가요? <키다리 아저씨> 이후 몇 개의 출연 제안을 받았지만 모두 고사하고 일정을 비워두고 있었어요. <미드나잇>도 한 번 고사를 했는데 계속 연락이 오더라고요. 사실 이범재 음악감독님이 <오디너리 데이즈>를 함께할 때부터 <미드나잇>에 출연해 보지 않겠냐고 권하셨어요. 이렇게나 저를 믿고 찾아주는 곳이 있다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죠. 제안해 주신 맨 역할은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이라는 점에서 최근 결혼한 제 상황과 잘 맞아떨어졌고, 라이선스 뮤지컬을 한 번 더 경험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고민 끝에 출연을 결정했어요.
바로 출연을 결정하지 못하고 고민한 건 왜인가요? 그동안 저는 무대에서 쉼 없이 달려왔어요. 공연 기간만 따져 보고 성급하게 출연을 결정하기도 했고, 같은 시기 여러 공연에 출연하기도 했죠. 작품마다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다 보니 결국 스스로 만족이 안 되더라고요. 여태까지의 습관에서 벗어나 재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시간을 두고 쉬었어요. 이제는 작품을 선택할 때 더 신중해지려고 해요. 하나의 작품을 하더라도 확실하게 열정을 쏟고 싶어요.
연달아 공연되는 <미드나잇: 앤틀러스>와 <미드나잇: 액터뮤지션> 가운데 후자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요? 액터뮤지션이 등장한다는 점에 끌렸어요. 드라마 위주로 흘러가는 대학로 뮤지컬 가운데서 색다른 형식을 시도하는 작품이잖아요. 신인 시절 <뮤직쇼 웨딩>이라는 넌버벌 퍼포먼스에 1년 6개월간 출연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배우들이 직접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어요. <미드나잇: 액터뮤지션>을 통해 그때의 열정을 되살려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물론 맨은 악기를 연주하지 않고 드라마 전달에 더 집중해야 하는 역할이지만 액터뮤지션과 함께 호흡하면서 연기하니까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희 작품에 출연하는 액터뮤지션분들이 정말 고생이 많으세요. 다른 배우들이 연습에 나오기 전에 먼저 연습을 시작해 각자의 파트를 마스터해 놓으셨더라고요. 노력한 만큼 많은 관객분들이 액터뮤지션을 사랑해 주시면 좋겠어요.
하나의 역할을 위한 무수한 질문
1930년대 소련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지금 한국 관객에게 공감을 살 수 있는 지점이 뭐라고 생각해요? 저도 대본을 읽으면서 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관객들이 이런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어요. 하지만 연습을 하면서 확신을 얻었죠. 작품 속 시대상은 낯설지만, ‘누구나 때로는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만큼은 시대를 초월해 와닿거든요. 작품 속 시대 배경에 대해 공부하긴 했지만 거기에만 얽매여 연기하지는 않을 거예요.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이지만 은근히 코믹한 장면들이 있어서 연기 톤을 잡기가 쉽지 않을 듯해요.
영국 창작진이 처음부터 블랙코미디를 의도하고 만든 작품이라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맨을 마냥 가볍게 그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맨의 사상이 뚜렷해야 그 많은 대사를 소화할 수 있고, 반인륜적인 행위를 저지른 데 대한 당위성도 생길 테니까요. 코미디는 비지터가 어느 정도 담당해 주고 있기 때문에 맨까지 코믹해질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해요. 그렇다고 너무 무게를 잡으면 극 자체가 무거워질 위험이 있죠. 그 적정선이 어디일까 연출님과 맨 역 배우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고 있어요. 아마 연습이 끝날 때까지 조율을 계속할 것 같아요. 프리뷰 기간을 거치면서 관객의 반응을 살피고 최선의 흐름을 찾아야죠.
어떤 장면이 가장 연기하기 힘든가요? 드라마가 흘러가다가 갑자기 비지터의 노래가 치고 들어오면서 흐름이 끊길 때가 많아요. 그때 끊어진 감정선을 어떻게 이어갈지가 관건일 것 같아요. 비지터와 액터뮤지션이 합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맨을 풍자하는 동안 가만히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그때 어떤 연기를 해야 노래와 어우러지면서 맨의 감정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일단은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말고 비지터와 우먼의 감정을 잘 받는 것부터 시작하려고요.
이 작품의 음악이 지닌 독특한 점이 있을까요? 음악에 스윙 재즈, 탱고와 같은 장르적 특성이 분명하게 녹아 있어요. 특히 비지터와 우먼이 탱고 음악에 맞춰 춤추는 부분이 인상적이더라고요. 비지터에 비하면 맨이 부르는 노래는 장르적 특성보다 드라마 전달에 치중해요. 이런 장르의 음악이니까 이런 템포를 지켜야 한다는 식의 공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요. 극 중 스윙 댄스를 추는 장면이 있는데, 단지 춤을 잘 추는 것보다 맨이라면 어떤 식으로 춤출까 하는 연기적 고민에 더 집중하고 있어요. 고위 간부니까 딱딱하게 각을 맞춰서 출까, 아니면 그냥 흥에 겨워서 출까? 성공만을 위해 달려온 사람이라면 춤을 배울 시간도 없지 않았을까? 아니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종종 춤을 췄을까?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아직 답을 내리진 않았어요.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뭐예요? 맨 역할은 노래가 많이 없는데 그 가운데 우먼과 부르는 ‘너와 함께’라는 듀엣이 있어요. 그 노래를 부를 때 기분이 좋아요. 멜로디 자체도 좋고, 좀 더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는 초반부에 나오는 곡이거든요. 유부남으로서 가사 내용이 꼭 제 마음 같기도 하고요. 그 노래를 부르면 진짜 제 아내가 떠올라요.
집에서도 소율 씨와 연기 연습을 하나요? 네, 소율 씨가 대사를 맞춰줘요. 저도 소율 씨가 연습할 때 대사를 맞춰주고요. 소율 씨는 암기력이 정말 좋은데 저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집에서 같이 대사를 맞추다 보니 저도 암기력이 좋아졌어요. 3일 만에 대사를 다 외워 가서 연출님께 칭찬받았다니까요. 사실 저희가 이렇게 대사를 맞춰보기 시작한 건 아주 최근 일이에요. 원래 서로 연기에 대한 얘기는 안 했거든요. 지금은 제가 꼬리를 내리고 선배님으로 모시고 있죠. (웃음)
나아온 시간, 나아갈 시간
그동안 주로 창작뮤지컬에 참여했는데 최근작 <키다리 아저씨>와 <미드나잇: 액터뮤지션>은 라이선스 뮤지컬이에요. 창작뮤지컬에 참여할 때와 다른 점이 있나요? 라이선스 뮤지컬은 정해진 대본과 음악을 따라야 한다는 점이 새로워요. 창작 작업을 할 때는 배우가 작가, 작곡가님과 의논해서 계속 이런저런 시도를 하며 작품을 바꿔 나가거든요. 그런데 9년 동안 창작뮤지컬을 하다 보니 그렇게 바꾸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어요. 안 되는 걸 되게 만드는 것도 배우의 능력인데, 안 되겠다 싶으면 저에게 맞게 바꾸는 데 익숙해져서 그 습관을 깨고 싶었어요. 그래서 라이선스 뮤지컬을 하려고 마음먹은 거예요.
2011년 <영웅> 앙상블로 데뷔해 올해로 데뷔 10년 차가 되었어요. 과거를 돌아보았을 때 본인에게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뭔가요? <맨 인 더 홀>을 공연하면서 확실한 감정이입의 순간을 경험했어요. 무의식 속에서 늑대라는 나의 또 다른 자아와 대면하는 이야기인데 대사는 별로 없고 노래가 긴 작품이었죠. 워낙 판타지적인 이야기라 감정이입이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그런데 무대 위에서 늑대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눈을 보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더라고요. 우느라 1분 동안 노래를 못한 적도 있어요. 신기한 경험이었죠.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계산해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어느 정도 빈 공간을 남겨뒀을 때 자연스럽게 감성이 그 틈을 채운다는 걸 그때 배웠어요. 그 이후로 연기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죠.
신인 때와 비교해 연기를 대하는 자세에 달라진 점이 있을까요? 저는 연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않는 스타일이었어요. 다음 날 어떤 장면을 연습한다고 하면 그 장면에 대해 미리 연구해 가는 게 아니라 대사만 외워 놓고 연습실에서 몸으로 부딪히며 체득했어요. 흐름만 알고 가서 수영을 한 거예요. 그게 저한테 맞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어요. 그것만이 연기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내가 혼자서 꼼꼼하게 연구하고 준비해 간 연기가 다른 배우와 만날 때 나오는 시너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앞으로 또 어떤 작품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나 <레 미제라블> 같은 성스루 뮤지컬이요. 대사 없이 노래로만 이뤄진 뮤지컬을 경험해 보고 싶어요. <오디너리 데이즈>도 성스루 뮤지컬이지만 거기에는 약간의 대사가 있었거든요. 아예 음악으로만 감정을 표현하도록 규정된 뮤지컬의 노래를 불러보고 싶어요.
매체 진출 의사를 밝힌 적도 있는데요, 앞으로 어떤 활동 계획을 갖고 있나요? 결혼을 하고 소속사가 생기면서 책임감이 커지고 새롭게 이뤄 나가고 싶은 목표도 생겼어요. 단지 방송이나 영화 출연만이 아니라 배우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시도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여러 분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려면 다양한 일에 도전해야 하니까요. 예를 들면 <광염소나타>에서 음악가를 연기하기 위해 제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했잖아요. 어렸을 때 피아노를 오래 배운 경험이 도움이 됐는데, 앞으로 실력을 키운다면 저만의 연주회를 열 수 있을지도 모르죠. <리틀잭>에서 보여드린 것처럼 기타를 치며 콘서트를 할 수도 있고요. 지금보다 여유가 생기면 공연계를 비롯해 사회의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도 나서고 싶어요. 저는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아요. 제가 꿈꾸는 그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를 잘 설계해 볼 계획입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9호 2020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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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미드나잇: 액터뮤지션> 김지철, 멀리 가기 위한 숨 고르기 [No.199]
글 |안세영 사진 |김호근 2020-04-29 3,901sponsored adv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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