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이머시브 공연의 득과 실
이머시브 공연 <위대한 개츠비>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이다. 1920년대 개츠비 맨션의 파티장으로 꾸민 공간에서 관객들이 자유로이 움직이며 공연을 관람하고 배우와 상호 작용하는 형식이다. 본지의 뮤지컬 평론가 양성 프로그램 ‘더뮤지컬 리뷰어’ 출신 다섯 명이 공연을 관람한 뒤 이야기를 나누었다.
*_자유로운 대화를 위해 참여자 이름은 뮤지컬 캐릭터명으로 기재했으며, 리뷰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색다른 체험의 장
스위니_ 파티장에 총 6개의 스몰룸이 있다고 하는데 각자 어떤 방에 들어가 봤어?
클레어_ 나랑 레베카, 히카루는 불법 스포츠 도박에 대해 설명하는 방 하나만 들어갔어. 거기서 개츠비가 도박과 밀주로 돈을 벌었다는 걸 알 수 있었지. 개츠비의 오른팔인 로지가 명함을 나눠주면서 파티 중에 그 명함을 슬쩍 보여주면 어디에 배팅해야 할지 알려주겠다고 했어. 실제로 명함을 건네니까 전화번호를 알려주더라고. 공연이 끝나고 전화를 걸어 보니 뜻밖의 후일담을 들을 수 있었어.
스위니_ 나는 톰과 머틀의 불륜 현장을 목격했어. 머틀의 친구가 되어 깜짝 등장을 도와주고, 닉이 조던에게 어떻게 데이트 신청을 하면 좋을지도 알려줬지. 또 차 사고가 벌어진 뒤에 스몰룸에서 개츠비가 털어놓는 사건의 진상을 들었어. 어쩌다 보니 계속 닉과 함께 움직였는데, 그래서인지 원작 소설과 비슷한 흐름을 따라간 것 같아.
롤라_ 내가 가장 많은 방에 들어간 것 같네. 나는 개츠비가 데이지에게 옷을 선물하는 방, 머틀과 조지가 부부 싸움을 하는 방, 차 사고 이후 톰과 데이지가 대화를 나누는 방에 들어갔어. 그 안에서 옷을 갈아입는 데이지와 짐을 꾸리는 머틀을 도왔지. 파티장 메인홀에서 개츠비가 데이지와의 티타임을 준비할 때 상 차리는 걸 거들기도 했고.
스위니_ 이렇게 여러 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사건이 벌어지는데 극의 흐름이 꼬이지 않고 연결된다는 게 놀라워. 관객들도 완전히 즐길 준비를 하고 오는 분위기야. 배우들이 뭘 시키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더라고.
클레어_ 다들 진짜 파티에 참석하듯 사전에 명시된 드레스 코드에 맞게 옷을 입고 왔던데. 완벽하게 1920년대 풍으로 차려입은 사람도 눈에 띄었어. 드레스 코드가 공연 관람에 제약이 되기는커녕 관객에게 어필하는 또 다른 재미 요소로 작용하고 있어.
롤라_ 내가 공연을 본 날은 춤을 잘 추는 관객이 많았어. 인터미션 때 남녀 관객이 함께 찰스턴을 춰서 환호를 받았지. 나중에는 관객들끼리 댄스 배틀이 벌어졌다니까. 뮤지컬이나 연극을 즐기던 관객들과는 또 다른 새로운 관객층이 형성된 것 같아.
혼란 속의 파티
레베카_ 색다르고 재미있는 체험이었지만 한 편의 공연으로 즐기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었어. 장소가 파티장으로 한정되어 있다 보니 행동보다는 대사로 상황을 설명하는 장면이 많은데, 넓은 메인홀에 많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배우 목소리가 잘 안 들려. 또 여러 공간에서 따로따로 극이 진행되기 때문에 원작을 모르면 전체 스토리를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아.
히카루_ 루실 역할 배우가 메인홀을 돌아다니면서 톰이랑 머틀이 바람을 피우는 것 같다느니, 데이지랑 개츠비가 수상하다느니 하는 소문을 흘리고 다니잖아. 그런 단서를 통해 메인홀에 있는 관객도 스몰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어.
레베카_ 그렇지만 배우들이 일부 관객을 데리고 스몰룸에 들어갈 때마다 메인홀에 남겨진 나는 소외감을 느꼈어. 재관람 관객은 언제 어디에 서 있어야 스몰룸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아니까 나 같은 초심자는 더 메인홀을 벗어나기 힘들어.
스위니_ 스몰룸에 있어도 밖에서 소리가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궁금해서 눈앞의 광경에 집중하기 힘들더라. 혹시 이머시브 공연이라는 게 늘 자기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디서 더 즐거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전전긍긍하는 인간을 풍자하기 위한 형식인가? (웃음)
롤라_ 스몰룸에 들어간다고 해서 특정 캐릭터를 더 이해하게 되거나 작품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내가 데이지가 옷 갈아입는 걸 도와줬다고 해서 이 인물과 작품에 대해 더 깊게 알게 된 건 아니거든.
클레어_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일종의 공범자가 된 기분이 들던데. 비밀을 공유한 인물에게 심정적으로 더 동조하게 되더라고. 가까이에서 배우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었어. 나는 개츠비와 데이지가 재회하는 장면을 개츠비 바로 뒤에서 봤거든. 그래서 개츠비와 같은 시점에서 데이지를 볼 수 있었고, 개츠비의 떨리는 호흡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어. 두 배우가 연기를 시작하는 순간 어수선하던 메인홀의 분위기가 확 바뀌는 게 느껴져서 놀라웠지. 물론 그런 집중력을 끌어낼 수 있는 배우와 그렇지 못한 배우의 역량 차가 극명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말이야.
레베카_ 너무 사랑에만 초점이 맞춰진 점은 아쉬워. 원작은 미국적 낙관주의 이면의 허망함, 물질적 풍요 이면의 도덕적 타락을 조명했는데, 겉핥기로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니 상투적인 불륜극처럼 느껴졌어.
클레어_ 이 작품은 관객에게 심오한 메시지를 던지기보다 소설 속 세계를 체험시켜주는 데 목적이 있다고 봐. 방탈출 게임이나 VR 게임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롤라_ <위대한 개츠비>를 매력적인 이머시브 공연으로 만드는 건 그 내용보다는 배경이야. 1920년대 재즈 시대 특유의 파티 문화와 패션, 음악, 춤이 명확한 컨셉이 되어주는 거지. 종래의 연극에서와 같은 감동을 기대하기는 힘들지만, 색다른 즐길 거리를 제공하고 새로운 관객층을 유입시켰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해.
초대받지 못한 손님
스위니_ 그런데 이머시브 공연이라는 형식이 오히려 극 중 상황에 빠져들지 못하게 만드는 순간도 있더라. 예컨대 개츠비와 데이지가 침실에서 키스하는 내밀한 순간을 파티 손님들이 둘러서서 지켜본다는 게 가능해? 개츠비가 데이지 대신 살인 혐의를 뒤집어쓰기로 했다는 얘기를 여러 파티 손님 앞에서 떠벌린다는 게 가능해? 그 상황 자체가 너무 어색해서 몰입이 안 됐어.
롤라_ 나는 각각의 방을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공연을 즐기는 걸 기대했는데 그럴 수 없어서 아쉬웠어. 스몰룸에 일정 인원이 차면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고, 또 배우들의 연기가 끝나면 관객도 바로 나가야 하잖아. 한정된 공간 안에서 많은 관객을 통제하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게 움직임이 통제될 때마다 내가 진짜 파티 손님이 아닌 관객이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어.
스위니_ 동감이야. 수동적으로 감상하던 관객을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존재로 만든다는 게 이머시브 공연의 파격적인 점이잖아. 그런데 여기서는 관객이 어떤 방에 들어갈지를 스스로 선택하기 힘들어. 오히려 배우에 의해 선택당하는 쪽이지. 결국 관객들끼리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제치고 스몰룸에 들어갈 수 있을까 눈치 싸움을 벌이게 돼.
히카루_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이머시브 공연의 대표작 <슬립 노 모어>의 경우, 관객이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5층짜리 건물 안에서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어. 원하는 캐릭터를 따라다녀도 되고, 빈 방에 놓인 소품을 들여다보며 숨겨진 단서를 찾아도 돼. 대사가 없는 넌버벌 공연이라는 점, 관객이 가면을 쓰고 익명의 존재가 된다는 점도
<위대한 개츠비>와는 다른 점이야.
스위니_ 앞으로 국내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이머시브 공연을 볼 수 있겠지. 그렇게 되면 무대 미학이 어떻게 변화할지 궁금하네. 이머시브 공연이라고 하면 추상적인 세트보다는 사실적인 세트를 기대하게 되잖아. 내가 <위대한 개츠비>에서 아쉬웠던 점도 메인홀이 호화 파티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전한 거였거든. 이머시브 공연이 VR이나 AR 같은 첨단 기술과 결합할 때 또 어떤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할지도 궁금해.
히카루_ 이머시브 공연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배우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필요할 것 같아. 현장에서 관객이 농담이랍시고 배우에게 무례한 말을 하는 걸 들었거든. 특히 노출 장면이나 신체 접촉을 노린 성희롱을 예방하기 위한 방침이 필요하다고 봐.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7호 2020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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