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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영웅본색>,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웅들 [No.196]

글 |김주연 공연 칼럼니스트 2020-01-10 5,093

<영웅본색>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웅들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은 단순히 성공한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는 하나의 전설에 가까운 작품이다. 이 영화로 인해 누아르 액션이란 새로운 장르가 시작되었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 비슷한 풍의 영화들 덕분에 ‘홍콩영화’ 하면 떠오르는 하나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탄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는 주윤발과 장국영이라는, 이후 수십 년간 홍콩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어갈 독보적인 배우들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홍콩영화의 인기와 대중적 영향력은 할리우드 영화에 못지않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홍콩영화들이 영화관과 TV를 통해 소개되고, 이들 영화를 패러디한 장면들이 개그와 코미디 프로그램에 단골로 등장할 정도로 홍콩영화의 영향력이 막대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주윤발, 유덕화, 장국영, 임청하, 왕조현 등 당대의 홍콩 스타들이 돌아가며 내한해 유명 CF를 찍기도 했다. 

인기만큼이나 다양한 스타일의 홍콩영화들이 극장가를 장식했는데, 특히 <천녀유혼>, <동방불패> 유의 무협물이나 <도성>, <도신> 등 도박을 소재로 한 주성치의 코믹물, 그리고 고독한 킬러들의 어둡고 화려한 세계를 그린 소위 누아르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역시 자욱한 담배 연기를 배경으로 하는 고독한 킬러들의 세계, 화려한 홍콩 뒷골목에서 펼쳐지는 의리와 배신의 드라마라 할 수 있는 누아르 영화라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홍콩 누아르 전성기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 1986년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이다.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다 

<영웅본색>은 형제애와 우정, 의리와 배신에 관한 매우 단순하고 명쾌한 영화다. 홍콩을 중심으로 위조지폐를 찍어내는 갱단의 핵심 멤버였던 송자호와 그의 절친 마크, 그리고 형의 정체를 모른 채 정의로운 경찰관이 되고 싶어 하는 동생 송자걸이 등장해 앞으로의 갈등을 암시하는 한편, 자호의 부하였다가 그를 배신하고 조직을 장악하는 아성이 또 다른 갈등의 축을 맡는다. 부하의 배신으로 경찰에 잡힌 자호는 동생에게 떳떳한 형이 되기 위해 출옥 후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지만, 여전히 그를 필요로 하는 조직은 동생을 빌미로 자호를 협박하며 다시금 위조지폐 사업을 확장하려 든다. 

자랑스러웠던 형이 암흑 조직의 핵심 멤버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자걸은 형을 원망하고 미워하며 다시는 보려 하지 않지만, 요주의 인물인 아성에게 접근하면서 형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자호와 자걸은 서로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이지만, 이들을 철저히 이용하려 드는 범죄 조직의 음모가 밝혀지는 가운데 한편이 되어 마지막 사투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이때, 위험에 빠진 이들 형제를 돕기 위해 멀리서 달려온 마크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배신과 의리, 형제애와 우정이란 주제가 극명한 대비 속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주윤발의 멋짐으로 완성된 스타일 

사실 스토리상으로나 의미상으로나 <영웅본색>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은 형 송자호이고, 드라마 역시 후반부로 갈수록 송자호와 송자걸 형제의 갈등과 대립에 초점을 맞추며 펼쳐진다. 그러나 개봉 당시에나 지금이나 <영웅본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성냥개비를 질겅질겅 씹으며 호기롭게 위조지폐로 담뱃불을 붙이던 그 남자, 검정 선글라스와 긴 코트 깃을 휘날리며 쌍권총을 뿜어대던 바로 그 남자, ‘마크’다.

드라마적으로 그다지 큰 비중이 없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마크가 <영웅본색>을 대표하는 얼굴이 될 수 있었던 데는 마크 역을 맡은 배우 주윤발의 공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마크 캐릭터는 연기뿐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도 신의가 두텁기로 소문난 주윤발의 개성과 열연에 힘입어 전설적인 인물로 완성되었다. 특히 감옥에 간 친구 송자호의 복수를 위해 혈혈단신 식당에 들어가 어마어마한 쌍권총 신공을 선보이는 풍림각(楓林閣) 장면이나 위험에 빠진 자걸 형제를 돕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 채 보트를 되돌리며 기관총 세례를 퍼붓는 마지막 신은 그야말로 주윤발이란 배우의 멋과 매력이 폭발하는 명장면들이라 할 수 있다. 적들의 수많은 총알에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360도 앞구르기를 하면서 총을 쏴도 백발백중 적들을 쓰러뜨리는 비현실적인 설정마저 멋짐으로 승화시키는 주윤발의 힘은 가히 놀라울 정도다. 



 

오로지 한 장면으로 전설이 된 영화 

<영웅본색>의 대성공에 힘입어 오우삼 감독은 이듬해인 1987년,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영웅본색2>를 선보인다. 속편 역시 송자호와 송자걸 형제, 그리고 범죄 조직의 갈등을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1편에 비해 송자걸의 활약과 비중이 훨씬 도드라진다. 1편에서 이미 죽은 마크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오우삼은 마크의 쌍둥이 동생이 뉴욕에 살아 있었다는 다소 진부한 설정을 가져오는데, 덕분에 뉴욕과 브루클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스펙터클한 총격전이 볼거리를 선사하지만 전체적인 스토리나 캐릭터 구축에 실패해 ‘전작만 한 속편은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여러모로 원작에 비해 부족한 작품이지만, <영웅본색2>는 오로지 한 장면만으로 원작에 묻히지 않고 꿋꿋이 살아남아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전설로 회자될 수 있었다. 바로 총을 맞고 죽어가는 송자걸이 막 자신의 아이를 출산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공중전화 박스’ 장면이다. <영웅본색2>의 메인 테마곡이라 할 수 있는 ‘분향미래일자(奔向未來日子)’가 애절하게 흐르는 가운데, 피투성이가 된 송자걸이 전화박스 안에 쓰러진 채로 자신의 아내와 딸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장면은 장국영 특유의 애틋하고 안쓰러운 눈빛 연기와 어우러져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순간을 빚어낸다. <영웅본색>의 멋과 분위기를 주윤발이 이끌었다면, 속편의 드라마와 감정선은 오롯이 장국영에 의해 완성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폭발적인 인기 속에 홍콩 누아르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영웅본색> 시리즈는 제작자였던 서극이 메가폰을 잡고 새롭게 선보인 <영웅본색3>과 2018년 <영웅본색> 탄생 30주년을 기념해 중국의 신세대 배우들과 함께 리메이크한 <영웅본색4> 등 꾸준히 명맥을 이어갔다. 또한 원작의 아류라 할 수 있는 수많은 범죄 영화들이 끝없이 만들어지며 누아르 영화 장르를 발전시켜 나갔지만, 원작의 힘과 명성에 비길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 이후 주윤발과 장국영은 배우로서 전성기를 맞이하며 수십 년간 홍콩영화의 전성기를 이끌게 되는데, 이 대체 불가능한 매력을 지닌 독보적인 두 배우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영웅본색> 시리즈의 미덕과 의의는 작지 않다 할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6호 2020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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