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판 사나이>
이상한 나라의 알앤디웍스
제작사 알앤디웍스의 창작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가 지난해 11월 막을 올렸다. 1814년 출간된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악마에게 그림자를 판 페터 슐레밀이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본지의 뮤지컬 평론가 양성 프로그램 ‘더뮤지컬 리뷰어’ 출신 세 명이 공연을 관람한 뒤 이야기를 나누었다.
* 자유로운 대화를 위해 참여자 이름은 뮤지컬 캐릭터명으로 기재했으며, 리뷰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작과 달라진 뮤지컬
스위니_ 뮤지컬을 보니 원작 소설과 달라진 점이 눈에 띄었어. 가장 큰 변화는 악마 그레이맨과 페터의 하인 벤델이 동일 인물로 바뀌었다는 거야.
라피키_ 그레이맨 역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설정 아닐까. 두 역할을 하나로 합치면서 그레이맨의 비중이 커지고 1인2역 연기를 선보일 수 있게 됐잖아.
스위니_ 등장인물 수를 줄이고 긴장감을 더하기에 괜찮은 전략이었다고 봐. 하지만 악마와 1인2역이라는 설정이 새롭게 다가오기보다는 알앤디웍스의 전작 <더데빌>을 답습한 느낌이야.
라피키_ 페터와 리나의 사랑 이야기도 원작과는 달라졌어. 원작에서 리나는 페터가 우연히 만난 마을 아가씨였는데 뮤지컬에서는 과거에 헤어진 연인으로 등장하잖아.
스위니_ 리나가 한번 자신을 떠났던 연인을 또다시 지고지순하게 기다리고, 결국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도록 이야기를 풀어나간 게 너무 고리타분하게 느껴져.
롤라_ 리나가 페터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걸 관객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두 사람의 과거사가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아.
라피키_ 남성 주인공의 각성을 위해 여성을 희생시키는 건 남성 중심 서사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야. 원작은 페터가 마법의 새집과 장화 등을 손에 넣으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곁들여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그려. 그런데 뮤지컬은 이 과정을 생략한 채 페터를 각성시키고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리나의 죽음을 이용했어.
스위니_ 결말도 원작과는 미묘하게 달라. 원작에서 페터는 사회에서 추방당한 대신 마법의 장화를 신고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자연을 연구해. 반면 뮤지컬은 페터가 미로를 빠져나온 뒤 맨발로 숲길을 걷는 장면으로 끝나. 어떤 관객은 이 장면이 페터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더라.
롤라_ 실제 죽음이든 사회적 죽음이든, 맨발이 페터가 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걸 보여주는 장치인 건 분명해 보여. 영화 <조커>는 조커가 자신을 사회에 끼워 맞추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회 질서를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걸 맨발이 되는 모습으로 표현했는데, 이 작품에서의 맨발도 비슷한 상징성을 지닌 것 같아.
그림자가 의미하는 것
스위니_ 문제는 이런 각색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모르겠다는 거야. 처음에는 물질주의를 비판하는 건가 싶었어. 부자들의 세계를 트로트풍 노래로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반면, 그 세계를 낯설어하는 페터의 그림자는 우아한 춤사위로 표현했잖아. 그레이맨은 ‘어떻게 이렇게 고귀하고 순결한 그림자를 인간이 가질 수 있느냐’고 노래하기까지 해. 이걸 보면 그림자는 페터가 물질에 눈먼 속물들과 구별되는 고결한 인물임을 상징하는 무언가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그림자를 팔고 부자가 된 페터는 사회에서 환영받기는커녕 추방당한단 말이지. 그럼 대체 이 그림자가 의미하는 바는 뭐지?
라피키_ 원작도 그림자를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 꼭 필요한 무언가로만 설명할 뿐 그 의미를 콕 집어 정의하지는 않아.
스위니_ 하지만 각색된 이야기에서는 창작자가 원작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았는지가 일관되게 드러나야 하는 게 아닐까? 정영 작가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거나 폄하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했어.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소외된 타자의 이야기였다면 뮤지컬은 페터를 추방한 사람들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그려야 해. 그런데 이 작품에서 그레이맨은 자꾸만 페터에게 이 모든 상황은 네가 선택한 거라고 말하잖아. 마치 잘못이 악마나 사회가 아닌 페터에게 있는 것처럼.
라피키_ 페터는 그림자와 돈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돈을 선택했다기보다 악마에게 어리숙하게 속아 넘어간 것에 가까워. 게다가 곧바로 후회하고 실수를 바로잡으려 애쓰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더데빌>처럼 선악의 기로에 선 인간의 선택에 방점을 찍는 건 작품의 핀트가 어긋난 거지.
스위니_ <더데빌>과 <그림자를 판 사나이> 모두 매력적인 악마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 치중할 뿐 정작 악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이끌어내지는 못해.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어. 홀로코스트 같은 악행은 특별히 악마적인 사람이 아니라 비판적 사유 없이 사회 흐름에 순응하는 보통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는 거야. 만약 이 뮤지컬이 정말로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악마의 존재감이 지금처럼 비대해질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진짜 악은 타자를 배척하는 공동체의 태도라는 걸 부각시켜야 하지 않을까?
화려하지만 산만한 쇼
라피키_ 뮤지컬 창작진은 서사보다 음악과 춤이 주가 되는 뮤지컬을 만들고 싶었다고 해. 이야기가 단순한 만큼 예술적 퍼포먼스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되길 바랐다는 거야. 하지만 단순하다기엔 은유적인 표현이 많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라 퍼포먼스에만 집중하기 힘들어. 안무 자체도 시선을 끌 만큼 독특하지 않았어. 움직임이 빠름과 느림 사이를 적절히 오가는 게 아니라 무조건 빠르기만 하니까 감흥이 없어.
스위니_ 그래도 그림자를 안무로 표현한다는 아이디어는 좋았어. 다만 그림자를 무용수로 표현해 놓고 왜 그레이맨에게 구태여 천으로 만든 그림자를 다시 들게 하는지 모르겠어. 퍼포먼스 중심의 극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창작진도 이러한 컨셉을 강력히 밀어붙이지 못한 느낌이야.
롤라_ 음악도 아쉬워. 뮤지컬 음악은 이야기 전개와 잘 맞물려야 하는데, 이 작품은 모든 곡이 쇼스타퍼야. 감정이 점점 쌓여서 고양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으로 질주하는 느낌이랄까.
스위니_ 그렇지만 무대 미술만큼은 색다르고 멋지다는 반응이 많던데.
롤라_ 페터가 미로 형태의 세트로 걸어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걸로 처음과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 게 인상 깊었어.
라피키_ 무대 층고를 잘 활용한 세트를 좀처럼 만나기 힘든데, 천장에서 미로 형태의 구조물이 내려오니까 신선했어. 하지만 LED 영상은 화려하기만 할 뿐 어떤 기능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 그레이맨의 손이 지나가거나 배경이 찢겨 나가는 등 의미심장한 장면이 자꾸 등장하는데, 그쪽에 시선을 빼앗겨서 정작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할 수가 없더라. 환상적인 이야기라고 해서 마그리트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화가의 작품으로 배경 영상을 도배한 게 오히려 연극적 상상력을 제한해.
롤라_ 이 이야기의 배경 자체가 그렇게 초현실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나? 그레이맨만 초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계 전체가 초현실적이니까 페터의 고뇌도 현실감 있게 다가오질 않아. 그렇지만 아이디어가 빛나는 장면도 있었어. 우산을 쓴 페터의 움직임에 맞춰 허공에 우산 그림자만 동동 떠가게 한 영상은 그림자의 부재를 효과적으로 보여주잖아. 이렇게 꼭 필요한 장면에서만 영상이 포인트로 쓰인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임팩트가 있을 거야.
스위니_ 계속해서 뭔가 색다른 뮤지컬을 내놓으려는 알앤디웍스의 의지는 알겠어. 하지만 음악, 안무, 무대 영상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까지 무엇 하나 서로 양보하는 것 없이 요란하니까 산만하게 느껴져. 허술한 서사를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초현실적 캐릭터, 두 남성의 애증 어린 관계, 1인2역 등 유행 코드로 메우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알앤디웍스의 전작이나 여타 창작뮤지컬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알앤디웍스가 다음에는 정말로 우리에게 기분 좋은 놀라움을 선사하는 작품을 들고 와주길 바라.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6호 2020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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