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판 사나이』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는 독일 문학에서 흔히 발견되는, 악마와 모종의 거래를 한 인간이 등장한다. 화수분처럼 금화가 샘솟는 마법 자루 대신 자신의 그림자를 판 슐레밀, 그가 악마에게 팔아넘긴 그림자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악마와의 계약 그 자체가 아니라, 상실 이후의 깨달음에 초점을 두고 있는 이 작품은 ‘그림자’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다양하게 열어둠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우리가 잃어버린 뒤 비로소 깨닫게 되는 가치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두 개의 세계에 걸쳐 있는 작가
독일 문학에서는 유난히 악마(혹은 신비하고 비현실적인 존재)와 모종의 계약을 맺는 인간 형상이 자주 등장한다. 메피스토펠레스로부터 영원한 젊음과 쾌락을 제공받는 대신 영혼을 담보로 맡긴 괴테의 『파우스트』, 에른스트 호프만의 『악마의 묘약』에서 악마의 묘약을 마신 뒤 세속적 욕망에 영혼을 빼앗긴 수도사 메다르두스,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회색 신사들의 숫자놀음에 넘어가 시간을 저당 잡히는 사람들, 제임스 크뤼스의 『꼬마 백만장자 팀 탈러』에서 악마에게 웃음을 팔고 내기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꼬마 팀 등 독일 문학에서 이러한 인물형은 수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악마(또는 비슷한 존재)로부터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능력을 제공받고, 대신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어떤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또한 잃어버린 뒤에야 자신이 잃어버린 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이를 되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원제는 페터 슐레밀의 환상적인 이야기) 역시 유사한 유형의 계약과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독일 문학의 한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샤미소는 독일이 아니라 상파뉴 지역 출신의 프랑스 작가다. 하지만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피해 독일로 망명한 이후 평생 독일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독일어로 작품을 발표했기에, 독일어권 작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 외에 샤미소의 대표적인 작품은 서정시 연작인 『여인의 사랑과 생애』라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은 독일 낭만파 음악의 거장 로베르트 슈만이 클라라와의 결혼을 허락받은 직후 작곡한 동명의 연가곡집을 통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특이하게도 샤미소는 작가로서 집필 활동 외에 의학, 식물학 등을 연구해 식물학자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식물학 연구를 위해 저 멀리 캄차카 반도까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던 그는 이후 베를린에서 식물원장을 맡았고, 말년에는 베를린 학술원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주인공 페터 슐레밀은 마지막에 아프리카와 아시아, 북극과 남극을 탐험하며 지구의 지형과 동식물 도감을 집필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작가 샤미소 자신을 작품에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림자가 의미하는 것
『그림자를 판 사나이』의 이야기는 비교적 단순하고 명쾌하다. 어느 날 우연히 악마와 마주친 페터 슐레밀은 원하는 대로 금화를 쏟아내는 마법 자루에 현혹되어 악마에게 그림자를 팔아넘긴다. 하지만 금화가 가져다준 부와 명예도 잠시, 가는 곳마다 그림자가 없는 자신을 손가락질하고 피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외로움과 소외감에 시달린다. 이로 인해 사랑하는 여인과도 결혼할 수 없게 된 슐레밀은 악마를 다시 만나 그림자를 되돌려 받으려 하지만, 악마는 그에게 그림자와 마법 자루를 둘 다 넘겨줄 테니 죽은 뒤의 영혼을 자신에게 달라는 새로운 제안을 건넨다. 고민 끝에 슐레밀은 악마의 유혹을 뿌리친 채 홀로 세계 곳곳의 지리와 생물을 탐구하는 고독한 은둔자가 되어 살아간다.
마치 전래 동화처럼 단순하고 쉽게 읽히는 이야기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그리고 읽은 후에도 계속하여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이 있다. 대체 이 작품에서 슐레밀이 팔아넘기고, 또 돌려받기 위해 그토록 애쓰는 그림자가 의미하는 것은 뭘까. 물론 작품 속에 마법 자루 외에도 투명해지는 새집, 악마와 요술 장화 등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 전체를 그냥 하나의 동화, 재미있고 환상적인 이야기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작품 속 그림자의 이미지, 슐레밀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으나 결국 되찾지 못한 그림자가 주는 여운의 크기가 너무 깊고 강하다.
잃어버린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들
대부분의 문학 작품이 그렇듯, 이 작품에서도 그림자는 보는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아니, 작가 스스로가 의도적으로 그림자의 의미를 하나로 한정 짓기보다는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곳곳에 심어놓았다. 여기서 그림자는 전통적으로 그림자가 상징해온 또 다른 자아일 수도 있고,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정체성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 및 사회와 연결해 주는 소속감, 혹은 연대감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평소에는 미처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쉽게 넘겨버릴 만한 정도의 가치이지만, 잃어버린 뒤에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자신에게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위에 언급한, 악마와의 계약을 그린 비슷한 범주의 작품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바, 악마는 언제나 시간(모모)이나 영혼(파우스트), 믿음(악마의 묘약), 웃음(꼬마 백만장자 팀 탈러), 혹은 그림자(그림자를 판 사나이)처럼 잘 보이지 않고 실용적이지 않기에 사람들이 별 관심을 갖지 않는 것들을 노리고 가져간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잃어버린 뒤에야 비로소 그것의 가치를 깨닫고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즉, 이러한 이야기에서 초점은 악마나 계약의 대가, 되찾기까지의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실 그 자체에 맞춰져 있으며, 그러한 상실을 통해 드러나는 진정한 가치에 있는 것이다.
한편, 작품 속 그림자의 의미는 작가 샤미소의 자전적인 요소를 통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극 중 슐레밀은 그림자를 잃고 난 뒤 사람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어떤 사회에도 속하지 못한 채 방에 틀어박혀 지내고, 마지막까지 홀로 고독한 여생을 보내게 된다. 평생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두 개의 국적, 그리고 문학과 자연과학이라는 두 개의 영역에 걸쳐 살아온 작가 샤미소의 삶을 생각해 볼 때, 슐레밀이 잃어버린 그림자는 그가 평생을 통해 찾고자 했던 자아, 자신이 속한 세계에 확실한 소속감을 느끼게 해줄 확고한 정체성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세상을 떠돌며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지만, 결국 정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극 중 슐레밀의 형상에 샤미소 자신의 자전적인 요소를 짙게 투영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바라볼 때, 갈수록 파편화되어 가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은 채 방황하는 현대인의 초상 또한 그림자를 잃고 떠도는 슐레밀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보다 현대적인 의미망으로 다가온다. 이 이야기가 19세기 초 유럽의 환상 동화가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로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4호 2019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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