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 나비처럼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날개가 필요하다
선량함의 미덕과 함정
뉴스를 보다가 TV를 꺼버리는 일이 잦아졌다. 새로운 소식이 아닌 끔찍한 사건이나 추악한 사람들로 채워진 뉴스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스트레스가 된 지 오래다. 흉하고 궂은 이야기에 우리의 마음은 지쳐 굳어버렸다. 하지만 조그만 미담에도 고맙다는 댓글이 주렁주렁 달리는 것이나 안타까운 사연을 마주할 때 쌈짓돈을 털어 보태려는 사람들이 적잖은 것을 보면, 우리의 마음(感)은 언제나 움직일(動) 준비를 하고 있음을 금세 알 수 있다. 우리에겐 감동이 필요하다. 이것이 우리를 인간이라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웹툰 <나빌레라>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동했던 이유도 같다. 약하지만 선량한 사람들이 함께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 소소하면서도 따뜻한 이야기가 주는 편안함은 복잡하게 얽혔다가 통쾌하게 풀리는 이야기가 주는 재미와는 또 다른 판타지를 경험케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별다를 것 없는 일상에서 각박함에 휩쓸리지 않고 인간다운 온도를 서로 나누는 그림만큼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풍경은 없으니 말이다. 뮤지컬 <나빌레라>의 관객 중에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이 많았던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 이유 중에 배우 진선규가 차지하는 몫은 크다. 그가 연기를 잘하는 배우인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과장하지 않는 진솔함과 집중력을 흩트리지 않는 성실함은 시종일관 은근하게 빛난다. 심덕출의 캐릭터가 새로운 것은 그가 ‘가르치려는 노인’이 아니라 ‘배우려는 어른’이기 때문인데, 진선규에 의해 ‘심덕출’이라는 인물은 자주 볼 수 있는 치매 노인에서 드물게 마주치는 진짜 어른으로 구체화된다. 체념으로 완고해지지 않고 겸손으로 부드러워질 때 늙음은 보석처럼 빛나는 연륜이 되는 바. 나이 들어 몸은 굳어가지만 마음은 세상과 사람을 향해 넉넉해진 노인 심덕출과 선량한 배우 진선규는 나이를 뛰어넘어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하지만 웹툰의 후광과 배우의 역량을 제쳐놓고 볼 때 뮤지컬의 옷을 입은 <나빌레라>가 작품으로서 충분히 제 역량을 쌓았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선량함과 따뜻함은 결과일 때 빛나는 것이지 전제일 때는 강박이 되기 십상이니 말이다. 이 공연 역시 착한 뮤지컬의 강박에서 그리 자유로워 보이진 않는다.
‘무엇이든’에서 ‘아무것도’로
사실 <나빌레라>는 공연의 틀로 옮기기에 만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착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과 섬세한 좌절은 극이라는 진폭이 큰 틀에서 자주 이야기다운 굴곡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극적인 갈등보다는 내적인 좌절이 많고 대결해야 할 인물이 아니라 넘어서야 할 장애물이 핵심이니만큼 인물과 상황이 그만큼 구체적이지 않으면 이야기의 맛은 살아나기 어렵다. 첫 장면이 의아했던 건 이 때문이다. 발레를 소재 삼은 뮤지컬의 시작이라고 보기에 아무런 공연의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은 밋밋함은 차치하자. 이야기는 70세 노인 심덕출이 병원에서 치매를 진단받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극에 굴곡을 만들어낼 재료를 시작부터 아예 드러내는 거다. 이제부터 심덕출이 하는 모든 일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극적 장애물이 아니라 인물의 배경이 되었을 때 치매는 더 이상 ‘안타고니스트’로서의 내적인 기능을 갖지 못한다.
심덕출이 주인공인데 그에게 극적인 추진력이 없으니 이야기의 분위기는 착해졌을지 몰라도 극의 흐름은 딱 멈춰버리고 만다. 치매라는 삶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발레를 배우고, 청년을 다독이며, 식구들까지 배려하는, 완벽하게 착한 우리 덕출 할아버지. 결심, 도전, 기대, 희망 등등 삶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그의 노래에서 살아온 시간에 대한 회한이나 지금의 도전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심덕출 옹의 모든 대사와 가사가 계속 동어반복처럼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몇 개 안되는 노래로 돌려막는 것 같은 기시감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이야기도 착해, 음악도 순해, 하지만 같은 결심과 비슷한 선율을 몇 번이나 계속 보고 듣고 있자면 착한 애들이 사람 질리게 할 때의 느낌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이 동어반복이 심덕출이라는 캐릭터의 정체성을 흩어놓는다는 데 있다. 그는 분명 삶의 끝자락에 서 있건만 정작 그에게서 노인의 세월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날아오르려는 그의 결심에서 끈질기게 발목을 잡았던 삶의 험난한 여정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의 발레는 못다 한 취미생활의 연장에 불과할 터. 이 극에서 반복되는 심덕출의 꿈이 애매해지는 지점이 여기이다. ‘뭔가 하고 싶은 데에 이유가 어디 있어, 그냥 하는 거지. 좋으면 되는 거야’라는 말은 청년의 욕망이지 노인의 것은 아니다. 노인의 결심에는 언제나 삶의 슬픔이 깔려 있게 마련이다. 청년은 이유가 없어도 달려갈 수 있지만 노인은 이유 때문에 꺾인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노인이지만 여기에 진짜 노인은 없다.
없는 것은 또 있다. 노인 덕출과 청년 채록의 우정이다. 원래 이 작품은 서로의 가진 것과 없는 것이 요철처럼 맞물리는 두 사람이 발레라는 매개를 통해 우정을 쌓아가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런 관계를 구축하기에는 청년 채록의 고민과 갈등이 분명치 않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어떤 자극을 주고받고 결과적으로 어떤 시너지를 발휘하게 되는지도 명확치 않기에, 채록이 다시금 자기의 꿈을 끌어안는 성장의 순간에서나 꿈을 이룬 채록과 기억을 잃은 덕출이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잔잔한 감동이 훅 몰려와야 하건만, 그런 너울은 찾아보기 어렵다. 나이와 상황을 뛰어넘어 예술을 통해 우정을 나누는 노인과 청년이라! 하지만 이토록 멋진 이야깃거리를 이 작품은 손아귀에서 놓쳐버렸다. 치매라는 소재도, 노인이라는 주인공도 놓쳐버리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놓친 게 이것뿐일까.
실패한 시너지 효과
<나빌레라>를 뮤지컬로 만들 때 공연의 키워드는 당연히 발레일 터. 하지만 이 작품에서 가장 의아한 것은, 발레 장면이 가장 빈약하다는 사실보다도, 발레가 나오는 장면마다 노래를 집어넣는 억지스러움이다. 어린 발레리나의 춤 외에 이 작품에서 제대로 된 발레의 미장센은 연출되지 않고, 발레단의 연습 장면처럼 춤으로 보여줘야 하는 순간에도 자꾸 비슷비슷한 노래가 끼어들어 온다. 서재형은 미장센으로 유명한 연출가이건만 공연 리플릿을 보지 않았다면 그가 연출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앞서 언급한 첫 장면도 그렇고, 발레라는 공연 언어는 표현의 재료로 전혀 가공되지 못한다. 박동우 무대디자이너의 무대 역시 마찬가지다. 건물 형상의 회색빛 무대는 노인을 둘러싼 이런저런 황폐함을 표현하는 데는 제격이었는지 모르지만, 청년의 꿈과 발레의 빛을 상징과 의미로 품기에는 너무나 단조롭게 규격화되어 있다. 노인의 공간일 뿐 아니라 청년과 춤과 꿈의 공간이어야 하건만, 세트가 부지런히 돌고 돌아도 이런 식의 공간 확장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리플릿을 보지 않았으면 이 역시 몰랐을 뻔했다.
공연을 보면서 가장 뜨악했던 부분은 치매 증상이 도져서 횡단보도에 주저앉은 덕출에게 채록이 ‘울지 마, 꼬마야’라며 말을 걸 때이다. 이 작품이 노인과 치매를 다루는 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은 극 전반에 걸쳐 자주 드러나지만, 이 말은 그 정점을 보여주는 최악의 대사이다. 지금까지 봐왔던 작가 박해림은 이야기를 사건으로 풀어 나가는 데서 어려움을 보이긴 했어도 최소한 이런 대사를 쓰는 작가는 아니었다. 전작 <호프>에서 음악의 드라마다움을 보여주었던 작곡가 김효은의 결과물도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이렇게 아무 데서나, 아무 개성 없이, 비슷한 선율이 반복되다니. 음악은 너무 흔해서 오히려 존재감이 없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개성 있는 창작진들이 한데 모여서 서로의 단점을 부각시키는 네거티브의 시너지를 발휘한 셈이다. 어떤 재료도 작품을 날아오르게 할 날개가 되지 못한 만큼 이 작품은 아직은 나비라기보다는 번데기에 가까워 보인다. 번데기가 나비로 우화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잘못하면 나방이 날아다닐 수도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9호 2019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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