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박정복
낭만적인 환상을 위하여
배우와 관객이 비밀스러운 방에서 함께 춤추고 이야기하는 <위대한 개츠비>. 그동안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이머시브 시어터 장르의 작품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1920년대 미국 상류층의 파티 현장을 담아낸다. 화려한 파티의 주최자이자 한 여인만을 바라보는 로맨티스트 개츠비로 색다른 경험에 도전하는 박정복을 만났다.
도전하는 삶
<위대한 개츠비>는 한국에서 낯선 이머시브 시어터 장르의 공연이에요.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지난해에 세웠던 목표는 되도록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많은 작품을 하는 거였어요. 그래서 다른 시기보다 빡빡하게 공연을 이어갔는데, 연극 <오펀스>를 끝내고 제 자신이 소진된 느낌이 들었어요. 게다가 건강도 무척 안 좋아져서 좀 쉬어볼까 하던 차에 오디션 공고를 보게 된 거죠. 이머시브 시어터라고? 이게 무슨 장르지? 열심히 찾아보고 공부했어요. 대학로에서 오랫동안 공연 중인 <쉬어 매드니스>나 <머더 미스테리>는 본 적이 있는데, <위대한 개츠비>는 또 다른 형식의 작품이었어요. 그런데 오디션 지원 유의 사항에 ‘노래와 춤에 재능이 있는 자’라고 적혀 있는 걸 보고 ‘이건 내가 못 하겠구나!’ 싶었죠. (웃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작사에 전화를 걸어서 ‘지원 자격이 노래, 춤, 연기에 재능이 있는 자인데 혹시 연기에만 재능이 있는 사람은 지원할 수 없나요?’라고 물었더니 일단 지원을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연기에만 재능이 있는 사람의 오디션 현장이 어땠을지 궁금한데요? 집중적으로 노래 레슨도 받고 정말 열심히 연습했어요. 그런데 노래 실력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웃음) 오디션 장에 딱 들어갔는데 김문정 음악감독님이 앉아 계셔서 본능적으로 ‘그냥 돌아가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심지어 제 차례가 되어서 앞으로 나갔는데 첫 음을 못 잡겠더라고요. 제가 어쩔 줄 몰라 하니까 김문정 음악감독님께서 ‘노래방에서 부른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한 곡만 불러봐요’라고 하시더라고요. 노래방에서 부르는 애창곡을 불렀더니 다행히 결과가 좋았죠.
오디션에서 부른 노래는 어떤 곡이었나요. 토이의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이요. 대학생 때 움직임을 열심히 공부해서 춤에 대한 두려움은 없는데 노래는 도무지 친해지지 않더라고요. <위대한 개츠비> 오디션을 보고 나서 제작사에 혹시 노래를 많이 불러야 한다면 참여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작품에 피해가 갈까 봐요. 그런데 개츠비 역할은 네 소절만 부르면 된다고 하기에 그 네 소절만은 꼭 잘 해내겠다고 다짐했죠.
<위대한 개츠비>는 연습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일단 영국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 팀과 소통이 자유롭지 못해 어려웠죠. 이야기를 나누려면 통역을 거쳐야만 하니까요. 의사소통에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아무래도 연습이 다른 작품보다 더디게 진행됐어요. 또 번역 말투의 대본을 보면서 관객이 잘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됐어요. 배우들은 이머시브 시어터이기 때문에 더더욱 대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연출님은 이머시브 시어터라서 대사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거예요. 나중에 관객들을 직접 만나고 나서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됐죠.
어떤 면에서 그렇게 느꼈어요? 이머시브 시어터는 관객이 직접 작품에 참여하면서 내뿜는 에너지가 중요해요. <위대한 개츠비>는 각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시크릿 룸에서 개별적으로 흘러가거든요. 관객들은 모든 캐릭터의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하지만 작품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어요. 연습하면서 이런 장르적 특성을 이해하기 어려웠죠. 또 원작 소설과 다르게 공연은 파티 당일에 벌어지는 이야기에요. 그러다 보니 이야기에 빈틈이 생기는데,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집요하게 크리에이티브 팀에게 물어봤어요. 그런데 이런 고민이 중요하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죠. 결국 연출님이 ‘네가 걱정하는 부분이 뭔지 알아. 그런데 절대로 배우들을 바보로 만들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한 번만 믿어줘’라고 했어요. 그렇게 합을 맞춰가면서 크리에이티브 팀도 우리의 고민을 이해했고, 그다음부터는 연습이 착착 진행됐어요.
새로운 사람들과의 작업에서 깨달은 점은 무엇인가요?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공부를 많이 했어요.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 팀이 저와 비슷한 연령대인데, 어떻게 이렇게 색다른 형식의 공연에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지? 이들은 무엇을 중점으로 생각하지? 이런 궁금증이 많았어요. <위대한 개츠비>는 곧 폐업할 친구의 펍에 놀러 갔다가 고전 문학을 이머시브 시어터로 탄생시킨 작품이거든요. 창작 아이디어도 기발했고요. 작은 극단부터 시작해서 컴퍼니로 성장했고, 심지어는 먼 나라 한국에서도 공연을 올리게 됐잖아요. 생각한 걸 직접 실행에 옮긴다는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 같아요.
로맨티스트의 탄생
<위대한 개츠비>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지난해에 연극 <887>로 내한한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의 인터뷰가 인상에 남았어요. “연극은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경험이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는 게 낫다. 연극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뛰어넘는 공동체의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해야 한다.”정말 맞는 말이죠.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가 어느 정도 새로운 경험을 시도한 것 같아요. 이렇게 직접적인 체험을 지닌 공연이 드물었잖아요. 그리고 관객이 적극적일수록 재미가 커진다는 게 또 다른 매력이에요. 저는 미래에 청소년극 극단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는데, 이번 작품을 통해 이머시브 시어터 형식의 청소년극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예를 들면 이머시브 시어터를 통해 청소년에게 항상 차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고, 성인에게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 지침을 보여주는 교육적 차원의 작품이라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청소년극에 대한 관심이 많은가 봐요. 한국에서 아동극은 상당히 많은데 청소년극은 거의 없어요. 외국에는 정말 좋은 청소년극이 많아요. 전 연극부 친구들이 청소년 연극제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연극에 관심을 가졌어요. 이렇게 성인이 되어서도 공연 문화를 즐기려면 청소년 시기부터 좋은 작품을 잘 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배우들이 일부 관객을 이끌고 비밀스러운 장소로 데리고 갈 때 관객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있을까요? 주변에 있는 관객을 데려갈 확률이 높지 않을까요? 사실 시크릿 룸에 한번 방문하고 나면 거기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알게 될 거라, 공연 전에는 재관람하는 관객분들이 지루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메인 홀에 있는 몇몇 캐릭터들이 관객들을 잘 섞어주더라고요. 그리고 저희 공연을 한번 보시면 다른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다른 이야기를 보러 오시게 될 거예요.
게다가 이 작품은 배우들과 함께 춤도 춰야 하고 드레스 코드도 있다고요.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관객의 적극성인데, 드레스 코드에 맞게 옷을 입고 온다면 개츠비의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으로서 작품에 더 깊게 빠져들어 갈 수 있어요. 물론 적극적이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만약 배우들의 제안이 내키지 않으신다면 거절하세요. 메인홀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이 작품을 즐기실 수 있거든요.
작품 속에서 개츠비는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나요. 개츠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가 꿈꾸는 것은 과거에 이루지 못한 사랑이고, 이런 면에서 봤을 때 그는 로맨티스트이자 야망이 넘치는 인물이죠. 개츠비가 화려하고 성대한 파티를 개최하는 이유는 해협 건너편에 사는 데이지 때문인데, 그녀가 이 파티를 궁금해하고 참석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에요. 그래서 전 개츠비의 순애보적인 사랑도 보여주고 싶고, 성대한 파티를 개최하는 주최자로서의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어요.
시크릿 룸에서의 시간 약속도 정해져 있는 거죠? 맞아요. 시크릿 룸 장면은 정해진 시간이 있지만, 그게 설사 꼬이더라도 괜찮아요. 이런 가정을 세워볼까요. 시크릿 룸에서의 장면이 끝나고 개츠비가 다시 메인홀로 돌아가려고 할 때, 다른 시크릿 룸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면? 지금 개츠비는 데이지를 만나면 안 되는데 그녀를 만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런데 개츠비가 자신의 집을 마음대로 다니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럼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장면을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이런 상황이 놓일 때마다 준비된 이야기가 있어요. 시크릿 룸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조금 더 알려드린다면 배우가 관객에게 직접 질문을 하거든요. 관객의 대답을 예상할 수 없지만, 관객에게 건네는 마지막 대사는 정해져 있어요. 예를 들면 개츠비의 시크릿 룸 장면에서 마지막 대사는 ‘그럼 제가 원하는 집을 백 채 정도 살 수 있는 돈을 안겨드릴게요. 그러니 제 말을 잘 들어주세요’라고 정해진 거죠. 이 대사로 장면을 마무리하기 위해 관객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정말 여러 가지에요. 워낙 많은 노하우가 쌓인 작품이라 여러 상황에 적절한 대본이 다 준비되어 있어요.
배우에게 순간적인 판단 능력이 중요하겠네요. 평소에 애드리브를 좋아하지 않는 배우라고 알고 있는데요. 맞아요. 그래서 제 팬들이 이 작품의 출연 소식을 듣고 정말 놀라더라고요. 지난해의 도전 중에 가장 재미있게 생각한 작품이 바로 <위대한 개츠비>였는데, 작품 속에서 제가 지닌 순발력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어요. 전 애드리브를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아요. 연출님은 제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완벽하게 개츠비가 되어서 관객과 이야기를 하면 걱정하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작품은 텍스트에 있는 상황을 고민하고, 어떤 감정이 나올 수 있는지 고민했다면 <위대한 개츠비>는 인물의 삶 자체를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개츠비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훨씬 넓은 생각을 하게 되니 재미있고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죠.
2020년 새해가 밝았는데, 올해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많은 도전을 해보고 싶어요. 아직 어리니까 나이가 더 들기 전에 여러 시도를 하고 싶거든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좀 더 실력을 다지고 싶기도 하고요. 작년에 연극 <알앤제이>에서 고등학생 역할을 했던 것도 ‘내가 또 언제 고등학생을 해보겠어’라는 생각으로 한 거예요. 하하. 새해에도 정말 열심히 살아볼 계획이에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6호 2020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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