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저물어 가는 이 밤의 끝을 잡고 지나간 시간을 돌아볼 때다. 우리가 흘려보낸 52만 5천 6백 분의 시간에는 어떤 말들이 새겨졌을까? 아쉬움과 외로움이 뒤섞인 문장들일까? 하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러므로 눈물은 뒤로 하고 파티를 벌여야 할 때다. 왜냐, 우린 아직 호기심 많고 젊으니까. 청춘들이 벌이는 난장 파티의 시간!
멋진 프리마 돈나를 꿈꾸는 여인 정선아
“2011년은 정말 해피했어요!” 정선아는 행복한 한 해를 보냈다고 소회했다. <아이다>로 시작하여 <모차르트!>, <아가씨와 건달들>, 그리고 앞으로 공연될 <에비타>까지 일 년간 큰 무대를 쉼 없이 달리며 자신의 에너지를 무한 발산 중이다. 한편, 정선아에게 2011년은 자신의 새로운 면을 깨달은 해로 기억될 것이다. 무대에서 늘 가슴속 뜨거운 열정을 뿜어내던 이 어린 디바는 자신의 아픈 사랑을 숭고하게 지켜내며 성숙하게 되는 이집트의 왕녀 암네리스와 자신도 몰랐던 열정을 발견하게 되는 순수한 선교사 사라를 거치면서 자기 안의 여린 결을 찾아냈다. 그러고 나선 뜨거움과 차가움을 뿜어내지 않고 조용히 흐르게 내버려두는 방법까지 깨우친 듯하다. “예전에는 캐릭터의 성격이 내게 있어도 나를 지우고 그 사람인 듯 연기하려 했는데, 이제는 내 것과 융합하여 빼낼 수 있는 능력이 조금 생긴 것 같아요.” 그런 그에게 새로 찾아온 작품은 <에비타>다. 사생아로 태어나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가 된 여인, 인생 자체가 영화 같았던 ‘에바 페론’을 맡게 될 정선아는 국민에게 따뜻했던 영부인 시절 에바의 모습뿐 아니라 그녀의 굴곡진 과거와 욕망을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이를 위해 실존 인물인 에바 페론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공부를 하고 있다는 정선아. 스물일곱 그에게 <에비타>는 스스로도 예상한 것처럼 ‘배우 인생에 무게중심으로 자리할 작품’이 될 것이다.
진심을 전하고 싶었던 여왕 리사
“벌써 12월이라니!” 촬영장에 준비되어 있던 갖가지 크리스마스 소품들을 보면서 리사는 흘러간 2011년을 아쉬워했다. <광화문 연가> 지역 투어를 마치고 나니 상반기가 지나갔고, 틈틈이 싱글 녹음, 12월에 있을 그림 전시 준비, 그리고 연말은 <에비타> 공연에 어느 새 일 년이 훌쩍 가버렸던 것. 하지만 바쁜 이유를 꺼내면 꺼낼수록 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니 괴롭기보다는 즐거운 눈치다. <에비타>는 리사가 처음 도전하는 정통 스타일의 뮤지컬이고 성스루 뮤지컬이다. “노래로만 이루어진 뮤지컬이라 노래에 주안점을 두는가 싶었는데, 성스루일수록 연기력이 관건이었다”며, 첫 작품을 하는 듯 어려움과 기대, 설렘을 이야기한다. <밴디트>의 탈주범 영서, <헤드윅>의 드랙 퀸 이츠학, <대장금>의 ‘업’을 의술로 풀어야 했던 서장금, <광화문 연가>의 첫사랑 여주까지, 여린 듯 보이지만 심지가 깊고, 강한 에너지를 조용히 그러나 폭발적으로 발산하는 역을 주로 맡아 왔다. 그래서 그녀의 에바 페론이 기대되는 이유는 비단 그녀의 감성적이면서도 시원시원한 보이스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리라. 국민적 성녀로 추앙받는 한편, 아르헨티나 경제 파탄을 불러온 악녀로도 평가되는 에바 페론이지만,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자신이 겪었던 서민들의 삶이 더 나아지기를 열망했기 때문에 그 진심이 전해져 오랫동안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이야기하는 그녀의 눈빛은 이미 에바의 것이었다.
주연으로 날아오르다 이지훈
“올해는 일만 했는데 힘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순탄한 한 해를 보냈느냐는 질문에 이지훈은 옆집 친구 이야기하는 모양 툭 내뱉곤 피식 웃는다. 복잡 미묘한 웃음이다. “솔직한 마음은, 뮤지컬을 시작하고 나서 올해 가장 힘들었어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마음이었지만, 버거웠어요.” 이 말은 엄살이 아니다. 그는 올 한 해 네 편의 뮤지컬에 출연했고, 두 편의 드라마를 촬영했다. 신년엔 ‘뮤지컬 두 편, 드라마 한 편’ 하는 게 계획이었으니 곱절의 일을 한 셈이다. 그가 한 해를 정리한다. “<원효>는 걱정도 많았지만 하고 나니 또 남는 게 있더라고요. <원효>를 통해서 큰 극을 끌어가는 힘을 배웠고, <잭 더 리퍼> 때는 연기의 깊이를 알게 됐어요. <삼총사>에서는 자신을 내던지고 무대를 즐기는 내 자신을 발견했고요.” 그렇게 올해 그는 배우가 됐다. 그것도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배우. 스스로는 어떻게 느낄까? “선택한 작품만 봐도 성장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옳은 말이다. 작품은 배우의 지표를 보여주는 표면적인 증거 아닌가. 정성을 더 쏟고, 덜 쏟아도 되는 작품이 따로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좀 더 제대로 해야 하는 정통 뮤지컬 <에비타>를 차기작으로 택하면서 그는 관객들에게 진정한 뮤지컬 배우로 한 걸음 다가왔다. 이지훈은 지금이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선배로서 부담감도 있지만, 저도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면서 한 계단 한 계단 밟아가고 있어요. 어느 순간 내려갈 날도 있겠죠. 하지만 아직은 올라갈 곳이 한참인 것 같아요.” 누구나 하는 흔한 말이지만, 치기나 오기 없이 담백해서 기록해두고 싶은 이야기다. 스타에서 배우로 넘어가는 통과의례를 거친, 정도를 아는 데뷔 16년 차 엔터테이너의 담담한 자기 다짐이기에 더더욱.
도약의 시간 임병근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잘 이겨냈다. 잘 이겨내서 이만큼 더 올라갈 수 있었던 거야.’ 임병근은 2011년의 자신을 이렇게 격려하고 싶다고 했다. 올해 출발은 좋았다. 신인 배우가 흥행 최전선에 있는 스타 배우와 더블 캐스트로 대극장 무대에 서는 건 흔치 않은 기회니까. 게다가 <광화문 연가>는 흥행에서 홈런을 날렸다. 하지만 인생사 호사다마라고 허리 부상으로 떠올리기 싫을 만큼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고 한숨 고른 후 다시 도약을 준비 중이다. 이번에 연기하게 된 건 <에비타>의 체. 힘든 시간을 보상받을 만한 선물을 받은 기분일 것이다. “기뻤죠. 배우에겐 무대에서 공연할 수 있는 게 큰 행복이고 운이에요. 새로운 작품, 또 대단한 작품을 할 수 있게 돼서 행복하죠.” 그는 좀체 흥분하는 법이 없었다. 자신을 뽐내려는 결사적이고 필사적인 신인 배우의 태도가 없는데 그게 매력적이다. 야망은 저 깊은 곳에 숨겨두고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면 자신의 발톱을 드러내지 않는 호랑이처럼 보인다고 할까. 게다가 극단을 오가는 그 눈빛. “다양한 장르를 경험해 보자, 그게 신년 계획이었어요. 저는 계속 실천 중이죠. 뮤지컬도, 연극도, 영화도, 다양하게 해보고 싶어요.” 저 깊은 곳에 야망을 품은 그의 눈이 섬광처럼 번쩍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9호 2011년 1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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