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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 YORK] <재기드 리틀 필> [No.196]

글 |여지현 뉴욕 통신원 2020-01-28 3,743

<재기드 리틀 필> 

뱉기엔 달고 삼키기에는 쓴 이야기



아슬아슬한 균형이 무너지다

1990년대 한창 유행한 얼터너티브 록 장르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다면 앨라니스 모리셋이란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 동시대 다른 가수들과 비교해 날것의 느낌이 나는 그녀의 음악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1995년에 발매된 앨범 「Jagged Little Pill」은 전 세계적으로 무려 3천만 장 가까이 팔리며 그녀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지난해 11월 브로드웨이에서 정식 개막한 뮤지컬 <재기드 리틀 필>은 앨라니스 모리셋의 노래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최근에 리뷰한 주크박스 뮤지컬 작품들이 가수의 삶을 되돌아보기 위해 노래를 사용한 형식이었다면 <재기드 리틀 필>은 아바의 <맘마미아!>처럼 앨라니스 모리셋의 음악에 맞춰 새롭게 이야기를 썼다.
 

그렇다고 <재기드 리틀 필>이 <맘마미아!>처럼 밝고 즐거운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애초에 앨라니스 모리셋과 아바의 음악은 전혀 다른 분위기지만 말이다. <재기드 리틀 필>은 코네티컷의 부유한 백인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로, 일에 치여 바쁘지만 가족에게 나름 최선을 다하는 아빠 스티브 힐리, 완벽주의자인 엄마 메리 제인 힐리, 고등학교 졸업 후에 바로 하버드 입학이 확정된 아들 닉, 그리고 아기 때 입양된 딸 프랭키가 그 주인공이다. 가족 모두가 백인인 가운데 프랭키는 유일한 흑인으로, 이것은 프랭키가 엄마와 끊임없이 부딪히는 뿌리처럼 작용한다. 진보적인 생각을 지닌 프랭키는 첫 등장부터 여성의 생리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적극적인 행동을 준비한다. 엄마는 그런 프랭키의 행동은 물론 옷 스타일마저도 탐탁지 않아 하며 잔소리를 쏟아내고, 두 사람은 언쟁을 벌인다. 엄마와 딸이 세대 차이를 보이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이들도 표면적으로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 평범한 가정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바쁜 회사 일 때문에 메리 제인과 멀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한 스티브,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신경안정제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메리 제인, 하버드에 들어가긴 했지만 엄마가 주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닉, 백인 가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프랭키까지 이 가족은 어딘가 모르게 아슬아슬한 느낌이다. 
 

어느 순간 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이들의 균형이 결국 무너지는 것은 1막에서 닉과 프랭키가 파티에 참석하면서부터다. 이 파티에서 닉의 오랜 친구인 벨라는 술에 취해 몸을 가눌 수 없는 상태에서 강간을 당한다. 파티가 끝난 다음 날, 윗옷이 올라가 브래지어가 보이는 벨라의 사진이 SNS에 유포된 것을 보고 프랭키가 그녀의 여자친구 조와 함께 벨라를 위로하러 찾아간다. 그리고 벨라를 만나 파티가 일어나던 밤에 대해 이야기를 듣던 프랭키와 조는 사진 유포가 사건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닉의 친구이자 마을 유지의 손자인 앤드루가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던 벨라를 강간했고, 닉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앤드루를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메리 제인이 오랫동안 숨겨왔던 과거의 상처(메리 제인도 대학 시절 벨라와 비슷한 상황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를 들춰내는 기폭제가 된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약해져 있는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든다. 심지어 이미 하버드 합격 통지서를 받아 둔 아들이 이 사건에 엮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메리 제인은 아들의 장래가 망가질까 전전긍긍한다. 이런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프랭키는 이 사건을 공론화하고 닉에게 이 사건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런 상황을 감당하지 못한 메리 제인은 약물 중독으로 병원에 실려 간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그녀는 스티브에게 과거를 털어놓으며 두 사람의 관계를 회복한다. 닉 또한 앤드루가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벨라를 범했다는 증언으로 하버드가 아닌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가고, 프랭키는 엄마와의 갈등을 풀어낸다. 작품은 완벽하지 않기에 오히려 완벽해진 가정의 모습에 모두가 감사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그 외에도 스티브와 메리 제인이 그들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결혼 상담사를 찾는다거나, 프랭키가 여자친구인 조가 아니라 새로 전학 온 피닉스라는 남자아이에게 마음이 끌려 조와 헤어지게 되는 부수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메리 제인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녀의 변화에 영향을 주는 정도에서 그친다. 예를 들어 입양된 프랭키가 중요한 인물처럼 설정됐지만, 실제로 프랭키가 사라져도 극의 전체적인 내용에는 큰 변화가 없다. 



 

1990년대 감성으로 듣는 2019년의 이야기 

<재기드 리틀 필>은 2018년 보스턴의 아메리칸 레퍼토리 시어터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마치고 2019년 11월 브로드웨이에서 오픈했다. <뉴욕 타임스>는 ‘고장 난 주크박스를 고친 뮤지컬’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최근 개막한 다른 주크박스 작품들과 비교하면 <뉴욕 타임스>의 평가가 틀린 말은 아니다. 특히 가수의 일생을 다루기 위해 해당 가수의 음악을 사용한 다른 주크박스 작품과 달리 <재기드 리틀 필>은 음악을 중심으로 미투 운동, 약물 중독, 자아 정체성 등을 소재로 지금 시대에 맞는 이야기를 다룬다. 또 음악의 분위기와 각 노래의 가사가 작품의 흐름을 잘 이끌어간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이야기로, 중년 남성인 스티브가 이십 대 여성의 감성으로 쓴 원곡 가사를 소화하기에는 어려워 보이는 순간도 존재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나 분노, 혼란, 그리고 체념 혹은 옅지만 굳은 희망을 다루는 앨라니스 모리셋의 음악은 극 중 인물들이 경험하는 복잡한 감정의 표현을 도와준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1990년대 감성의 음악을 가지고 2019년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을 통해 앨라니스 모리셋의 음악이 갖는 포용력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음악감독으로 참여한 톰 킷의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정서적으로 불안한 엄마와 그 엄마를 중심으로 가족이 회복하는 내용을 다뤘다는 큰 틀에서 보면 작품은 <넥스트 투 노멀>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래서였을까. <넥스트 투 노멀>에 작곡가로 참여했던 톰 킷이 이 작품의 음악감독을 맡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전반적인 작품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아쉬웠던 점도 존재했다. 작품은 앨라니스 모리셋의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나는 노래 가사를 쪼개고 나눠서 한 명이 아닌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등장인물들이 비슷하게 겪고 있는 어려움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라는 건 알겠지만, 한 곡을 제외한 모든 노래를 이런 형식으로 구성한 것은 앨라니스 모리셋의 노래가 지닌 에너지를 반감시킨다. 


어딘가 산만한 무대 에너지

작품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프랭키의 여자친구인 조 역의 로렌 패튼이었다. <펀 홈>에서 청소년기의 앨리슨을 맡아 본인의 역량을 드러냈던 그녀는 <재기드 리틀 필>에서 적은 비중에도 불구하고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2막에서 자신이 아닌 피닉스를 선택한 프랭키를 향해 외치는 노래 ‘You Oughta Know’는 노래가 끝나자마자 뜨거운 박수가 쏟아질 만큼 흡인력이 있고 파워풀했다. 작품을 통틀어 유일하게 한 캐릭터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다 부르는 곡이라는 점도 로렌 패튼이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데에 한몫을 했을 테지만, 무엇보다도 작은 체구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이 작품의 어떤 누구보다도 강렬하고 매력적인 인물을 만들어냈다. 
 

이 장면과 엄마가 약물 중독이 되어 병원에 실려 가는 장면을 제외하면 다른 장면들은 상대적으로 무난하게, 큰 임팩트를 남기지 않고 흘러간다. 주연 배우의 연기가 부족했던 건 아닌데 왠지 조를 제외한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그다지 흥미롭지 않게 느껴질 때도 있다. 앞서 한 언급처럼 한 곡을 나눠 불러 감정과 에너지가 흐트러진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해 노래를 부르는 앙상블의 존재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연출을 맡은 다이앤 폴루스는 보스턴에 있는 아메리칸 레퍼토리 시어터의 예술감독으로, 그 극장에서 시작해서 브로드웨이에 올라 호평을 받았던 <피핀>이나 <웨이트리스>를 통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재기드 리틀 필>도 이 작품들과 동일한 수순을 밟고 있다. 특히 <피핀>은 그녀의 예술적인 비전과 만나 큰 시너지를 냈다. 실제로 다이앤 폴루스는 서커스를 할 수 있는 배우로 앙상블 팀을 꾸려 산만할 수도 있는 움직임을 조화롭게 잘 정리했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 앙상블은 그녀가 이전 작품에서 보여준 연출과 비교하자면 많이 부족한 느낌이다. <재기드 리틀 필>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은 앙상블 배우들의 구성인데, 코네티컷의 백인 가족 주변에 존재하는 인물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히피 같으면서도 다양한 생김새를 하고 있다. 이토록 개성 강한 앙상블 배우들의 존재가 작품이 지닌 진보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지만 전형적인 백인 여성인 메리 제인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존재감 없이 등장한다는 점이 아쉬웠다. 게다가 대부분의 장면에서 앙상블은 무대 양쪽에 산발적으로 서서 코러스를 함께하는데 이들의 존재 자체가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내지 않았나 싶다. 
 

앙상블의 존재감을 제외하고 보면 다이앤 폴루스의 연출은 <재기드 리틀 필>을 통해 브로드웨이에 첫 이름을 올린 안무가 시디 라비 체라코위의 움직임과 어울려 효과적이었다. 기억에 남는 안무는 프랭키와 스티브가 메리 제인에게 손을 내밀지만 그녀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특히 메리 제인이 요동치는 마음을 붙들지 못하고 약물 중독에 죽을 위기에 처한 장면에서 젊은 메리 제인으로 보이는 댄서가 그녀의 상처를 현대무용으로 표현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담은 아쉬운 작품

뮤지컬 무대에서 현재의 이야기를 담아낸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긴 하다. 작품은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성폭행이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신 사람이 잘못이라는 식의 고루한 남성 중심의 시각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다. 또 그것을 통해 한 개인이 상처를 극복하고 결국 하나의 가정이 회복되는 모습을 어둡지 않게 보여줬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다. 그러나 이런 목표를 위해서 백인 엄마와 아빠, 잘나가는 백인 아들, 그리고 그 가족의 흑인 입양아로 등장인물을 설정한 점은 좀 작위적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예측 가능한 전개와 메리 제인과 프랭키의 관계 회복을 위해 벨라가 당한 끔찍한 범죄를 도구적으로 활용한 점도 아쉬웠다. 프랭키 역시 메리 제인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 역시 백인 주인공을 위해 흑인 조연이 필요한 흔한 구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함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브로드웨이 관객층과 이 작품이 미국 내 투어 공연을 하게 되면 만나게 될 관객이 주로 백인 중산층 가정인 점을 고려하면, <재기드 리틀 필>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가치는 분명하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6호 2020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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