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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OLUMN] 한국 뮤지컬 20년 소사, 어쩌다 조승우를 중심으로 [No.193]

글 |김영주 공연 칼럼니스트 2019-10-28 9,040

한국 뮤지컬 20년 소사

어쩌다 조승우를 중심으로


 

생애 첫 뮤지컬은 열대여섯 살 때 김민기 선생의 열렬할 팬인 아버지를 따라가서 본 학전의 <지하철 1호선>이었다. 그 전까지 알던 뮤지컬이란 성탄절 전후로 심야 시간에 TV에서 방송해주던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나 <아가씨와 건달들>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작은 극장에서 그처럼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노래와 춤으로 풀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했다. 그리고 몇 해 뒤, 대학생이 되어 다시 학전을 찾았을 때는 영화 <춘향전>의 이몽룡 역으로 낯이 익은 신인 배우가 <의

형제>라는 작품에서 지옥에서 온 외팔이 역으로 무대 위를 펄펄 날고 있었다. 작품도, 배우도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불붙기 시작한 팬심을 키워나갈 만한 공간은 없었다. 당시에도 PC통신에 활발하게 활동하는 뮤지컬 커뮤니티가 있었지만, 직접 노래와 연기를 배우는 아마추어 공연 동호회의 성격이 더 강했다. 재미있는 건 그 시절 학전 공연에도 ‘퇴근길’이 있었다는 것. 다만 지금과는 ‘퇴근’의 주체가 반대였다. 학전의 배우들은 막이 내리자마자 분장을 지우지도 않고 부리나케 극장의 좁은 복도로 나가 일렬로 나란히 서서 퇴장하는 관객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배웅했다. 조승우는 물론이고 황정민, 설경구, 김윤석이 모두 학전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무슨 호사였나 싶지만, 어쨌든 그때는 그랬다. 

김대중 대통령이 추진한 국가 정책으로 전국에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이 깔렸고 그 결과 세상이 바뀌었다. 전화세 폭탄을 걱정하며 통신사의 텍스트 위주 게시판에서 커뮤니티 활동을 하던 유저들은 모뎀 접속에서 벗어나자마자 개인 홈페이지를 개설하거나 다음, 프리챌, 싸이 클럽 등의 커뮤니티로 둥지를 옮겼다. 공연 실황 영상과 음원, 고화질 사진의 공유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월해졌고(물론 저작권 위반이었다), 이 변화는 문화계의 다른 어떤 장르보다 뮤지컬 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의형제>를 보고 복도에서 배우들의 박수를 받으면서 나와서 ‘아, 좋은 공연이었다’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끝이었던 시절에서 불과 2~3년 만에 회원 수가 수만 명을 넘는 대형 뮤지컬 커뮤니티들이 몇 군데나 생겼다. 1세대 뮤지컬 마니아들은 어렵게 모은 자료를 자랑스럽게 공유했고 커뮤니티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뮤지컬 마니아들은 정기적으로 뮤지컬 작품 분석 스터디나 영상회를 열었다. 어떻게 보면 뮤지컬을 글로 배우고 상상해서 사랑한 세대였다. 가뭄에 콩 나듯 뭐 하나 말이 될 만한 게 떨어지기만 하면 석 달 열흘을 사골처럼 우렸다. 알다시피 갈증만큼 열정을 불태우게 하는 연료는 없고 허기 이상의 반찬도 없다. 

뮤지컬 배우들의 팬카페가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다. 아침 방송에 추상미와 함께 작품 홍보를 하러나온 조승우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검색했다가 마지막 공연 단관을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어렵지 않게 참여 신청을 한 적이 있다. 지금까지도 인생작으로 남아있는 감동적인 공연을 본 후에 호프집에서 하는 단관 뒤풀이에 직접 참석한 주인공과 대화를 나눈 신묘한 경험도 했다. 2000년대 초중반에는 배우가 새 작품에 들어가면 배우의 팬카페에서 몇 차례 단관을 진행하고, 그중 한 번 정도는 뒤풀이에 배우가 참석해서 팬들과 작품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공식 행사’가 으레 있었다. 

이처럼 뮤지컬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들의 거리가 신기할 정도로 가까운 장르였는데, 창작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사례였다. 초연 당시 이 작품에 매료된 ‘베사모’ 회원들은 재공연을 올리기 위해 직접 공연 투자사를 만들어서 극단 갖가지에 3억여 원의 투자금을 내고 작품의 기획과 홍보마케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지금 기준으로도 큰돈이지만 2003년의 3억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새삼 대단하다 싶다.  


 

조승우가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와 영화 <말아톤>으로 2연속 만루 홈런을 치면서 뮤지컬계에 신규 관객층이 대거 유입되었는데 그들 역시 기존의 뮤지컬 팬덤 문화에 빠르게 흡수되었다. 오페라나 발레, 클래식 음악이나 연극에도 분명 마니아들이 있고 그들도 인터넷을 통해 동호회 문화를 키워나갔지만 어떤 장르도 뮤지컬과 같지 않았다. 결정적인 차이는 역시 작품을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들 사이의 쌍방향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작은 규모의 소극장 공연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노트르담 드 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뮤지컬, 그리고 <엘리자벳>을 비롯한 독일어권 뮤지컬은 마니아들이 먼저 발굴해서 자체적으로 번역하고 관련 자료를 만들어 소비한 것이 대형 자본을 움직여서 정식 공연으로까지 이어진 경우였다. 

공연계의 그 어느 장르보다 프로슈머의 역할이 컸던 게 뮤지컬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상사 모든 일이 동전의 양면이다. <헤드윅> 초연 당시 제작사는 자발적 서포터들에게 홍보마케팅 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티켓 오픈과 관련된 트러블이 생기자 회사로 쏟아지는 엿 소포도 잔뜩 받아야했다. 원래 가장 강력한 보이콧은 가장 열정적인 지지자들이 하는 법이다.  

2010년 전후로는 다시 한 번 변화가 감지되었다. <노트르담 드 파리> 시절에만 해도 팬들이 네이버 카페를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엘리자벳>에 이르면 그 구심점이 이글루스가 되었다. 뮤지컬 마니아들의 활동 근거지는 커뮤니티에서 블로그로, 블로그에서 디시인사이드 갤러리나 트위터로 이동했다. 비단 뮤지컬계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온라인상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익명성이 보장되는 곳으로 찾아들어 갔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같은 일상적인 사이버불링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니까 온라인에서나 오프라인에서나 크게 다를 것 없는 팬카페 회원들만 봐왔던 배우 조승우가 자신의 이름으로 개설된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서 비속어가 난무하는 격한 표현들을 보고 어떤 의문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어느 정도는 짐작이 된다. 그러한 의식이 조승우만의 것은 아니겠으나 그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달리 누가 있을까 싶다. 

세기가 바뀌면서 태어난 아이가 성년이 될만큼 시간이 흘렀다. 오늘날 뮤지컬 팬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트위터에는 세상이 마땅히 가야할 방향으로의 변화를 반영하라고 촉구하는 목소리가 뜨겁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기준치와 요구가 더 구체적이고 명확해지는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뮤지컬 제작사와 창작자, 배우, 그리고 관객이 서로에게 갖고 있는 복잡다단한 애증의 파노라마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온갖 이슈를 보면서 하얗게 재가 된 마음으로 석양을 바라보며 ‘2000년 학전에서 그냥 공연만 보고 나왔던 그때가 제일 좋았지’라고 탄식하는 노인네가 되었다가도 어쨌든 20여 년간 망하지 않고 죽지 않고 살아남은 한국 뮤지컬계와 그 팬덤이니 그걸로 되었다 싶기도 하다. 이다음 페이지는 또 어떤 흐름이 이어질지 모르겠으나 10년 후에 다시 시간을 돌이켜본다면 그런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서 이처럼 좋은 날이 왔구나, 우리는 진보했구나 흐뭇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뮤지컬이 좋아서 모인 사람들이 뮤지컬을 통해 서로에게 좋은 시간을 줄 수 있길 바라는 게 너무 큰 꿈은 아니겠거니 속편하게 생각해보련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3호 2019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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