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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ULTURE ZOOM IN] <무모할지라도 안티고네>, 무모한 우리가 모여 할 수 있는 일 [No.198]

글 |안세영 사진 |최창민 2020-04-01 4,268

<무모할지라도 안티고네>
무모한 우리가 모여 할 수 있는 일


지난 2월 14일, 공연 개막을 앞두고 대학로 연습실에서 <무모할지라도 안티고네>에 출연하는 6명의 여성 배우들을 먼저 만났다. 연습실에는 배우와 조연출만 단출하게 모여 있었지만, 여느 연습실보다 시끌시끌하게 토론이 이뤄지고 있었다. 다섯 명의 안티고네와 연출을 맡은 이안나는 사소한 대사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 순간 안티고네가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또 다른 안티고네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치열하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무모할지라도 안티고네>는 지난 1월 SNS를 통해 별다른 정보 없이 공개한 포스터 한 장만으로 공연 마니아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포스터에 등장한 출연진은 박란주, 김히어라, 주효경, 소정화, 최유하, 이안나, 김슬기. 연출과 각색을 맡은 이안나를 중심으로 7명의 배우들이 이 작품을 위해 의기투합했다. 이름난 제작사에서 내놓은 작품도 아니고 언론을 통해 홍보가 이뤄지지도 않았지만, 6명의 여성 배우가 주역을 맡아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안티고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사실만으로 빠르게 입소문이 퍼졌다. 2월 22일에서 24일까지 3일간 진행된 공연은 티켓 예매 사이트를 통하지 않고 온라인 설문 조사 폼을 이용해 예매 신청을 받았음에도 회당 90석의 티켓이 금세 팔려 나갔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안티고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혼인하였던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의 딸이다. 진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자기 눈을 도려내고 방랑길에 올랐을 때 그를 따라나섰던 인물이 바로 안티고네다. 안티고네는 아버지가 신탁에 따라 죽음을 맞을 때까지 곁을 지킨 뒤 테베로 돌아온다. 그 사이 안티고네의 두 오빠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왕좌를 두고 전쟁을 벌이다 서로를 죽이고, 형제들의 숙부인 크레온이 테베의 섭정이 된다.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를 위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지만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로 규정하여 매장을 금지한다. 그러나 들판에서 썩어가는 오빠의 시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명령을 어기고 장례 의식을 행하였다가 사형을 당한다. 




이러한 안티고네의 이야기는 그리스 극작가 소포클레스에 의해 비극으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무모할지라도 안티고네>는 안티고네가 고전에서 보기 드물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여성이라는 점에 주목해, 비극의 내용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풀어냈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는 주인공 안티고네를 다섯 명의 배우(박란주, 김히어라, 주효경, 소정화, 최유하)가 연기한다는 것이다. 배우들은 서로 다른 장면에서 돌아가며 안티고네를 연기하고, 다른 배우가 안티고네를 연기하는 동안에도 분신처럼 주위를 맴돌며 그의 심정을 대변한다. 이를 통해 작품은 개인의 비범함이 아닌 연대의 힘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기자가 연습실을 찾은 날은 안티고네가 유모와 언니 이스메네를 만나는 초반부 장면 연습이 한창이었다. 이스메네가 ‘최소한 삼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봐’라고 말하자 다섯 명의 안티고네는 한목소리로 ‘이해하라고?’라고 되물으며 어릴 때부터 자신을 옭아맸던 이해할 수 없는 제약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어서 이스메네가 ‘어떤 이념 때문에 죽는 건 남자애들이나 하는 거야’라고 타이르자 안티고네는 어머니 이오카스테의 가르침을 상기하며 ‘남자들이 할 수 있는 건 우리도 전부 할 수 있는 거야’라고 반박한다. 이렇듯 짧게 엿본 장면만으로도 작품은 새로운 안티고네의 탄생을 예고했다. 





INTERVIEW
이안나·최유하


어떤 계기로 이 공연을 준비하게 되었나? 
이안나_ 
솔직히 말하면 내가 무대에 너무 서고 싶어서 ‘불러주지 않으면 내가 만들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웃음) 『안티고네』는 원래부터 좋아하는 희곡이기도 했지만, 미투 운동 이후 여성의 발언으로 세상이 바뀌고 있는 지금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큰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통해 소수자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 각색을 하고 뜻이 맞는 배우들을 찾아 나섰는데, 의외로 아주 순조롭게 드림 캐스트가 꾸려졌다. 제작사 없이 만드는 작품이라 열악한 환경에서 준비해야 하는데도 배우들이 흔쾌히 참여해 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안티고네 역을 여럿이서 나누어 연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안나_
안티고네는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는 여성이다. 이런 인물은 신화 속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사람은 우리 주변에도 항상 존재한다. 그들 각자는 미미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연대해서 목소리를 내면 분명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절대 권력자조차 그들을 함부로 할 수 없게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더불어 여성 배우인 우리가 모여서 어떤 시너지를 낼 수 있는가도 보여주고 싶었다. 2018년 10명의 여성 배우가 출연한 <베르나르다 알바>를 보고 큰 감동을 받은 바 있다. 또 지난해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에서 여성 배우끼리 뭉쳐 공연했을 때, 관객들이 ‘이런 공연을 기다렸다’면서 객석을 꽉 채우고 환호해 주셨던 걸 잊지 못한다. 관객들의 확실한 호응과 요구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공연을 기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유하_ 안티고네를 한 명의 배우가 연기한다면 분명 그의 비범함이 더 부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섯 명의 배우가 연기하면 신화적 존재나 특별한 영웅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며, 함께하면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연기하면서 희열을 느낀다. 안티고네가 맞서 싸우는 상대 역시 크레온이라는 한 명의 절대 권력자로 한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권력자는 군중을 현혹해 자신에게 맞서는 사람이 마녀사냥을 당하도록 은밀히 조종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군중 심리를 깨부수려면 올바른 신념을 지닌 사람들 또한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

다섯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안티고네는 각각 어떤 특색을 지녔나?
이안나_ 
누구는 순수한 안티고네, 누구는 도전적인 안티고네라는 식으로 처음부터 색깔을 정해 두고 역할을 나누지는 않았다. 같은 사람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나. 우리 작품에서도 그런 식으로 안티고네의 다양한 면모가 드러난다. 
최유하_  내가 느끼기에는 연출님이 본능적으로 각 장면에 효과적인 배우를 배치한 것 같다. 예를 들어 초반에 오빠를 묻어주고 온 직후의 안티고네는 (박)란주가 연기하는데, 몸집이 작고 여려 보이는 란주가 강한 모습을 연기하면서 안티고네의 무모함이 더 강조되는 효과가 있다. 반대로 나는 강한 이미지를 지녔지만, 의연하게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다른 안티고네와 달리 죽음을 눈앞에 두고 두려워하는 안티고네를 연기한다. 만약 란주와 내 역할이 바뀌었다면 지금처럼 장면이 갖는 임팩트가 극대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안티고네와 더불어 크레온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약혼자인 하이몬을 1인2역으로 연기하는데, 두 캐릭터 연기에 어떻게 차이를 두려고 하나?
최유하_
  단순히 남녀의 차이로 구분해서 캐릭터에 접근하지 않았다. 내가 주목한 건 이들이 똑같은 인간임에도 다른 대접을 받고, 다른 수준의 제약 속에서 살아 왔다는 점이다. 하이몬은 살면서 제약을 느낄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왕이 될 사람이고 사랑하는 여인과 혼인을 약속했다. 그런데 안티고네는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무렵부터 거의 모든 행동에 제약을 받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 앞에서 그게 관습이고 전통이니 이해하고 넘어가라는 말을 계속해서 들어왔다. 제약에서 자유로웠던 하이몬과 제약 속에서 자란 안티고네, 두 인간은 어떻게 다를까? 당연히 안티고네 쪽이 좀 더 모든 것에 ‘안티’이고 싶지 않을까? 이러한 관점에서 캐릭터에 접근하고 있다.

안티고네의 적대자인 크레온은 어떻게 그려지나?
이안나_ 
우리 작품에서 크레온은 철저하게 잘못된 어른이다. 사람 좋은 척, 상대의 얘기를 귀담아듣는 척하지만 사실은 무조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절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일탈을 단죄하면서 흔히 덧붙이는 말로 ‘다 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가 있지 않나. 그런 말이 우리를 얼마나 답답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보여주고 싶어서 크레온의 캐릭터에 변화를 주었다. 




안티고네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가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는 것도 색다르다.
이안나_ 
고전에서 여성 캐릭터의 목소리는 쉽게 생략된다. 그리스 비극에서 진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의 심정은 장황하게 묘사되지만, 그의 아내이자 어머니 이오카스테는 별말 없이 자살한다. 그 상황에서 이오카스테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너무 궁금한데 그걸 얘기해 주는 작품이 없더라. 우리 작품을 통해 이오카스테의 목소리를 되찾아주고, 그가 딸인 안티고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채워 넣었다. 또 크레온이 왜 안티고네를 살리려고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추가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거 누이인 이오카스테와 함께 있을 때는 크레온도 지금과 다른 사람이었지만, 섭정이라는 자리가 그를 변하게 만들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무모할지라도 안티고네>라는 공연 제목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이안나_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무모한 행동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해봤자 변하는 건 없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점점 더 ‘괜한 문제 만들지 말고 참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 역시 전문 작가나 연출가도 아닌데 이렇게 나서서 공연을 만들어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무모할지라도 행동하는 안티고네를 보며 나 역시 무모할지라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이 공연 자체가 말 그대로 무모하게 시작된 프로젝트다. 혹자는 우리에게 왜 이런 돈 안 되는 일로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무모할지라도 안티고네>라는 제목을 통해 그래도 우리는 이걸 해야만 한다고 알려주고 싶다. 
최유하_  결국에는 무모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우리가 원하는 건 요즘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유리 천장과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에 맞서 한 번 더 무모해지는 것이다. 누군가는 시류를 타서 이런 극을 만든다고 흰 눈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티, 반대하는 자, 거스르는 자가 좀 더 무모하게 거스르고 나섰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같은 안티고네로서 지켜보고 힘을 더해 주시길 바란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8호 2020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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