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만나러 갑니다
실력은 물론 외양까지 엘리자베트와 흡사한 그녀의 모습에 오디션 장에 있던 심사위원들이 큰 감동을 받았다는 후문을 언급하니, 김선영은 “아유, 그건 부풀려진 얘기”라며 오디션을 본 후에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준비를 최대한 많이 한 것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그녀는 완벽주의자? “제가 완벽할 수는 없죠. 그저 가능성을 보여주는 거죠.” 십 년 넘게 뮤지컬 무대에 서고 있고 웬만한 역할은 다 섭렵하고 있는 배우의 답변치고는 조금 지나치게 겸손한 게 아닌가 하고 삐뚤어진 마음을 먹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녀가 전하는 정답 같은 말들은 허식이 아니라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김선영, 엘리자베트, 여왕의 귀환
김선영은 <마리아 마리아>와 <에비타>에 이어 오 년여 만에 <엘리자벳>에서 원톱 여주인공을 맡았다. 개성 있고 매력적인 여자 캐릭터는 웬만큼 다 맡아온 그녀에게도 작품의 전면에 나서서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의 드라마틱한 삶을 연기할 기회를 얻은 것은 의미가 크다. “흥미로운 인물을 연기하고 싶다는 바람은 있지만, 저 배역을 꼭 따내겠다는 결연함으로 스스로를 속박하진 않아요. 제게 기회가 주어지면 그때부턴 역할에 올인하지만요. 배우가 작품을 만나는 건 운명 같아요. 배우의 의지뿐만 아니라 주변 상황과 시점이 잘 맞아 떨어져서 그 역할을 만났을 때 정말 인연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대해 감사해 하면서도 설레는 눈치였다.
엘리자베트가 실존했던 인물인 데다 그녀가 지닌 고뇌의 심연을 좇으며 일생을 다루는 작품이라 큰 책임감과 부담감이 따를 것이다. 엘리자베트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인생의 주요 장면들이 조각조각 이어지니 장면 간의 연결 고리를 찾는 것도 숙제다. 내면 깊숙이 들어가서 그 인물을 공감하고 연기하는 게 힘들고 어렵지만, 김선영은 그렇기에 작업이 더 재미있다. “여왕의 신분이지만 그녀도 한 인간이에요. 이 사람이 이때 무엇을 느꼈을까, 이 작품을 만든 작가가 의도한 것은 무엇일까, 그런 걸 알아가는 게 재밌어요. 이 장면에서 목적한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갑자기 내 안에서 어떤 것이 툭 튀어나올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짜릿하죠. 물론 그것 또한 완성된 게 아닐 거예요. 그래서 무언가가 더 있을 거라고, 호기심 있게 생각하고 파고드는 거죠.”
김선영은 그동안 맡은 여성 캐릭터 중에 가장 어려운 인물을 만났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이전에 마리아와 루시, 알돈자 등 순탄치 않고 힘든 삶을 살았던 인물들을 주로 연기했다. 그들의 고통에는 다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다른 사람에게 인권을 착취당하며 느낀 그들의 절망과 슬픔에는 뚜렷한 연민의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황후의 자리에서 화려한 일상을 영위하는 엘리자베트가 느끼는 괴로움은 관객의 공감을 얻기 힘들 수 있다는 게 김선영의 우려이다. 집시처럼 자유롭게 살았던 아버지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엘리자베트는 결혼 후 엄격한 황실의 뜻을 강요받으며 자유를 박탈당한 데 답답함을 느꼈다. 따라서 김선영은 아버지를 동경했던 어린 시절, 그리고 그와는 대비되는 궁정 생활을 통해 자유를 원했지만 그것을 영위할 수 없어 괴로워했던 엘리자베트의 감정을 세심하게 전달함으로써 드라마의 설득력을 얻는 것이 관건이라 말했다.
이번에도 김선영이 맡은 역할은 잔잔한 수면이 아닌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저는 밝고 단순한 성격인데, 희한하게 그동안 맡은 역할들은 거의 다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해요. 아이러니하죠.” 그녀가 실제 성격과 비슷한 캐릭터를 맡았다면, 또는 그녀의 인생도 파란만장했다면, 지금보다 더 감동적인 연기를 보여줬을까. 그녀는 자신과 전혀 다른 인물의 삶은 어떤 것인지 궁금하고 또 그들을 감싸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그 인물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감정을 더 잘 전달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답했다. 무대 아래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도 아름다운데, 무대 위에서 절절하게 삶을 갈구하는 모습도 늘 벅찬 감동을 준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자신의 심연을 헤매고 있는 외롭고 고독한 영혼에게 공감하면 좋겠어요.
저의 연기를 보고 노래를 듣고 나서 관객들이 위로와 온기를 얻는다면 정말 행복하죠.
다시 거울 앞에 서다
1999년에 데뷔한 김선영은 올해 배우로서 무대에 선 지 십삼 년이 된다. 사람들은 으레 매해 나이를 더해가는 것을 속상해하는데, 배우라면 그에 더해 가능한 배역이 줄어들까 조바심이 날지도 모르겠다. “저는 뭐, 공주처럼 대단히 예뻤던 적이 없었어요. 어려서부터 원체 성숙해보였으니까요.” 그녀는 시원하게 웃더니, 오히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수 있는 성숙한 아름다움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의 활약상을 되짚어 봤을 때 신인 시절보다 경력을 더해갈수록 무대 위에서의 반짝임이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마리아 마리아>를 하기 전에 뮤지컬 배우를 그만둘까 생각했어요. 데뷔한 지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배우가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만난 <마리아 마리아>라는 작품 덕에 연기가 재밌어지고 무대가 더욱 좋아져서, 김선영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무대에 섰다. “단지 제가 어떤 작품을 잘해 내고 아니고의 문제를 떠나서, 한 작품과 제 인생이 어떻게 만나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느냐에 따라서, 그때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느껴지곤 해요.” 그녀는 이후 <에비타>의 주연을 맡아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때, 그리고 <엘리자벳>을 만난 지금도 배우로서 삶에서 중요한 순간으로 남을 듯하다고 넌지시 말했다. “저는 지금도 제가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하고 있는 그 어떤 연기들도 완성된 적이 없어요. 제가 지금 보여드리는 엘리자베트의 연기가 최선이라 하더라도, 5년 또는 10년 뒤에 지금을 돌이켜보면 또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거예요. 물론 좀 더 어렸을 때는 제가 배우로서 많이 이룬 것 같아서, 완성된 것으로 착각한 적도 있었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매사에 배울 것이 무척 많다는 걸 알게 되고, 그래서 인생이 정말 재밌어요.” 사람이 여전히 자라고 있다고,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는 늙지 않는다는 걸 그녀를 통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첫 만남에서 그녀에게 무척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신의 일과 삶을 수용하는 태도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움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연륜과 종교적 믿음,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여유로움의 소유자는 치열하게 원했던 바를 얻은 자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섞였던 자라는 점이다. 지금의 그녀를 있게 한 과거의 경력들은 자신의 의지로만 가능했던 것이 아니고 인연 덕이라 믿으며, 그렇기에 앞으로 배우로서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그녀 자신도 궁금하고 또 기대된다고 했다. “제가 좋아서, 재밌어서 하는 일인데, 주위에서 과분한 칭찬을 해주시면 정말 화들짝 놀랄 때도 있어요. 내가 정말 그런 것인지…. 그런 데 감사해서라도 더 좋은 배우가 되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기죠. 그리고 그런 기대와 즐거움을 무대 위에서 황홀하게 누리려고요. 그래야 관객들도 재밌게 보실 테니까요.”
전 배우로서 다른 인물을 연구하는 만큼, 저 자신에 대한 관심이 정말 많아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그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내게 이런 모습이 있구나 하고 발견하는 것도 재밌어요.
저를 알아가는 것이 곧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길이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1호 2012년 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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