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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리지 보든 살인 사건, 어느 잔인하고 미스터리했던 살인의 추억 [No.199]

글 |김주연 공연 칼럼니스트 2020-04-29 4,979
리지 보든 살인 사건
어느 잔인하고 미스터리했던 살인의 추억 
 
얼마 전 한국 범죄사상 가장 미스터리한 미제 사건으로 남을 뻔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밝혀져 화제가 된 바 있다. 이제는 DNA 채취, 데이터 분석 등 최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한 범죄 수사 덕분에 범인을 잡기가 훨씬 용이해졌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증거 불확실로 인한 미궁 사건들이 사람들의 공포와 호기심을 자아내곤 했다. 1892년 매사추세츠에서 일어난 리지 보든 살인 사건 역시 그중 하나로, 전 미국 사회를 공포와 경악으로 몰아넣은 역대급 사건이었다. 
 
 
어느 여름, 끔찍했던 사건 현장 
1892년 어느 늦여름, 매사추세츠 주 폴리버의 한 저택에서 부유한 노부부 앤드루 보든과 그의 아내가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앤드루는 1층에서, 아내는 손님방에서 각각 살해되었는데 두 사람 다 도끼로 수십 차례 머리를 가격 당해 안구가 함몰되고 뇌가 부서지는 등 살인 현장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사건 당일 집 안에 있던 사람은 가정부 설리번 브리짓, 그리고 피살된 아버지와 전처의 소생인 둘째 딸 리지 이렇게 두 사람뿐이었다. 
 
외부인의 침입 흔적이 전혀 없는 상태다 보니 결국 최초 발견자인 리지가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몰렸고, 이후 조사 과정에서 리지가 전날 약국에서 독극물을 구입하려 했다는 것과 살인 당일 자기 옷을 태웠다는 점 등이 밝혀지면서 존속 살해의 의심이 더욱 커졌다. 무엇보다 리지에게는 명백한 살인 동기가 있었다. 상당한 재산의 소유자였던 아버지 앤드루 보든이 리지의 계모인 후처에게 전 재산을 상속하려 했다는 점, 그리고 앤드루 부부가 죽을 경우 전 재산이 리지 자매에게 돌아간다는 점은 무엇보다 강력한 살해 동기로 여겨지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여러 정황에 근거한 심증일 뿐, 실제 범행을 증거할 만한 단서(무기와 혈흔 등)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DNA 검사도 지문 검사도 없었던 1890년대 수사의 한계 속에서, 결국 리지는 ‘증거 불충분’으로 배심원들의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난다. 
 
하지만 실제 재판 결과와는 별개로, 리지 보든 살인 사건은 당대 미국 전체를 들썩이게 할 만큼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리지의 무죄를 지지하는 입장과 유죄를 주장하는 의견들 사이에서 여성계, 종교계, 매스컴이 수많은 이슈를 만들어냈고, 아이들은 섬뜩한 노래 속에 리지 보든의 이름을 넣어 불렀다. 이후 리지 보든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살인 사건 용의자로 이름을 떨치며, 소설, 드라마, 영화, 뮤지컬 등에 자주 등장하는 스토리텔링의 주인공이 되었다. 


 
돈과 도끼, 그리고 부친 살해의 모티프 
리지 보든 살인 사건은 특정 살인에 대한 모방 사건이 아니지만, 살인의 대상과 방식, 그리고 살해 도구 등에 있어 묘하게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이다. 실제로 도스토옙스키의 거의 모든 소설에는 살인 사건이 등장한다. 『죄와 벌』에서도, 『백치』에서도, 『악령』에서도 그리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도 살인 사건은 드라마적으로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자 선악의 문제를 파헤치는 단초를 제공한다는 면에서도 중요하다. 
 
리지 보든 살인 사건은 그중에서도 특히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권총이나 칼 같은 일상적인 흉기가 아니라 ‘도끼’로 사람을 내리쳐 죽이는 살해 방식은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전당포 노파 살해를 떠오르게 하고, 포악하고 탐욕스런 아버지가 자식에게 살해당한다는 점에서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부친 살해’ 모티프가 반복된다. 그리고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살인 사건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요소, ‘돈’ 역시 리지 보든 살인 사건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도스토옙스키가 거의 모든 작품에서 돈과 치정, 그리고 살인을 빼놓지 않고 다룬 것은 단순히 흥미로운 소재여서가 아니라, 이것들이야말로 인간 본능의 원초적이고 노골적이며 잔인한 면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리지 보든 살인 사건이 사건 종결 후에도 끊임없이 후세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고 재해석되고 있는 것 또한, 이 사건이 특별히 다른 사건에 비해 더 잔인하거나 충격적이기보다는 이 사건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들이 바로 인간 내면의 어두운 본능을 뚜렷하게 비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제 사건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리지 보든은 소설, 영화, TV 드라마, 음악, 발레, 뮤지컬 등 장르를 막론하고 끊임없는 스토리텔링의 원천이 되어 왔다. 리지 보든이란 묘한 인물 자체에 대한 호기심도 있지만, 사건 자체가 미해결로 남아 있다 보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 다양한 해석들이 실제 사건보다 더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경우, 리지 보든이 범인이라는 사실은 동의하면서도 그 살해 동기와 사건 정황, 그리고 공범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리지가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당한 성적 학대에 대한 복수라고 주장하고, 어떤 이는 리지가 간질병 환자였다는 점에 착안해 환각 상태에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또 어떤 이는 리지와 엠마가, 또 어떤 이는 리지와 가정부 설리번이 공범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크레이그 맥닐 감독,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클로에 세비니 주연의 2018년 영화 <리지> 역시 이러한 다채로운 리지 보든 스토리텔링의 한 축을 담당하는 작품이다.
 
영화에서 아버지 앤드루는 농부들의 땅을 빼앗고 딸들에게는 한 푼도 유산을 남겨주지 않으려 하는 악덕 지주이자 구두쇠 아버지로 등장한다. 이러한 아버지 아래서 간질병과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리지 앞에 어느 날 단단하고 차분한 성격의 가정부 설리번이 등장한다. 글을 모르는 설리번에게 글자를 가르치면서 리지와 설리번은 어느덧 서로를 의지하게 되고, 각자의 아픔을 공유하면서 연인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딸들의 재산을 삼촌에게 의탁하려 하고, 어린 설리번에게까지 더러운 욕정을 품은 아버지를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리지는 결국 어느 여름날 오후, 맨몸으로 도끼를 휘둘러 아버지와 계모를 응징한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실제 공범인 설리번은 재판에서는 리지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여 그녀의 무죄에 힘을 실어주지만, 재판 후 리지를 떠나 먼 농장에서 홀로 살아가고, 리지 역시 평생 독신으로 생을 마친다. 맥닐 감독의 영화 <리지>는 그동안 리지 보든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을 상당수 포함하면서도 가부장제의 몰락과 여성 연대의 승리, 그리고 퀴어적 요소라는 동시대적 코드를 통해 작품에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리지 보든 스토리텔링’이라 할 수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9호 2020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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