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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 YORK] <아메리칸 유토피아> 장르를 뛰어넘은 새로운 작품 [No.197]

글 |여지현 뉴욕 통신원 2020-02-26 3,155

<아메리칸 유토피아> 
장르를 뛰어넘은 새로운 작품


 

데이비드 번이라는 장르

2019년 10월 허드슨 시어터에서 프리뷰 공연으로 시작한 데이비드 번의 <아메리칸 유토피아>는 엄밀히 따지자면 연극, 뮤지컬, 콘서트 어느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존재하지만 여타의 다른 작품처럼 정확하고 구체적인 드라마는 없기 때문이다. 작품은 2018년 데이비드 번이 발매한 솔로 앨범과 이후 1년 동안 진행했던 투어 공연의 이름에서 제목을 따왔다. 브로드웨이 공연은 뮤지컬 관객의 기대에 맞게 주제 의식을 일관성 있게 강조했고, 투어 콘서트의 세트리스트를 수정했다. 
 

데이비드 번은 1970~1980년대 활동했던 뉴 웨이브 밴드 토킹 헤즈의 리더였고, 1991년 밴드가 해체한 이후 솔로 아티스트로 다양한 활동을 펼쳐 왔다. 때문에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아메리칸 유토피아>는 지난해 브로드웨이에서 인기를 끌었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콘서트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아메리칸 유토피아>가 데이비드 번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데이비드 번은 작품의 유일한 내레이터이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의 관조적인 태도를 봤을 때 ‘나’라고 지칭하는 인물이 정말 데이비드 번인지 아니면 그가 바라보는 일반적인, 혹은 특정적인 사람을 지칭하는 것인지 모호한 순간이 많다. 
 

데이비드 번의 음악과 과거의 행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장르에 특정하지 않는 이 작품의 형식이 얼마나 그다운지 생각할 것이다. 한국에서 큰 인지도를 얻지는 못했지만 데이비드 번이 몸담았던 토킹 헤즈는 당시 영미권에서 이전의 록 음악 형식의 틀을 벗어난 꽤 파격적인 밴드였다. 해체된 밴드가 다시 뭉칠 일은 없겠지만, 밴드의 음악과 이후로도 계속된 데이비드 번의 새로운 시도는 음악을 넘어 디자인을 비롯한 다른 분야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사실 데이비드 번이 공연계에 발을 들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0년에 영국 록 밴드 팻 보이 슬림과 함께 「Here Lies Love」라는 제목으로 필리핀 이멜다 마르코스 영부인의 삶을 그려낸 컨셉 앨범을 만들었는데, 그 앨범을 바탕으로 2013년 이머시브 형식의 동명 뮤지컬이 만들어져서 꽤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데이비드 번이 인터뷰에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이 콘서트를 브로드웨이에 올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콘서트에 담겨 있는 내러티브가 브로드웨이 공연으로서도 충분히 가능할 거라는 말을 여러 번 했고, 를 통해서 함께 일한 경험이 있는 연출가 알렉스 팀버스와 안무가 애니 비 파슨의 합류로 <아메리칸 유토피아>를 브로드웨이 공연으로 재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희망을 잃지 않는 이야기

최근 미국의 사회 분위기나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아메리칸 유토피아>라는 제목은 꽤 냉소적으로 들린다. 유토피아라는 단어가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지칭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잊을만 하면 벌어지는 총기 사건부터 시작해서 남미계 이민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정책 등, 민주주의의 대표 주자를 표방했던 미국이 지난 몇 년간 보여 준 모습은 일명 ‘아메리칸 드림’이나 ‘이상향’과 전혀 가깝지 않다. 그러나 데이비드 번은 이 작품의 제목이 희망을 품은 낙관적인 시각에서 출발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인간의 뇌, 그리고 사람과 사람 간의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에서 출발한다. 
 

장 자끄 쌍뻬를 연상시키는 일러스트로 미국 작은 도시의 이름과 사람, 동물, 자연 등이 무작위로 그려져 있는 막이 올라가면 그 뒤로 텅 빈 무대와 해골이 하나 놓인 정사각형의 테이블이 보인다. 공연은 회색 수트를 차려입은 맨발의 데이비드 번이 무대에 올라와서 해골을 들고 찬찬히 살펴보며 뇌의 여러 영역에 대한 노래 ‘HERE’를 부르며 시작한다. 뇌의 어느 영역은 굉장히 구체적이고, 어느 영역은 잘 안 쓰이고, 또 어느 영역은 엄청나게 정확하고, 그 영역들이 뉴런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사의 이 노래는 뮤지컬의 서곡 혹은 연극의 프롤로그를 연상시키며 느슨하지만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작품의 구조를 설명한다. 첫 곡이 끝나면, 데이비드 번이 무대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하고 뇌의 사용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이 결정될 뿐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 결정된다고 하면서 ‘I Know Sometimes A Man Is Wrong’과 ‘Don't Worry About the Government’ 두 곡을 연결시킨다. 각각 1989년 데이비드 번의 첫 솔로 앨범, 1977년 토킹 헤즈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첫 곡은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안정감을, 두 번째 곡은 현대 사회의 편의 속에서 점점 메말라가는 사회상을 노래한다. 공연 중 모든 노래에 대해 데이비드 번이 설명하지는 않지만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담은 이야기를 담은 몇 곡을 소개한다. 뉴런에 대한 단상으로 시작하는 그의 코멘트는 사람에 대한 관찰에서 다다이즘, 텔레비전, 미국의 선거 제도와 그가 시민권을 딴 것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다양하다. 그리고 그 모든 꼭지가 공연 초반부터 사람 간의 연결과 서로에 대한 관심 등으로 아주 느슨하게 묶여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데이비드 번의 희망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곡 중의 하나는 공연의 막바지에 등장하는 자넬 모네이의 ‘Hell You Talmabout’이다. 데이비드 번이 쓴 곡이 아님에도 작품에 추가한 이 노래는 지난 몇 년간 미국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시민운동 ‘Black Lives Matter’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극 중에서도 이 곡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연결점이 만들어진다. 제목을 풀어서 쓰자면 ‘What the Hell Are You Talking About’으로,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곡의 가장 큰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경찰의 권력 오남용과 인종 차별로 미국 역사에서 희생되었던 흑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있다. 강한 퍼커션 사운드를 바탕으로 행진하는 리듬을 따라, 관객이 함께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자체로 큰 힘을 가진다. 물론 관객 모두가 그 이름을 따라 부르지는 않지만, 이런 행동을 통해 데이비드 번이 말하고자 했던 자신과 타인 사이의 연결고리가 탄생하는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렇게라도 연결할 수 있고, 연결될 수 있는 공연장과 작품은 데이비드 번과 이 순간을 함께하는 관객에게 미국의 이상향을 향해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공간이 되어준다.

 

움직임과 비주얼로 그려내는 이상향

데이비드 번이 꿈꾸는 이상향은 음악과 내용만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데이비드 번이 보여주고자 하는 희망적인 이상향은 무대와 의상, 그리고 안무를 통해 시각적으로 잘 드러난다. 작품은 데이비드 번의 솔로 곡으로 시작하지만, 곧이어 보컬이자 댄서인 두 명의 앙상블이 등장한다. 이어 데이비드 번과 동일한 회색 수트를 입고, 악기를 둘러멘 11명의 밴드 멤버가 무대에 올라 모두가 동등한 모습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지만, 애니 비 파슨은 데이비드 번의 첫 작품 에서 함께 작업한 안무가로, 뮤지컬보다는 현대 무용을 기반으로 하는 정통 무용 작품에 더 자주 참여했다. 이머시브 형식이었지만 뮤지컬적인 요소가 많았던 에서는 일부 장면을 제외하고는 익숙한 양식의 뮤지컬적인 안무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뮤지컬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평범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 추상적인 안무로 구성됐다. 굳이 비교하자면 토킹 헤즈의 1980년 곡 ‘Once in the Lifetime’ 뮤직비디오에서 보이는 안무와 그즈음의 토킹 헤즈 공연 무대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데이비드 번과 코러스뿐 아니라 악기를 든 밴드 멤버 역시 무선으로 스피커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사람’을 중심으로 삼은 데이비드 번의 아이디어와도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 
 

막이 올라가고 데이비드 번이 무대에서 첫 곡을 부르는 동안 무대 삼면 가장자리에 은색 구슬 커튼이 서서히 무대 천장으로 올라가면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벽이 만들어진다. 첫 장면에서는 테이블이 소품으로 등장하지만, 대부분 장면에서는 빈 무대 위에 배우만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 데이비드 번은 무대 위의 모두가 전선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을 상상하고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대상 중에 가장 흥미로운 존재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대 위의 배우에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지 않았을까. 
 

<아메리칸 유토피아> 무대 위에서의 움직임은 데이비드 번의 얘기대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 그리고 그들이 때로는 각자, 때로는 같이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그림을 관객들이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 데이비드 번의 사람을 향한 애정과 관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어쩌면 작품의 무대디자이너로 이름을 올린 사람이 없다는 것도 창작진의 의도를 드러내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데이비드 번의 투어부터 함께한 롭 싱클레어의 조명은 빨강, 파랑, 흰색을 주로 사용해 단조로운 무대에 존재하는 사람을 때로는 드라마틱하게, 때로는 있는 그대로 효과적으로 비춰주며 작품의 전체적인 주제를 더 도드라지게 표현해 준다.

 

공연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

<아메리칸 유토피아>는 뮤지컬이나 콘서트의 특별한 장르 특성을 포함하지는 않는다. 굳이 규정하자면 연극적 특성을 지닌 콘서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연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아메리칸 유토피아>는 분명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또렷하게 있으며 그 전달 과정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한 예로 공연장 로비에서는 선거 참여를 독려하는 단체가 관객의 선거 등록을 돕는데, 이것 역시 데이비드 번이 말하는 유토피아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일환이다. 공연장에 들어서서 좋은 음악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고 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상향을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 관객의 노력을 독려하는 것. 베를톨트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살짝 떠오르는 장치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어쩌면 현재 미국이 당면한 여러 문제점을 고려할 때 꽤 중요한 작품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것은 데이비드 번을 비롯한 창작진이 이 작품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풀어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들어갈 때 냉소적으로 느껴졌던 작품의 제목이 공연을 보고 나와서는 조금이나마 희망적으로 다가왔으니까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메리칸 유토피아>는 다른 브로드웨이의 작품보다도 더 ‘공연’이라는 매개체를 잘 활용한 작품이다. 잠시 존재하고 사라지는 공연의 한시성을 통해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유토피아를 엿보고 행동할 수 있는 동기를 유발하고, 그 창구를 마련해 주는 것으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점에서 그랬다. 모든 브로드웨이의 공연이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브로드웨이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작품이 브로드웨이에 울리는 파장이 크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채 어딘가에 있을 유토피아를 조금은 기대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7호 2020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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