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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적벽>, ​판소리의 힘이 ‘힙’해지는 맥락 [No.198]

글 |정수연 공연 평론가 사진제공 |정동극장 2020-03-30 4,014

<적벽>
판소리의 힘이 ‘힙’해지는 맥락 


 

창극의 맥락에서

최근 십여 년 사이에 가장 활발하면서도 혁신적인 시도를 해온 공연 장르를 꼽자면 단연 창극일 것이다. 과감한 실험을 이끈 중심은 국립창극단이다. 텍스트의 확장으로부터 형식의 실험에 이르기까지 국립창극단의 새로운 접근은 자주 찬사 받았고 자주 논란이 됐다. 찬사와 논란의 근거는 각각 달랐지만 그 양쪽의 입장 모두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창극이 전통의 선입관에서 벗어나 동시대의 공연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는 사실. 젊은 관객들이 창극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모습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새로운 공연문법을 시도하는 창작자들의 실험실이자 소리꾼을 스타로 탄생시키는 장이 되었을 때, 전통적인 창극은 현대적인 음악극으로 넉넉히 이어질 수 있었던 거다.  
 

<적벽> 역시 이러한 흐름을 잇는 작품이다. 여기엔 창극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지 않다. ‘판소리 음악극’, ‘판소리 뮤지컬’, ‘뮤지컬’, ‘판소리 창작극’, ‘창무극’ 등등 정말 많은 수식어의 와중에도 정작 창극이 없다(극장 측에서는 ‘적벽은 이제 장르’라고 말했다던데 진지하게 생각할 말은 아니다). 이것은 이 작품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잘 보여준다. 전형적인 창극의 틀에 갇히지 않고 장르의 확장을 도모하겠다는 뜻일 거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방향성이야말로 가장 창극다운 면모라는 점이다. 창극은 판소리의 청각적 예술성을 무대의 시각적 언어로 넓히고자 시작된 장르인바, 창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판소리의 ‘전통을 과감하게 현대화’한 결과물인 거다. 창극의 성패가 음악의 완성도가 아니라 무대 언어의 구현에서 좌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작품이 지향하는 장르적인 확장은 더욱 창극다워지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적벽>의 무대 언어는 지난 몇 년 동안 창극이 일궈온 새로운 화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관객들이 알아듣기 힘든 사설의 내용은 자막을 통해 전달하고, 악기를 현대적으로 다양하게 구성함으로써 소리의 정서를 좀 더 감성적으로 펼쳐내며, 해설자를 세워 판소리의 서사적 면모를 강조하면서, 음악이 전달해왔던 몫을 배우의 퍼포먼스로 표현해 내는 등등. 이 작품의 바탕에는 요즘 창극에서 자주 활용되는 문법이 그대로 깔려 있다. 이 작품만의 개성은 공연의 문법보다는 속도감과 에너지에 있다. 일단 판소리 적벽가의 내용을 압축시킨 속도감은 관객들의 몰입을 끌어내는 데 효과적이다. 그 속도감에 극적인 색채를 부여하는 중심인물은 다름 아닌 코러스. 코러스가 고조시키는 소리의 음량과 퍼포먼스의 역동성이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이다. <적벽>이 젊은 에너지가 돋보이는 작품인 것은 맞다. 하지만 창극이라는 장르의 연속성으로 볼 때 이 작품의 만듦새는 지난 십여 년의 흐름에서 앞서지도 처지지도 않는다. 그리 다르지 않은 또 한 편의 창극인 셈이다.

 

음악극의 맥락에서

그런데 이 작품의 맥락을 뮤지컬을 비롯한 음악극으로 옮겨놓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뮤지컬에서는 보기 힘든 것을 이 작품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향해 젊은 관객의 찬사가 쏟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바, 뮤지컬 같은 범주의 음악극으로 설정할 때 이 작품의 공연 언어는 오히려 빛난다. 차근차근 복기해보자. 이 작품의 무대는 비어 있다. 영상은 각 장면의 제목을 알려주는 자막일 뿐 일체 극에 개입하지 않는다. 소품이라고는 배우들의 손에 들린 부채가 전부다. 모든 것이 최소화되어 있는 거다. 뮤지컬에 익숙한 관객들에겐 생소한 풍경이다. 비어 있는 무대? 뮤지컬에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행여 무대가 비어 있다 싶으면 그 공간은 어김없이 영상으로 채워진다. 스펙터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 역시 영상이다. 
 

무대 장치와 영상 등 여러 가지 장치가 비어 있는 자리에 이 작품이 가져다놓은 것은 오로지 배우이다. 공간을 채우는 상상력도, 시간을 흐르게 하는 드라마틱함도, 배우의 소리와 움직임만으로 충분하다. 대표적인 장면은 열다섯 명 남짓한 배우들이 군무로 만들어내는 적벽대전의 스펙터클이다. 이 장면은 사실적이어서가 아니라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기에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코러스들은 병사였다가 말이었다가 변신을 거듭한다. 창극의 배우들이 돋보이는 지점이 이것인데, 판소리에 숙련된 노래꾼인 그들은 춤과 연주를 비롯한 퍼포먼스에서도 결코 빠지지 않는다. 누구는 노래만 하고 누구는 춤만 추고 누구는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모든 영역이 가능한 올라운드 플레이어인 셈이다. 이런 능력치는 배치의 묘미를 가능하게 만든다. 예를 들자면 유비의 대인다움을 드러낼 때 유비는 노래를 끝내지 않고 어느새 홀로 춤을 추는데, 그때 코러스는 유비의 노래를 합창으로 대신하며 비장함의 음량을 증폭시킨다. 뮤지컬이라면 분명 주인공은 노래를 불렀을 거다. 코러스는 춤을 췄을 테고. 이러한 배치는 판소리 음악의 서사적 면모를 드러내면서도 극적인 집중력을 높이는 효과로 나타난다. 
 

<적벽>을 통해 만끽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공연만의 맛과 멋이다. 빈 공간 위에 배우가 서 있는 순간 연극은 시작된다고 했던가. 기술과 자본이 만들어낸 화려한 무대는 환상적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배우의 몸이 구축해 내는 세계는 상상적이다. 무대 위에 선 맨발의 배우들이 몸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다름 아닌 상상력인 것이다. 이거야말로 공연이라는 장르가 주는 고유한 맛일 거다. 자막으로 보여준다 하더라도 도무지 모르겠는 판소리의 사설은 끝까지 못 알아들어도 된다. 정확하게 기억도 나지 않는 삼국지 영웅들의 무용담을 애써 떠올릴 필요도 없다. 그저 배우들의 소리와 퍼포먼스를 따라가다 보면 노래에 따라 가슴이 뜨거워지고 군무의 퍼포먼스를 보면서 심장이 쿵쿵대는 경험을 하게 될 테니 말이다. 오로지 공연에서만 가능한 표현의 방식이 무엇인지 이 작품은 보여주기도 하고 생각하게도 한다. 뮤지컬에서는 보기 힘든, 음악극의 세련됨이요 공연다움이다.    

 

극장의 맥락에서

이 작품의 에너지가 돋보이는 이유 중에는 극장이 차지하는 지분도 크다. 무대 언어가 크게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국립창극단의 작품에서는 연출이나 무대가 돋보이는 데 비해, 이 작품에서 배우의 역동성과 감정의 진폭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극장의 물리적 차이 때문이다. 정동극장의 무대는 관객과 밀착되어 있고 공간이 집약적이어서, 비우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적절할 뿐 아니라 배우의 에너지로 채우는 데 버겁지 않다. 무대를 채우는 공연보다는 배우를 세우는 공연에 적합한 극장으로서 정동극장과 <적벽>은 잘 만난 한 쌍인 셈이다. 사실 이 작품에도 창극으로서의 완성도로 종종 어색해지는 순간은 자주 있다. 특히 판소리 적벽가와 작창을 나란히 배열할 때 음악의 무게는 갑작스레 가벼워지기 일쑤이다. 맨 마지막 장면만 해도 그렇다. 지금껏 이 작품이 끌고 온 호방함에 비해 마지막 장면의 작창은 눈에 띄게 결이 달라 김이 새버리더라. 하지만 배우들의 합창이 객석을 밀고 들어오는 에너지로 발휘될 때 이런 말랑함은 호소력으로 바뀌어버린다. 극장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적벽>이 음악극으로서 관객의 찬사를 받는 것은 전통성 때문이 아니라 다양성 때문이다. 수직적으로는 판소리의 전통을 잇지만 수평적으로는 다양한 음악극을 일군 결과물이다. 전통의 강박을 벗고 신선한 다름으로 다가올 때 판소리와 창극은 굳이 뮤지컬이 될 필요가 없는 ‘힙’한 음악극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이 보기 좋게 증명했다고나 할까. 극장이 차지하는 지분은 여기에서 한 번 더 커진다. 정동극장은 전통에 토대를 둔 음악극을 꾸준히 올리는 극장답게 작은 규모의 실험적 시도에 문을 열었고 다양한 장르의 옷을 입느라 젊어진 전통에 너그러웠다. 이러한 행보는 젊은 관객들에게 정동극장이 하나의 브랜드로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되었으니, 다양성의 인프라에 정동극장의 존재감은 제법 묵직하다. 자기만의 미적 개성과 방향을 가진 극장이 거의 없는 음악극 동네에 정동극장이 뿌린 겨자씨가 이제 조금씩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 싹이 줄기가 되어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이다. <적벽>은 그 시간의 떡잎이다. 

 

*외부 필진의 리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8호 2020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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