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설>
흩어지고 부서진 여성 시인의 삶
<난설>은 조선 시대 천재 시인 허난설헌의 시와 산문에 음악을 붙인 뮤지컬이다. 역모죄로 처형을 앞둔 허균 앞에 스승 이달이 찾아와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본지의 리뷰어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배출한 더뮤지컬 리뷰어 5인이 공연을 관람하고 대화를 나눴다.
*자유로운 대화를 위해 참여자 이름은 뮤지컬 캐릭터명으로 기재했다.
남성에 의해 설명되는 여성
스위니_ <난설>은 여성 시인 허난설헌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대감을 심어줬어. 그동안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한 창작뮤지컬은 많았지만, 그중 여성 예술가에 주목한 작품은 드물었잖아.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허균과 이달이 대화를 나누며 허난설헌을 추억하는 액자식 구조를 취하다보니, 정작 허난설헌의 목소리는 듣기 힘들어.
마틸다_ 이 작품은 허난설헌이란 인물을 관객에게 소개하는 데 관심이 없어 보여. 제목이 <난설>인데 주인공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더라고. 극 속에서 허난설헌은 ‘누이’ 또는 ‘그 사람’으로 불리잖아. ‘초희야’라고 이름이 불리는 장면은 딱 한 번 나오는데, 그마저도 특별히 계산된 장면이 아니라 이달이 허균과 허난설헌을 함께 부르느라 튀어나온 말이야.
스위니_ 서두에서 이달이 허균한테 ‘그 사람은 누군가의 누이로 불리기에는 아까운 사람’이라고 말하잖아. 그런데 이 작품의 전체 구조를 보면 허난설헌은 누군가의 누이, 누군가의 벗으로만 설명되는 느낌이야.
롤라_ 나에게는 마치 이달과 허난설헌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처럼 느껴졌어.
레베카_ 허난설헌보다 오프닝과 엔딩을 도맡은 허균이 더 주인공 같더라.
마틸다_ 허균의 시선으로 허난설헌을 돌아보고 싶었다면, 그가 누이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충분히 설명했어야 해.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과 달리 허난설헌을 비밀 결사로 그렸잖아. 그런데 그러한 설정이 방안에만 틀어박혀 살던 허균의 사상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 어떻게 역모죄로 처형당하는 지금에 이르게 만들었는지는 잘 드러나지 않아.
스위니_ 허균이 허난설헌과 이달을 모델로 『홍길동전』을 썼다면서 무대에서는 허난설헌을 말리고 이달을 원망하는 장면만 보여주잖아. 허균이 그들의 행동에 동의할 수 없었다면 『홍길동전』은 대체 왜 쓴 거지?
레베카_ 창작진은 수묵화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하던데, 액자식 구조를 취한 목적도 허난설헌을 수묵화처럼 아름답게 그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싶어. 아련하고 처연한, 누군가의 기억 속에 그림같이 우아하게 존재하는 인물로.
클레어_ 난 그래서 더 화가 나. 허균도 이달도 비겁하고 나약한 면을 지닌 다층적인 인물로 그려지는데 허난설헌만 이상화된 모습이라니. 일상적인 여성 차별의 사례 중 하나로 ‘대신 말하기’라는 게 있잖아. 남성이 여성 대신 나서서 ‘얘가 하려는 말은 이런 거야’ 하고 정리해 주는 거. <난설>이 바로 이런 ‘대신 말하기’의 예가 아닐까 싶어. 허균과 이달이 ‘허난설헌은 이런 사람이야’ 하고 설명할 시간에 허난설헌이 직접 자신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홍길동이 된 허난설헌
스위니_ 허난설헌은 뛰어난 시인이지만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했어. 어릴 때는 남자 형제들과 어울려 글공부를 했지만 결혼한 뒤로는 평범한 여인의 삶을 강요받았지. 남편과의 사이도 좋지 못했고 자식도 잃었어. 허난설헌은 이러한 자신의 설움을 ‘삼한(三恨, 조선에서 태어난 한, 여자로 태어난 한, 김성립의 아내가 된 한)으로 설명했어. 불행한 여인의 삶을 ‘규원가’ 같은 시로도 표현했고. 하지만 <난설>은 그의 결혼 생활도, 그 결혼 생활의 한이 담긴 시도 다루지 않아. 허난설헌을 주인공으로 삼았지만 정작 허난설헌의 이야기는 없는 셈이야.
클레어_ 작가는 허난설헌의 힘든 삶을 무대 위에 재현하는 대신 이 작품 안에서만큼은 그가 행복하게 시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다고 하더라.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 허난설헌에게 시가 어떤 의미인지는 담아내야 하는 거 아냐? 이달이 허난설헌에게 시를 쓰는 이유를 묻는 장면만 봐도 그래. 자기는 ‘마음의 불을 다스리기 위해’ 시를 쓴다면서 정작 허난설헌의 대답은 듣지 않아.
롤라_ 허난설헌이 이달과 함께 천인에게 글을 가르치고 양반의 재물을 훔쳐 나눠준다는 내용은 왜 넣었을까? 뮤지컬만 보면 허난설헌이 진짜 혁명에라도 가담한 줄 알겠어.
스위니_ 허균이 서자를 주인공으로 한 『홍길동전』을 쓴 게 스승 이달의 영향일 거라는 추측은 있지만, 허난설헌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은 못 들어봤는데.
레베카_ 공연계에서 수동적으로 그려지는 여성 캐릭터에 대한 비판이 많다 보니 반대로 능동적인 여성이라면 칼을 들고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스위니_ 실제 허난설헌이 부당한 사회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었던 인물은 아니잖아. 여성이라는 이유로 감내해야 했던 속박과 그러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시로 남겼으니까. 그런데 허난설헌이 자신의 삶을 시에 녹여냈을 때 그것이 갖는 힘에 대해 얘기하는 대신 무리하게 혁명가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그거야말로 예술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발상 같아서 아쉬워.
마틸다_ 허난설헌이 홍길동 같은 인물이 된 이유가 얼자인 이달이 적자인 형한테 얻어맞는 데 분개해서라는 설정도 황당해. 허난설헌에게도 자신의 한이 있는데, 이달의 한에 이입해 분노하는 인물로 만들었잖아. 심지어 허난설헌이 홍길동처럼 행동하는 걸 무대에서 보여주지도 않아. 홍길동처럼 행동했다고 허균과 이달이 말할 뿐이지. 허난설헌을 남장까지 하고 시회에 나간 사람으로, 약자를 위해 불의에 맞선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으면 그런 활동적인 모습을 관객의 눈앞에 보여주길 바라.
무대에서 살아나지 못한 시
롤라_ <난설> 창작자들은 여성 서사가 아닌, 허난설헌의 아름다운 시를 뮤지컬 음악으로 옮기는 데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해.
스위니_ 하지만 아무리 시가 아름답다 해도 가사와 상황이 어울리지 않으니 귀에 들어오지 않더라. 일부 장면은 시의 내용에 맞춰 너무 억지스럽게 꾸며낸 느낌이야. 이달이 술자리에서 뜬금없이 ‘신풍주’ 얘기를 꺼내는 것이나, 고작 몇 초라도 ‘거문고’를 연주하는 게 다 시어에 맞춰 장면을 만들다보니 그런 거잖아.
롤라_ 음악 자체도 아쉬웠어. 서양 악기와 국악기의 소리가 서로 어우러지지 않고 따로 놀아. 같은 시를 한국어로 노래한 뒤에 한자음으로 반복해 노래하는 것이나 허난설헌이 창을 하듯 노래하는 것 모두 한시와 국악이라는 재료를 과하게 어필하는 걸로 느껴졌어.
클레어_ 이달 역 배우가 거문고를 어설프게 연주하는 것도 국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거문고는 친숙하지 않은 악기니까 연주를 못해도 관객이 모를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롤라_ 무대 미술에서도 별다른 의미를 읽어낼 수 없었어. 시를 노래할 때 프로젝션 영상으로 무대 바닥에 한문으로 쓴 시를 보여주는데, 차라리 배우가 시를 쓸 때 그 시가 영상으로 나오게 한다든지 더 좋은 연출 방법을 고민해 보면 좋겠어.
스위니_ 대본 자체가 행동이 아닌 대화와 회상 위주로 이루어져 있어서 연출에 제약이 있었을 거란 생각은 들어. 하지만 창작 초연인 만큼 연출가가 더 적극적인 연출 방향을 보여줬으면 좋았을걸. 특히 이기쁨 연출은 전작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줄리엣과 줄리엣> 등에서 잘 알려진 이야기를 여성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호평을 받았잖아.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왜 이렇게 여주인공에게 소홀한지 의문이야.
마틸다_ 남성 중심의 공연계에서 그나마 여성 타이틀롤을 내세운 <난설>을 비판하는 게 앞으로 여성 중심 극이 제작되는 데 안 좋은 영향을 줄까봐 조심스럽긴 해.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은 재미없고 안 팔린다는 사회적 통념이 있으니까. 하지만 거꾸로 이러한 맥락에서 창작자들이 여성 캐릭터를 다룰 때, 특히 실존 여성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 때 좀 더 책임감을 지니면 좋겠어. 자신들의 작품이 이후 나올 여성 서사의 싹을 키울 수도, 잘라놓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2호 2019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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