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랑 루즈!>
화려함으로 압도하다
원작의 장점을 살린 무대화의 성공
브로드웨이 2019-2020 시즌의 문을 연 작품은 지난 7월에 개막한 <물랑 루즈!>다.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가 출연한 바즈 루어만 감독의 2001년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공연화 소식이 전해지면서 꽤 오랫동안 뮤지컬 팬들의 기대를 모았다. 영화는 오스카상 8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관객과 평단의 큰 사랑을 받았는데, 이런 원작 영화가 뮤지컬로 제작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관심이 쏟아졌다. 게다가 원작 영화는 이미 대중에게 익숙한 음악이 적절하게 들어간 주크박스 스타일의 뮤지컬 영화로, 언젠가 <물랑 루즈>가 뮤지컬로 제작되리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한동안 루머만 떠돌았던 뮤지컬 <물랑 루즈!>는 2016년 호주에 기반을 둔 글로벌 크리에이처스가 제작을 맡고, 브로드웨이에서 잘나가는 연출 알렉스 팀버스가 합류했다는 뉴스가 들리며 가시화됐다. 이렇게 제작이 시작된 <물랑 루즈!>는 2018년 여름 보스턴에서 트라이아웃 공연을 선보였고 호평 속에 막을 내렸다. 트라이아웃 공연 당시 언급된 많은 부분은 작품의 디자인적 요소였다. 생각해 보면 바즈 루어만의 영화가 큰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보헤미안적인 예술가와 카바레 가수의 사랑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영화로 그려낸 방식이 신선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클로즈업과 줌아웃을 적절하게 사용하며 보여준 영상미와 귀에 익은 노래의 조합은 자칫 고루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를 빤하지 않게 전달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원작의 매력을 기억할 때 뮤지컬 <물랑 루즈!>는 원작의 장점을 무대 위에서 살리기 위해 많이 노력했고, 무대화에 나름의 성공을 거뒀다고도 볼 수 있다.
객석에 들어서는 순간 시작되는 공연
뮤지컬 <물랑 루즈!>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작품의 화려함이다.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공연이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대 밖 객석과 전체적인 공간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쓴 티가 난다. 뉴욕 맨해튼 45가에 위치한 알 허쉬필드 시어터의 모든 문에는 물랑 루즈를 뜻하는 ‘MR’ 로고가 장식되어 있고, 객석 주변의 벽도 빨간 공단을 두른 인테리어로 완성돼 있다. 이것은 마치 뮤지컬 <물랑 루즈!>의 관객이 아니라 파리의 카바레 클럽 물랑 루즈에 손님으로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1층 좌석 위쪽에는 금빛과 붉은 장식과 어우러져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가 눈을 사로잡는다. 게다가 붉은빛으로 채워진 객석의 분위기는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무엇보다도 무대 좌측의 박스 석에는 물랑 루즈 건물을 상징하는 풍차가, 우측에는 새틴의 방을 연상시키는 코끼리가 우뚝 서서 관객을 맞는다. 최근 브로드웨이에서는 보지 못했던 거대한 장치들로 관객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무대 위에는 ‘Moulin Rouge’라는 작품의 제목이자 배경의 공간을 의미하는 네온사인이 큼지막하게 있고, 그 뒤로는 하트 모양의 구조물이 몇 겹으로 무대를 채우고 있다. 쉽게 말해 영화 <물랑 루즈>의 삽입곡이었던 ‘Lady Marmalade’의 뮤직비디오 무대를 연상하면 된다. 심지어 무대 앞에서는 앙상블 배우들이 나와서 묘기를 선보이며 관객들의 시선을 끈다. 이 정도면 공연이 시작하기 전 이미 공연이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가늠이 될 것 같다. 주·조연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기 전부터 눈앞에 펼쳐진 화려하고 압도적인 세트는 물랑 루즈라는 가상 공간의 한 부분처럼 느껴지는 착각을 선물한다. 특히 오케스트라석의 앞쪽 일부는 공간을 개조해서 테이블이 있는 자리로 만들었는데 이 자리에 앉는다면 이런 환상이 더 증폭될 것이다. 붉은빛이 지배하는 이 공간은 디너 시어터를 표방했던 뮤지컬 <나타샤, 피에르, 그리고 1812년의 대혜성>의 무대 디자인과도 비슷하지만 그보다 세 배쯤 화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음악으로 가득 채워진 무대
<물랑 루즈!>의 막이 오르면 극장의 화려한 인테리어와 이에 어울리는 음악과 안무가 풍성하게 더해진다. 그리고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로 앙상블이 등장해 ‘Lady Marmalade’를 부르며 관객들을 물랑 루즈 카바레의 세계로 안내한다. 곧이어 브로드웨이 베테랑 배우 대니 버스타인을 연기하는 해럴드 지들러가 등장해 주요 인물을 소개한다. 뮤지컬이 아니라 물랑 루즈 카바레를 연상하게 하는 이 첫 곡은 ‘Lady Marmalade’로 시작해 무려 10곡이 넘는 팝송을 사용한다. 장르 역시 다양한데, 힙합 가수 넬리의 ‘Ride With Me’를 비롯해서 데이비드 보위의 ‘Let’s Dance’ 그리고 오펜바흐의 연주곡 캉캉에 이를 정도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 카바레의 주인공 격인 새틴을 제외한 <물랑 루즈!>의 주요 인물을 모두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장면이 마무리되며 새틴이 등장하기 전, 아론 트베잇이 맡은 남자 주인공 크리스티앙이 무대 중간으로 나온다. 그는 “이 이야기는 아주 지독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며, 자신이 파리까지 오게 된 여정을 비롯해 새틴을 만난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해 준다. 크리스티앙은 영국이 아닌 미국 오하이오에서(왜 오하이오인지는 잘 모르겠다) 온 인물로 몽마르트르에서 툴르즈 로트렉과 산티아고를 우연히 만나게 되고 원작 영화와 동일하게 두 사람이 쓰고 있는 작품의 노래를 쓰는 조건으로 그들과 함께하게 된다. 원작 영화에서는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제곡 ‘Sound Of Music’의 한 구절을 쓰는 것으로 그들의 작품에 합류하지만, 뮤지컬 버전에서는 이 곡 외에도 폴라 콜의 ‘I Don't Want to Wait’, 폴리스의 ‘Every Breath You Take’ 그리고 릭 애슬리의 ‘Never Gonna Give You Up’까지 세 곡의 주요 후렴구를 한 소절씩 대답으로 부른다. 이후 로드의 ‘Royals’를 부르며 보헤미안의 정신을 함께 다지는 세 사람은 그 길로 새틴을 만나러 간다. 다음 장면에서는 극장으로 돌아간 새틴이 셜리 바세이의 ‘Diamonds Are Forever’, 마릴린 먼로(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에 나온)의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 마돈나의 ‘Material Girl’을 부르는데, 뮤지컬 <물랑 루즈!>에서는 여기에 비욘세의 ‘Single Ladies’가 더해진다. <물랑 루즈!>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원작 영화의 진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앞서 설명한 것처럼 뮤지컬은 원작 영화가 음악을 등장시킨 순간마다 그보다 더 새롭고 많은 곡을 추가하며 무려 70곡의 팝송을 사용한다.
이런 전략이 가장 도드라졌던 장면은 원작 영화에서도 열 곡 정도가 쓰인 ‘Elephant Love Medley’이다. 영화에서는 크리스천이 새틴에게 작곡가로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장치를 마련했다면, 뮤지컬에서는 전혀 다르게 사용된다. 이는 크리스티앙이 부르는 노래로, 자신이 공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망설이는 새틴을 설득하기 위한 1막 마지막 곡으로 사용된다. 5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새틴을 설득하는 크리스티앙과 주저하는 새틴의 마음을 무려 잘 알려진 25곡의 팝송을 엮어서 (원작에 등장했던 노래에 추가로 퀸의 ‘Play The Game’, 아하의 ‘Take On Me’, 노 다웃의 ‘Don’t Speak’, 엘비스 프레슬리의 ‘Can’t Help Falling in Love’ 그리고 나탈리 임브룰리아의 ‘Torn’ 등이 추가됐다) 노래로 대화하게 만든 것은 이 작품의 특징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삽입된 음악엔 2000년대 이후의 팝송이 많이 포함됐다. 예를 들면 2막의 시작은 레이디 가가의 ‘Bad Romance’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Toxic’ 등을 섞은 댄스 뮤지컬 넘버이고, 2막에서 갈등이 절정에 치달을 때 크리스티앙과 새틴이 그들의 사랑에 절망하며 부르는 뮤지컬 넘버는 2006년 미국의 소울 듀오 날스 바클리의 ‘Crazy’와 아델의 ‘Rolling in the Deep’을 편곡했다. 이렇게 <물랑 루즈!>에서는 2시간 반 동안 70곡의 귀에 익은 노래가 무대와 객석을 정말 꽉꽉 채우고도 넘친다.
주크박스 뮤지컬의 한계
창작진이 이렇게나 많은 팝송을 인물의 감정과 상황을 모두 고려해 적절하게 배치하면서도 작품의 이야기를 끌어 나간 방식은 굉장히 신선했다. 주크박스 뮤지컬이라고 해도 이렇게 다양한 장르의 많은 곡을 버무려낸 작품은 처음이란 생각이 들 정도니 말이다. 관객 역시 작품에 등장하는 음악의 광범위함에 적잖이 기분 좋게 놀라며 공연을 봤던 것 같다. 진지해야 할 장면에서 등장하는 귀에 익은 음악의 멜로디에 어떻게 저 음악을 쓸 생각을 했는지 놀라는 감탄과 웃음이 종종 들렸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주크박스 뮤지컬의 가장 큰 한계처럼 모든 노래가 인물의 상황에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1막에서 새틴이 공작을 만나러 들어가기 전에는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내용의 노래로 케이티 페리의 ‘Firework’라는 노래가 사용됐다. 이 노래의 가사는 미국의 독립 기념일인 7월 4일의 불꽃놀이처럼 당당해지라는 내용인데,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카바레에서 일하는 새틴이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괴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날스 바클리의 ‘Crazy’나 아델의 ‘Rolling in the Deep’도 크리스티앙이나 새틴의 상황에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절망적인 그들의 마음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가사인지 모르지만, 이 노래들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더 전개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 특히 의문점이 남는 부분은 공작이 노래를 부르는 지점들인데, 반예술인이자 반보헤미안으로 등장하는 공작이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가 인물의 성격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한 매체와 한 인터뷰에 따르면 탬 무투가 공작을 연기하면서 그의 노래 자체를 비꼬는 듯한 뉘앙스를 준다고 하는데 무대 위에서 그의 연기는 그 같은 감정을 전하기엔 부족해 보였다.
아쉬움을 남긴 캐스팅
무엇보다도 아쉬웠던 것은 해롤드 지들러 역을 맡은 대니 버스타인을 제외한 주연 배우들의 캐스팅이었다. 물랑 루즈 카바레의 MC로서 관객을 환영하는 등장 장면부터 현실적인 극장장으로서 공작과 대화하는 장면이나 새틴을 독려하는 장면에서 대니 버스타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코미디와 드라마를 잘 넘나들며 스토리에 무게를 실어준다. 또한 툴르즈 로트렉 역할을 맡은 사 나우자(Sahr Ngaujah)와 산티아고 역을 맡은 리키 로하스 역시 진중함과 코미디 사이에서 캐릭터를 잘 돋보이게 해주었다. 특히 사 나우자는 몸이 조금 불편하고 마음의 상처가 있지만 보헤미안 정신의 수호자로서 사명감이 있는 로트렉을 입체적으로 잘 그려냈다.
그러나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크리스티앙 역을 맡은 아론 트베잇은 혼자 서 있을 때마다 무대의 빈 공간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또 새틴 역을 맡은 카렌 올리보는 성량부터 연기에 이르기까지 아픈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2008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의 죽은 아들 게이브 역을 맡아 파워풀한 연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아론 트베잇은 굉장히 능력 있는 배우다.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부족하지 않게 하는 배우인데, 보헤미안의 이상을 꿈꾸는 크리스티앙이라는 인물을 담아내기에는 그의 감정이 그렇게 폭발적이지 못했다. 카렌 올리보는 2008년 브로드웨이 뮤지컬 <인 더 하이츠> 초연의 바네사 역할과 2009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리바이벌의 아니타 역할을 통해서 얼굴을 알린 배우로 노래를 정말 잘하고 거침없는 창법을 구사한다. 그런 이유로 이번 무대 <물랑 루즈!>의 새틴은 독립적인 인물로 그려지는데, 당당함에 초점을 맞춘 탓일까. 아파서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죽기 바로 직전까지 상당히 건강해 보인다. 물론 기침도 하고 피도 토하지만 그녀의 움직임과 목소리는 연기적인 장치를 굉장히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카렌 올리보가 보여주는 당당한 새틴은 왠지 존재감이 없는 아론 트베잇의 크리스티앙을 더욱 약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공연 초반 언급된 절절한 사랑 이야기라는 표현을 납득하기엔 무리일 정도로, 이들이 연인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큰 아쉬움을 남겼다. 게다가 원작보다 30분가량 늘어난 러닝타임 동안 두 주인공이 아닌 조연의 서사를 더 강조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흐릿해진 사랑 이야기 또한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도 쇼는 계속된다
두 주인공의 사랑이 얕게 느껴진 아쉬움은 있었지만, 2시간 45분이라는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눈과 귀를 끊임없이 즐겁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소냐 타예의 안무와 이를 더욱 역동적이고 아름답게 만들어 준 캐서린 주버의 의상은 이것만으로도 <물랑 루즈!>를 직접 관람할 가치를 살려준다. 음악적으로 아쉬운 부분을 제쳐놓고라도 정말 신선한 순간들이 많았고, 관객 역시 이런 부분에 즐거워했다. 대부분의 관객은 <물랑 루즈!>가 전하는 감정도 잘 따라간 듯 보였다. 새틴이 죽는 장면에 이어서 적잖은 훌쩍거림이 있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새틴이 죽고, 크리스티앙이 그녀를 품에 안은 채 그들의 노래 ‘Come What May’를 부르며 공연이 끝나면, 공연의 시작을 장식했던 앙상블 배우들이 다시 무대 앞으로 나와서 ‘Lady Marmalade’의 후렴구를 아주 느리게 부르며 공연이 끝난다. 마치 쇼는 계속된다는 것을 암시하듯 말이다. 그리고 쇼, 특히 여러모로 새로운 시도와 익숙함을 잘 버무려 만든 화려하고 압도적인 뮤지컬 <물랑 루즈!>는 앞으로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2호 2019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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