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니토드> 김지현
생존의 열망
유독 처연하고도 비극적인 삶에 자주 빠졌던 배우 김지현이 지금껏 도전하지 않았던 색다른 캐릭터로 돌아온다. 기가 막힌 맛의 인육 파이를 만들어 판다는 파이 가게의 주인 <스위니토드>의 러빗 부인으로 말이다. 그런데 악취가 날 것만 같은 더러운 옷을 입고 피가 묻은 칼을 든 채 섬뜩한 눈빛을 내뿜는 러빗 부인의 분위기가 김지현과 의외로 잘 어울린다. 김지현이 그려내는 러빗 부인의 욕망과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삶이라는 지옥을 벗어나기 위하여
혹시 파이 좋아하시나요? 어떤 파이요? (웃음) 저 고기 파이 진짜 좋아해요. 사실 한국에서는 고기를 넣고 만드는 파이를 잘 안 팔잖아요. 근데 홍대의 작은 파이 가게에서 고기 파이를 선물 받아서 먹어봤어요. <스위니토드>의 표현대로 그 안에 육즙이 가득 들어 있어서 정말 맛있었어요.
<스위니토드>의 러빗 부인으로 출연한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의외의 캐스팅이라는 반응에 기대감이 뜨거웠어요. 많은 분들이 제가 러빗 부인으로 출연한다는 소식에 놀라셔서 오히려 제가 더 놀랐어요. 하하. 제 기억이 맞다면, 이렇게 큰 대극장의 라이선스 뮤지컬에 참여한 경우가 없어요. 특히 러빗 부인이라는 독보적인 캐릭터가 재미있게 느껴졌죠. 또 워낙 유명한 스티븐 손드하임의 음악에 직접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하필이면 오디션 일정이 <여명의 눈동자>의 개막 시기와 맞물려서 정말 정신이 없었어요. 오디션 준비에 집중할 틈이 없더라고요. 심지어 제작사 오디컴퍼니와의 첫 인연인데,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오디션에 참여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처음엔 고사했어요. 그런데 어찌어찌 오디션 준비를 무사히 마쳤고 다행히도 합격할 수 있었죠. 솔직히 말하면 마음을 비우고 있었어요. 심지어 러빗 부인으로 출연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러빗 부인 하는 거 정말 괜찮으시대요?’라고 되물었어요. (웃음)
초연 때와 지금 대본으로 만난 러빗 부인에 차이가 있을까요? 초연은 작품 전체가 무겁고 어둡게 다가왔어요. 당시 작품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면, 지금은 블랙코미디 같더라고요. 상황 자체가 코미디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점을 짚자면, 러빗 부인은 웃음을 유발하는 캐릭터라기보다는 상황에 대처하는 사고방식이 평범한 정상인과는 다른 인물이에요. 연습을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이렇게 행동한다고? 진짜 이상한 여자네?’라고 할 만큼이요.
과거 인터뷰에서 본인의 일부를 반영해서 캐릭터를 만들어간다고 이야기했더라고요. 러빗 부인과의 공통점이 있다면 뭘까요? 저랑 러빗 부인은 진짜 공통점이 없는 것 같아요. (웃음) 저는 집착도 별로 없고, 살기 위해서 욕심을 내며 발버둥 치는 성격도 아니고요. 솔직하게 말하면, 살인을 한 이후에 인육으로 파이를 만든다는 괴담을 어느 정도까지 이해해야 하는지 고민했어요. 이게 자꾸만 납득이 안 되니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저와의 공통점을 찾기보다는 여러 상상을 가미해 러빗 부인의 이미지를 그려보는 중이에요. 러빗 부인으로서 보여주면 좋을 것 같은 모습을 많이 상상하고 있어요. 어느 장면에서는 기괴하거나 구질구질하지만 또 다른 장면에서는 엉뚱하고 귀엽게 표현하려고 여러 면을 떠올리는 중이죠. 사실 러빗 부인은 어떤 행동을 해도 모두 용납이 되는 캐릭터라 생각해요.
러빗 부인에 대해 더 자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어요? 러빗 부인은 스위니 토드와 전혀 다른 결을 가졌고, 예측할 수 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에다 에너지가 정말 강렬해요. 그녀에게서 지금 가장 중요한 부분은 스위니 토드를 향한 사랑과 소유욕이라 생각해요. 스위니 토드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고, 그를 통해 내 삶을 더 나아지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요. 스위니 토드를 다시 만난 순간부터 사랑을 느끼고 그를 남편으로 만들어 꿈꾸던 행복을 얻고야 말겠다는 그녀의 바람이 잘 드러났으면 좋겠어요. 러빗 부인이 스위니 토드를 사랑하는 이유는 생존이거든요. 그녀에게 스위니 토드는 시궁창 구덩이 같은 현실을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유일한 사람인 거예요. 러빗 부인이 있는 세상은 살아남기 위해 사람을 죽여 파이로 만들어 파는 것이 별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험하죠. 그녀가 가진 생존의 열망 그리고 그것을 위해 스위니 토드에게 쏟는 사랑이 잘 보였으면 좋겠어요.
보통 배우들은 라이선스 뮤지컬보다 창작뮤지컬의 작업을 더 힘들어하잖아요. 그런데 <스위니토드>는 라이선스 뮤지컬 중에서 유독 힘든가 봐요. 맞아요. 갑자기 문득 ‘내가 왜 진작에 <스위니토드>에 관심이 없었지? 오디컴퍼니는 왜 영상을 공개하지 않았을까? 영상으로나마 많이 봤으면 지금 좀 쉽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하하. 사실 <스위니토드>에 처음 참여하는 배우들끼리 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왜 이렇게 대사가 안 외워지지.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안심이 들지만, 대본과 가사를 외우는 과정이 꽤 빡빡해요. 게다가 음악도 난해하고. (웃음) 맞다. 오늘은 (조)승우 오빠가 연출님에게 브로드웨이 배우들도 이 작품을 연습할 때 우리처럼 많이 헤매는지 물었는데, 정말 바로 ‘노(No)’라고 답해서 우리 모두 ‘아악! 우리만 이렇게 헤매는 거야? 자존심을 걸고 해야겠네!’ 그랬어요. 물론 그들도 처음에 대사와 가사, 음악을 외울 때는 고생을 많이 한다고 하지만요.
게다가 스티븐 손드하임의 노래가 워낙에 까다롭고 어렵기로 유명하니까요. 개인적으로 손드하임의 노래가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아니라서, 그의 음악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손드하임의 곡에는 가사가 정말 많은데, 반복되는 부분이 거의 없어요. 게다가 러빗 부인은 말도 정말 많거든요. 심지어 대사나 가사가 의식의 흐름대로 쓰인 것이 아니라서 순식간에 주제가 바뀌어 버리더라고요. 어디로 튈지 모르겠어요. 노래가 끝날 것 같은데 끝나지 않는 곡도 있고, 그래서 연습실에만 가면 ‘한 번만 더 해볼게요. 한 번만 더 해볼게요’라면서 계속 연습을 이어가죠.
첫 상견례 날부터 시츠프로브처럼 뮤지컬 넘버를 시연했다면서요. 벌써 많은 배우가 무대에 올라도 될 정도라 들었어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재연에 출연한 배우들을 중심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저도 조그맣게 따라 부르며 지켜봤죠. 이렇게 상견례에서 노래 연습을 한 건 처음이었어요. 다들 ‘상견례 때 이렇게 노래를 다 했었나?’라면서 놀라더라고요. 하하. 사실 음악 연습은 연출님이 한국에 오시기 2주 전부터 시작했고, 연출님이 직접 참관하는 연습 기간이 살짝 촉박하다고 느끼고 있던 터라 다들 열정이 넘쳤어요. 그런데 정말 잘하더라고요. 그때 저도 모르게 ‘뭐야, 다 완벽해!’ 감탄하면서 연습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죠.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끼며
사실 러빗 부인 캐스팅 소식에 많은 사람이 놀란 이유는 우울하고 처연한 캐릭터에 특화된 배우라는 인식이 강해서가 아닐까요? 제가 기본적으로 그런 우울하고 비극적인 정서를 좋아하긴 해요. 밝고 귀여운 캐릭터보다 슬픈 감정을 이끌어내는 게 편하거든요. 게다가 제가 슬프고 처연한 사연이 몇 개쯤은 있을 것 같은 캐릭터와 잘 어울리나 봐요. 가끔 ‘혹시 무슨 사연이 있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이렇게 대답해요.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다들 각자 사연이 있는 거죠. (웃음)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사연을 얼마만큼 잘 녹여내고 보여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지현 씨의 공연을 처음 본 작품은 2012년 <카페인>이었어요. 그런 밝고 통통 튀는 캐릭터가 그립기도 하지 않아요? 어머, 언제적 <카페인>인가요? (웃음) 저는 <카페인>의 세진 같은 발랄한 캐릭터를 맡으면 에너지 소모가 크더라고요. 재미있는 건 <카페인>에 처음 출연할 때부터 저와 결이 정말 다른 캐릭터라 힘들 거라 걱정했어요. ‘아니 그땐 정말 어렸는데, 이걸 그렇게 힘들어했다고?’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캐릭터의밝고 사랑스러운 부분을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아요. 머릿속에 온통 ‘귀엽고 발랄해야만 해’라는 생각이 가득 차서 힘들었지만, 다시 출연했을 땐 정말 재미있었어요. 한 번 해봤다고 캐릭터에 대한 여유가 생겼고, 어느 정도 편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유독 같은 작품을 여러 번 참여한 경우가 많아요. 이런 경우와 처음 작품에 합류할 때 차이가 있지 않나요? 재참여를 하는 작품은 처음 출연했을 때 가지지 못한 여유를 비롯한 인물에 대한 깊이를 느낄 수 있어요. 확실히 캐릭터에 빨리 ‘쏙’ 들어가거든요. 연극 <프라이드>나 <카포네 트릴로지>에 처음 출연했을 때 정말 재미있었지만, 인물의 감정을 짚어내는 부분에서 조금 힘들었어요. 혹시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까봐 생기는 불안함 때문에요. 그런데 다시 참여하면서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어요. 거기에다가 캐릭터나 작품의 이해 폭이 훨씬 넓어지고 단단해졌죠. 때문에 처음 출연했을 때 느꼈던 부족한 부분을 다 채울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또 초연에 참여하는 경우에는 말 그대로 처음 만나는 재미가 짜릿해요. 기분 좋은 긴장감이랄까요.
아무리 만족스러운 공연도 끝날 땐 아쉬움이 남기 마련인 거 같아요. 혹시 배우 인생에서 아쉬움이 가장 적었던 작품이 있을까요? 저한테는 <여명의 눈동자>가 정말 완벽한 작품이었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다시는 이 작품에 참여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을 정도로요. 첫 공연 후에는 펑펑 울었고,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나서는 정말 행복했어요. 이런 작품은 처음이었죠. 다사다난한 상황에서도 공연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외부적인 문제가 발생했고 그래서 그 큰 무대를 세트 없이 오직 배우들만의 힘으로 채워야만 했지만, 이런 상황 때문에 작품이 지닌 처절함이 더 잘 보였다고도 생각해요. 대극장도 아니고 소극장도 아닌 묘한 구조 안에서 배우들의 에너지로 이야기를 전달해야 했으니까요. 또 여러 힘든 상황을 겪은 만큼 동료 배우들을 향한 사랑이 이렇게 진했던 적이 처음이기도 했고요.
올해도 세 달밖에 남지 않았어요. 정말 시간이 빠르죠? 앞으로 남은 세 달을 어떻게 보낼 예정인가요? 정말 세 달밖에 안 남았다고요? 믿을 수 없네요. 지금 공연 중인 <오만과 편견>을 마무리하면 바로 <스위니토드> 무대에 오를 것 같아요. 곧 내년에 함께하게 될 작품의 연습도 시작하게 될 것 같은데, 그러다 보면 올해가 빨리 지나가겠죠. 그 사이에 잠깐 쉬는 기간이 생길 것도 같아요. 그때 잘 쉬는 것이 올해의 목표에요.
그럼 마지막으로 <스위니토드>의 첫 무대에 올라가기 5분 전에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아. (한숨) 괜찮아. 내 머릿속에 다 있으니, 의심하지 말아. 생각하는 순간 틀리니까, 스위니 토드 씨가 나를 잘 끌어줄 것이야! 그러니 정말 재미있게 하자.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3호 2019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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