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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ULTURE INTERVIEW] <적벽> 박인혜·정지혜​, 고전과 현대의 완벽한 균형 [No.197]

글 |이은경 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표기식 2020-02-10 7,585

<적벽> 박인혜·정지혜

고전과 현대의 완벽한 균형 

 

대륙의 삼국 시대를 호령하던 영웅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소리를 만나 판소리 <적벽가>로 변신했고, <적벽가>는 현대적인 음악과 감각적인 무대와 만나 <적벽>으로 재탄생했다. 판소리 기반의 작품으로는 이례적으로 3년 연속 공연되며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적벽>의 박인혜, 정지혜를 만났다. 


 

이어지는 인연

                    

먼저 <적벽>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는지 궁금해요. 

정지혜_ <적벽>은 중앙대학교의 <적벽에 불 지르다>라는 학교 공연에서 시작됐어요. 2010년에 첫선을 보였는데 그때 장비로 출연한 게 인연이 됐어요. 정말 힘들지만 그만큼 보람도 크고 재미있는 작품이에요. 전통 공연을 하면 선배님들과 작업하게 되는데 <적벽>은 출연 배우들이 젊은 편이라 제가 제일 선배 축에 끼어요. 그런데도 배우는 게 많아요. 초심으로 돌아가는 기분도 들고요. 그 덕에 <적벽>이 정동극장 레퍼토리 공연으로 선정된 2018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참여하고 있어요.

박인혜_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농담이라고 생각했어요. 안무가 많은 작품이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 체력으론 무리라고 생각했거든요. 정중히 거절했는데, 피디님과 연출님이 계속해서 제안하셔서 저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1인극이나 소규모 공연을 주로 했기 때문에 <적벽>처럼 규모가 큰 작품이 약간 낯설고 두려웠어요. 그런데 또 큰 공연 나름의 재미가 있을 것 같고 ‘조조’라는 역할이 탐이 났어요. 조조는 춤을 별로 안 추는 데다 저랑 잘 어울릴 수 있겠다 싶어서 출연을 결심했어요. 
 

두 분은 뮤지컬 <아랑가> 이후 두 번째로 같은 작품을 하게 됐는데 캐스팅되고 연락을 주고받으셨나요?

박인혜_ 제안을 받고 제일 먼저 지혜한테 연락했어요. 출연을 망설이는 중에도 지혜랑 같이하면 서로 의지도 되고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혜한테 <적벽> 제안을 받았는데 고민이 된다고 했더니, ‘정지혜랑 한번 신나게 노시는 거죠’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전 지혜가 당연히 정욱을 할 줄 알았는데, 이번에 정욱이 아닌 도창을 맡게 됐대요. (웃음)

정지혜_ 언니가 <적벽>을 하게 될 줄 전혀 예상을 못 했어요. <적벽>에는 아는 선배님이 없어서 외로웠는데 심적으로 많이 의지가 돼요. 예전에 제가 힘들 때 언니에게 도움을 많이 받은 적이 있거든요. 이번에는 제가 언니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지혜 씨는 계속 정욱을 맡다가 도창을 맡아서 부담이 클 거 같아요.

정지혜_ 굉장히 부담되죠. 제게 잘 맞춰진 정욱이란 옷을 벗고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하니까요. 도창으로서 극을 끌고 가야 하는 것도 도전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제 호흡으로 극을 진행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배우들의 호흡, 극의 흐름을 신경 써야 하니까요. 소리를 할 때도 평소 발성보다 ‘통성(소리를 통째로 토해 내는 발성법)’을 많이 쓰니까 힘도 더 필요하고요. 어렵지만 그만큼 배우는 것도 많아서 이번 공연도 저에겐 소리꾼으로서 성장하는 시간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박인혜_ 도창은 극 중 배우들을 진두지휘하면서 흐름을 잡아주는 역할이라 그 자체만으로도 힘든데, <적벽>의 도창은 특히 어려운 것 같아요. <적벽>이 다른 작품에 비해 극의 에너지나 밀도가 굉장히 높다 보니 그 에너지와 밀도를 유지하면서 혼자 소리를 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지혜도 걱정을 많이 하는데,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서 본 공연도 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 
 

인혜 씨는 소리꾼 안이호 씨와 함께 조조에 더블 캐스팅된 소감이 어떤가요.

박인혜_ 남녀 더블 캐스트라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재미있겠다 싶어요. 저와 달리 이호 선배는 부드러운 사람이라, 성별과 별개로 서로 표현하는 조조가 조금 다를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조조에 맞는 소리를 내기 위해 고민이 많아요. 판소리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내는 소리가 조금 다르거든요. 아무래도 신체적인 차이가 있으니까요. 요즘 이호 선배가 소리를 하는 걸 들으면서 제가 조조를 위해 어떤 소리를 내야 할지 많이 연구 중이에요. 
 

판소리 <적벽가>의 소리는 듣기엔 시원하고 통쾌한데, 소리꾼들에게는 어려운 작품이라고 들었어요. 

박인혜_ 판소리 <적벽가>에는 싸움 장면이 많다 보니까 통성을 많이 쓰고, 음악 자체에 우조가 많아요. 우조는 다른 말로 호령조라고도 하는데 쉽게 말하면 웅장하고, 우렁차고, 호탕한 정서를 담은 곡조에요. 소리를 계속 앞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 데다 그 힘을 끝까지 유지해야 해서 체력적으로 정말 힘들어요. 그리고 한자어가 많아서 소리를 하는 데 까다롭기도 하고요. <적벽>의 배우들은 그 어려운 소리를 하면서 춤까지 추니 정말 대단하죠. 저도 <적벽>에 참여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몸 쓰는 것만큼 소리에도 무척 신경 쓰시더라고요. 이런 부분은 저도 좀 놀랐어요. 


 

새로운 시도로 성장하기                  

 

전통 공연 중에는 <적벽> 같은 규모의 작품이 드물죠?

박인혜_ 전통 예술은 대부분 민간에서 제작 지원을 받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국공립 단체가 아니고서야 이런 규모의 공연이 나오기 힘들죠. 아주 특이하고 성공적인 경우에요. 그런 면에서 정동극장이나 창작진의 의지가 대단한 것 같아요. <적벽>을 통해 일반 관객들이 많이 유입됐다는 것도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죠. 

정지혜_ 보통 판소리처럼 소리꾼이 고수와 함께 나와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배우도 많고 시·청각적으로 화려하니까 관객 입장에서는 낯선 것을 마주하는 데서 오는 짜릿함이 있을 것 같아요. 소리를 더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배우로서 느끼는 매력도 비슷해요. 판소리가 혼자 판을 이끌어가는 즐거움이 있다면 <적벽>은 여럿이 만들어내는 합에서 오는 희열이 있어요. 2명이 되고, 4명이 될 때 그 희열과 에너지가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가 되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적벽>의 팬들이 정말 많다고 들었어요. 기억에 남는 일화나 팬이 있나요? 

정지혜_ 공연이 끝나고 출연 배우들이 콘서트를 함께했는데, 그때 관객 여러분들이 ‘동남풍’을 따라 부르는 거예요. 저는 소리를 떼창으로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터라 깜짝 놀랐어요. 소리를 취미로 삼으신 분들도 많고,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서 교주본(校註本, 판소리 사설에 역주를 단 책)으로 소리 공부를 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소리를 하는 사람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경험이에요. 작품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팬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행복한 일이에요.

박인혜_ 저나 지혜나 <아랑가>를 할 때 뮤지컬 팬덤 문화에 좋은 의미로 충격을 받았어요. 저희도 긴 시간 동안 예술을 했지만 그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적벽>이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는 게 놀라워요. 아마 배우들에게도 신선하고 즐거운 충격일 거라고 생각해요. 젊은 관객들에게 이만큼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판소리 작품이 몇이나 되겠어요. 처음 작품에 참여하는 입장에서는 실수를 하거나 잘 소화하지 못해서 작품에 누가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지만요. 
 

두 분은 오랫동안 전통을 기반으로 한 창작을 많이 하셨죠?

정지혜_ ‘판소리 바닥소리’ 대표로 활동 중이에요. 바닥소리는 각양각색의 소리꾼이 모여서 지금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판소리로 재미있게 하자고 만든 단체예요. 제주 4·3사건이나 해녀들의 독립운동처럼 사람들이 꼭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 판소리로 만들고 있어요. 창단한 지는 19년쯤 됐고, 저는 입단한 지 6~7년 정도 됐어요. 작년에 극단 2기 체제가 출범하면서 단원들 투표로 대표가 되었습니다. (웃음) 또 제가 하고 싶은 공연이 따로 있어서 개인적인 작업도 많이 하고 있어요. 지난해 산울림 소극장에서 <죄와 벌>을 했죠. 

박인혜_ 저는 판소리로 연극을 하겠다는 목표로 만들어진 ‘희비쌍곡선’이라는 단체의 배우이자 음악감독으로 있어요. 희비쌍곡선은 단원이 임영욱 연출님과 저, 이렇게 단 둘뿐이라 동인 개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필경사 바틀비>, <판소리 오셀로> 같은 작품을 했어요. 소리로 극을 하는 대표적인 단체로는 바닥소리, 타루, 입과손 등이 있는데, 연출가가 있는 단체는 저희밖에 없어서 다른 단체의 작품보다 연극성을 더 띠는 편이에요. 그 외 저도 개인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어요.
 

예전과 지금을 비교했을 때, 전통 장르에서 어떤 변화를 느끼나요?

박인혜_ 전통 판소리만 하다 창작을 시작한 지 딱 10년 됐어요. 그땐 판소리로 창작을 하는 사람도 드물었고, 작품 시장도 작았어요. 그런데 10년 만에 창작자나 극 단체가 정말 많이 늘었고, 콘텐츠도 정말 다양해졌어요. <적벽>만 봐도 판소리에 현대 무용이 들어가고 밴드가 들어가잖아요. 전통 예술이 보수적이고 고정된 장르 같지만 사실 다른 장르처럼 많이 변화하고 있다는 걸 몸소 느껴요. 예전에는 판소리를 전공하면 소리꾼으로서 잘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는데, 지금은 소리꾼 말고도 갈 수 있는 길이 많아졌어요. 그 많은 길 위에서 각자의 역할들이 명확해져서 서로 시너지를 내는 것 같아요. 

정지혜_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판소리를 어떻게 대중에게 전달할까’라는 고민을 한 번쯤 할 거예요. 그 질문에 저는 ‘현대적인 말로 쉽게 다가가자’고 답을 냈고, 판소리 같지 않은 판소리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관객들은 오히려 원형의 판소리를 원해요. 그만큼 관객들이 판소리를 받아들이는 수준이나 이해하려는 의지가 훨씬 높아졌어요. 작창할 때도 이제 술수가 안 통하겠다 싶어서 자꾸 기본으로 돌아가게 돼요. 내가 원래 하던 소리를 더 잘하면,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적벽>의 경험이 이후 창작이나 배우로서의 활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정지혜_ 개인적으로 창작 작품을 할수록 완창 판소리를 하고 싶다는 갈망이 커졌어요. 제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건 정형적인 완창 무대였는데, <적벽>을 경험하고 나니까 좀 다른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겠다 싶어요. <적벽>을 통해 사람들이 말이 어려워서 판소리를 멀리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까 좀 재미있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박인혜_ <적벽>을 하고 나면 배우로서 많이 성장할 것 같아요. 전통 공연은 장기 공연을 할 기회가 없어요. 그래서 2018년에 한 달간 공연했던 <판소리 오셀로>의 경험이 정말 특별했고, <아랑가>를 했던 가장 큰 이유도 같은 작품으로 긴 시간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거였어요. 배우는 책임져야 할 무대가 길면 길수록 경험이 쌓이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성장하게 되거든요. 전통 예술 하는 사람들은 죽어라 연습해서 하루 이틀밖에 공연을 못 하니까 많이 아쉽죠. 그래서 이번 <적벽>을 마치고 난 후 제 스스로 얼마나 성장할까 기대하고 있어요. 
 

2020년 <적벽>은 뭐가 달라지나요?

정지혜_ <적벽>은 한 번도 같은 공연을 한 적이 없어요. 연출님도, 배우들도 더 나은 작품을 위해서 끊임없이 연구해요. 매 시즌 배우들의 재능에 따라 장면을 다듬으면서 발전하고 있죠. 올해는 대본도 수정이 되면서 변화가 생겼는데, 아들 아두를 살리기 위해 우물에 뛰어들었던 미 부인의 이야기가 추가됐어요. 미 부인 장면은 <적벽가>의 대표적인 부분이어서 연출님이 몇 년 전부터 장면 추가를 고심하셨어요. 그리고 조조가 또 다른 도창으로 등장했다가 조조 역할을 하고 다시 도창의 역할을 마무리하는 ‘조조놀음’이 추가됐어요. 일종의 판소리식 서사적 거리 두기인데, 조조놀음을 통해를 사건과 인물을 더 입체적으로 그려낼 예정이에요. 
 

<적벽>을 더 즐겁게 즐길 방법이 있을까요?

박인혜_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을 알고 오시면 전반적인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 같아요. 판소리 <적벽가>는 삼국지를 그대로 각색한 게 아니라 우리 시각에서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이에요. <적벽>은 판소리에서 또 색다른 시도를 더해서 탄생했고요. 원작, 판소리, <적벽>이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 알고 보시면 작품이 더 색다르게 보일 거예요. 

정지혜_ 맞아요. 어떤 작품이든 아는 만큼 보이니까요. 근데 저는 그냥 뭔가 에너지를 받고 싶을 때, 꽉 막힌 기분을 개운하게 풀고 싶을 때, 신나게 즐기고 싶을 때 오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적벽>은 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주고받는 에너지가 정말 큰 작품이거든요. 그러니까 좋은 기운, 행복한 에너지를 받고 싶으실 때 <적벽>을 보러 오셨으면 좋겠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6호 2020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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