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스타일 러브 수프림>
즉흥과 힙합, 그리고 브로드웨이의 만남
궁금증을 자아내는 모호한 제목
<프리스타일 러브 수프림>이라는 다소 모호한 제목은 여느 브로드웨이 작품과는 다른 확실히 특별한 느낌을 풍긴다. 보통 제목을 통해서 스토리나 방향을 조금이나마 예상할 수 있는 여타의 작품과는 다르게, ‘사랑’과 ‘최상급’을 뜻하는 단어로 대놓고 ‘힙’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두루뭉술한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예상하기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프리스타일 러브 수프림>은 뉴욕을 베이스로 삼아 프리스타일 랩을 가르쳐주는 교육 프로그램 이름이자 그 교육 과정을 진행하는 그룹의 이름이다. 다시 말해, 작품은 한 시간이 조금 안 되는 동안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프리스타일 랩을 통해 관객들과 소통하는 즉흥극에 가깝다. 작품 특성상 공연 내용이 매일 달라지기 때문에, 쉽게 예상이 불가한 제목을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브로드웨이에 어울리지 않는 즉흥극의 탄생을 설명하자면 프리스타일 러브 수프림이라는 그룹을 처음 만든 멤버 중 한 명이자 공연의 메인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가 린-마누엘 미란다라는 점을 짚어야 한다. 그는 <인 더 하이츠>와 <해밀턴>으로 잘 알려진 인물로, 2003년 <해밀턴>의 연출가 토마스 카일과 앤서니 베네지알레와 함께 그룹 프리스타일 러브 수프림을 결성하고 틈틈이 공연을 지속해 왔다. 그리고 지난봄 뉴욕 다운타운에서 짧은 공연을 진행하며 프리스타일 랩을 가르치는 교육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얼마나 많은 학생이 거쳐 갔는지 알 수 없지만, 해당 아카데미 출신인 아니사 폴즈(A.K.A Young Nees)는 작품에 정규 멤버 중 한 명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도 지원자를 받고 있고 웹사이트와 공연을 통해서 아카데미를 계속해서 홍보하는 걸 보면, 이 공연으로 힙합과 프리스타일 랩 아카데미를 홍보하고자 하는 의도도 언뜻 보인다.
브로드웨이 작품답지 않은 브로드웨이 공연
창작진과 제작진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브로드웨이에서 <프리스타일 러브 수프림>의 존재는 이번 시즌 브로드웨이의 다양성을 높여주고 있다. 극장에 들어서면 공연장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힙합은 관객의 흥을 돋운다. 또 무대 상수 가장자리에 놓인 의자 몇 개와 그 반대쪽에 놓인 키보드 두 대만 보면 브로드웨이보다는 다운타운 어느 펍의 작은 무대가 연상된다. 공연은 어두운 상태에서 백스테이지에 있는 래퍼들이 사운드 체크를 하는 소리로 시작하는데, 공연이 시작하기 전부터 관객들의 호응이 나쁘지 않아서 마이크 체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환호가 시작된다. 이렇게 공연의 시작부터 관객과 배우의 호응도 역시 브로드웨이의 공연이라고 하기보다는 작은 펍이나 시 낭송 카페에서 벌어지는 이벤트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도와준다.
무대에 조명이 켜지고 래퍼들이 자리를 잡으면 진행을 맡은 래퍼가 관객을 환영하며 공연 컨셉을 설명해 준다. 필자가 관람한 날에는 앤드루 밴크로프트(A.K.A Jelly Donut)가 그 역할을 맡았다. 이 공연은 매번 관객들과 함께 만드는 공연이기 때문에 관객 참여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전한 다음, 이제 제대로 마이크 체크를 해야 하니 생각나는 동사를 하나 말해 달라고 한다. 객석에서 다양한 단어가 들리면 그중에서 한 래퍼가 가장 맘에 드는 단어를 골라 연상되는 내용으로 네 명의 래퍼가 프리스타일 랩을 하며 체크를 마친다. 뜨거운 호응과 함께 첫 섹션이 끝나고 나면 밴크로프트가 공연이 진행되는 부스 극장에 대한 역사를 설명해 준다. 그리고 프리스타일 랩 공연에서 꼭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멜로디와 비트라고 말하면서 비트박스 담당인 크리스 설리번(A.K.A Shockwave)을 무대 앞으로 부른다. 그가 나와서 디제이 혹은 비트박스 로봇인 것처럼 비트를 풀어내려다가 갑자기 고장이 난 연기를 하면 케일라 물레디(A.K.A Kaiser Roze)가 등장한다. 케일라 물레디는 설리번이 연기하는 로봇을 수리하고, 두 사람은 함께 비트박스를 하면서 두 번째 섹션을 마무리 짓는다. 세 번째 섹션에서는 관객이 공연 시작 전에 미리 종이쪽지에 적어서 항아리 안에 넣어둔 단어를 무작위로 뽑는다. 그리고 그 단어를 사용해서 점점 빨라지는 비트에 맞춰서 프리스타일 랩을 한다. 모든 공연에 스페셜 게스트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가 본 공연에서는 웨인 브레이디(즉흥 프리스타일 섹션이 포함된 TV 프로그램인
즉흥극이 지닌 매력
즉흥극의 가장 큰 장점은 공연이 진행되면서 관객과 배우 사이에 알게 모르게 유대 관계와 친밀감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공연은 여러 가지 질문을 통해 관객에게 굉장히 개인적이고 지극히 사적일 수 있는 경험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즉흥극의 특징을 극대화한다. 매일 밤 달라지는 공연이니 관객의 호응에 따라서 분위기와 내용이 매우 다르겠지만, 필자가 갔던 밤에는 가족과 함께 온 십 대로 보이는 한 관객이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해서 객석 분위기를 들었다 놓기도 했다. 게다가 래퍼들 역시 관객만큼이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예를 들어 관객들에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채택된 대답이 ‘미국에 처음 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각 래퍼가 이민자였던 자신의 부모님이나 조부모, 혹은 자신이 공항에서 겪었던 일들을 랩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그들의 개인적인 경험은 일시적이지만 관객과 배우들 사이에 즉각적인 공동체로 형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스페셜 게스트인 웨인 브레이디를 포함해서 5명이었던 래퍼 중에 특히 눈길을 끌었던 래퍼는 웃카시 암부드카(A.K.A UTK)라는 인도계 미국인 래퍼였다. 그는 힙합이나 랩을 아주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플로우나 구성, 라임에서 다른 래퍼들보다 훨씬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기술적인 특징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점은 장난스러움과 진중함을 효과적으로 넘나들며 랩을 즐기는 그의 태도였다. 미국에 와서 박사 학위까지 획득했지만 가난한 살림에 어렵게 생활을 꾸렸던 부모님의 사연을 진솔한 랩으로 풀어내는 그의 모습은 한 관객이 5학년 때 히브리어 수업 시간에 선생님에게 대들었던 에피소드를 코믹한 랩으로 풀어내는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과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었다.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무대 위에서 공연하던 래퍼 중에 암부드카의 존재감이 가장 컸던 것도 그들이 풀어놓는 랩의 내러티브의 일관성이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대에 갇힌 프리스타일
그러나 즉흥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브로드웨이의 공연이라고 하기에 빈약한 내러티브가 아쉬웠다. 내러티브를 보강하기 위한 장치로 넣은 것이 관객의 하루에 관한 질문이고, 그 응답을 통해 관객들은 공연의 마지막에 보고 듣는 것이 시작할 때 들었던 마이크 체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 작품이 굳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됐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특히 프리스타일 랩과 래퍼, 그리고 관객을 전통적인 공연장 세팅에 올려놓는 것으로 힙합, 그중에서도 특히 프리스타일 랩이라는 장르적 특징이 옅어진 것 같아 아쉬웠다. 1990년대 길에서 벌어졌던 랩 배틀부터 파생되어 나온 프리스타일이라는 장르가 지닌 사회적·문화적 의미와 에너지가 브로드웨이의 극장이 주는 사회 문화적인 한계점에 갇힌 느낌이었다. 힙합을 하나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프리스타일 러브 수프림>에서 보이는 힙합은 기술적으로나 의미로 볼 때 또 다른 장르의 힙합을 만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분명히 기존의 프리스타일 랩과는 다른 브로드웨이의 관객을 노리고 만든 작품이니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도 썼듯이 린-마누엘 미란다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의 앞선 성공이 없었더라면 이 공연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어찌 됐든 이 작품을 통해 프리스타일을 브로드웨이에 정착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면, 이런 방식을 통해서 확장되는 프리스타일은 그 뿌리와는 또 다른 색깔을 지니게 될 것은 꽤 분명해 보였다.
브로드웨이의 힙합 콘서트
그렇지만 어떤 색깔이 더 우월하다고 평가를 내리거나 공연이 지닌 의미를 퇴색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관객이 즐거워했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브로드웨이에서 프리스타일 형식의 공연을 보여준다는 것은 나름 그 자체로 꽤 의미 있는 일이니까. 공연이 시작할 때, 처음 보러 온 관객과 다시 보러 온 관객에게 손을 들어 보라고 하는데 객석에 앉아 있는 인원 중의 20% 정도가 재관람 관객이었던 것을 보면 다시 극장을 찾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 같다. 프리스타일 랩을 좋아하고, 이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의 합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매일 밤 얼마나 내용이 달라지는지 궁금할 것이다.
물론, 한 시간 반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100달러 가까운 돈을 내고 여러 소재를 다룬 프리스타일 랩을 듣는 건 그 자체로 매력적이지 않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솔직히 고백하면 필자 또한 40분 정도는 공연에 매료됐지만, 이후부터는 시계에 자꾸 눈이 갔다. 확실히 이 작품은 <해밀턴>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자 하는 작품도 절대 아니다. 그러나 브로드웨이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프리스타일 러브 수프림>의 의미는 바로 이런 지점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비록 전통적인 뮤지컬과 연극이 아니라 콘서트나 이벤트 같은 형식이지만 브로드웨이라는 공간에 새로운 표현 방식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고, 그렇게 브로드웨이의 관객층을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4호 2019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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