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의 한국인들
국가와 국적의 전통적인 의미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는 21세기 오늘. 놀랍게도 K팝이 빌보드 차트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처럼 K뮤지컬도 브로드웨이에 화려하게 입성할 수 있을까. 새로운 기회를 찾아 더 넓고 큰 곳 브로드웨이로 떠난 한국인들, 낯선 땅에서 작은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미스 사이공>, 정진우의 미국 투어 공연기
정진우 @jinu108
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뮤지컬배우.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연기 석사 과정을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East West Players’ 극단의 뮤지컬 <라카지 오 폴>에서 장 미셸 역으로 데뷔했다. 2017년에는 한국 음악 시장을 소재로 해 주목받은 오프브로드웨이 뮤지컬
2018년 2월 - 치열했던 오디션
내가 주연으로 참여한 오프브로드웨이 뮤지컬
나는 2018년 2월부터 총 4차례의 오디션을 거친 후 합격했다. 마지막 오디션 때는 영국에서 온 크리에이티브 팀 전원이 참석했고, 프로듀서에게 보여주기 위해 오디션 과정을 녹화했다. 오디션이 진행된 40여 분간, 다양한 디렉션을 받으며 작품의 방향성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다.
10차례까지도 오디션이 진행되는 경우가 있는 점을 감안하면 나는 비교적 빨리 합격 통보를 받은 편이라 마음이 벅차올랐다. 어릴 적부터 동경해 온 세계적인 뮤지컬의 주연으로 무대에 서게 되다니 믿어지지가 않는다.
투어 팀은 앞으로 2년간 미국의 40개 이상 도시(캐나다 토론토 포함)를 짧게는 1주에서 길게는 5주간 머물며 공연하게 된다. 공연할 극장은 대부분 3000석 전후의 대극장이다. 정규 스태프와 지역 스태프까지 합치면 100명이 훌쩍 넘는 인원에, 30톤 트럭 11대가 움직이는 대규모의 여정이라고 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2018년 8월 - 거장들과의 리허설
뉴욕에서의 리허설 시작! 연출가 로렌스 코너, 작곡가 클로드 미셸 쇤베르크, 안무가 밥 에이비언 등 뮤지컬계의 거장들이 리허설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고 그들 앞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본격적인 연습에 앞서 연출의 주도하에 작품의 ‘실제성’이라는 화두로 대화가 시작됐다. 연출은 배우가 극을 잘못 해석하고 연기할 경우, 관객이 등장인물의 생존과 희생에 집중하기보다 작품의 내용을 인종 차별, 여성 상품화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한 <미스 사이공>은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 실제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공연을 보러 오는 일이 많을 거라며 연기할 때 사명감과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고 말해 마음이 숙연해졌다. 나 또한 투이를 단순한 악역이 아닌 전쟁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운 사람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견해를 밝혔고 다행히 연출도 나와 생각이 일치했다.
리허설 기간에 우리는 베트남과 미국 각자의 시각에서 베트남 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여러 편을 함께 시청하고,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에 대해 자주 토론했다.
2018년 10월 - 마침내 시작된 공연
첫 투어 도시 프로비덴스에서 테크 리허설을 마치고, 마침내 본 공연이 시작되었다. 본 공연 시작을 축하하는 의미로 프로덕션 측에서 성대한 오프닝 파티를 열어주었는데, <미스 사이공> 원제작자인 캐머런 매킨토시를 비롯하여 작곡가, 작사가 등을 모두 만날 수 있어 영광이었다. 모두들 현재 우리의 공연이 북미에 올라갈 마지막 <미스 사이공>이고, 지난 30년간 봐온 <미스 사이공> 중 최고의 무대였다고 극찬해 나를 포함한 모든 배우가 깊이 감동받았다. 특히 작사가 리처드 말트비 주니어는 내가 해석한 투이가 정말 마음에 들고 잘 해내 고맙다고 말하며 나를 안아주었다. 리허설 동안 힘들었던 기억이 한 번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전미 투어는 여러모로 특별한 경험이다. 배우로서 미국 각 도시를 대표하는 극장에서 공연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고, 개인적으로는 방문하는 도시의 유명 관광지를 돌아보며 즐길 수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미국을 대표하는 공연장 중 하나인 워싱턴 D.C.의 케네디 센터다. 12월 31일 공연 후 케네디 센터에서 주최하는 신년 파티에 초대받아 각계 유명 인사와 새해를 맞이하는 특별한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이 무렵 <미스 사이공> 공식 프로그램북에 내가 투이를 연기하는 모습이 크게 실린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공연에 대한 각 지역 언론의 반응은 굉장히 좋았다. 여러 언론 매체에서 역대 최고의 <미스 사이공>이라는 평가를 내놓아 배우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한번은 전 출연진을 대표해 TV 인터뷰에 초청을 받았는데, 인터뷰어가 내 연기를 칭찬하며 투이의 인간적인 모습에 공감했다고 말했다. 내 연기가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고 있는 것 같아 뿌듯했다.
2019년 현재 - 관객과의 추억을 돌아보며
투어 공연을 하며 굉장히 다양한 관객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휠체어를 탄 청년이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베트남 전쟁에서 생화학 무기에 노출된 탓에 하반신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그는 자신에게 너무나 중요한 이야기를 무대에서 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이렇게 실제로 전쟁의 영향을 받은 관객을 만날 때마다 내가 하는 일의 무게를 느낀다.
또 다른 기쁨은 바로 한인 관객을 만나는 것이다. 공연 리플렛에서 내 이름 ‘Jinwoo Jung’을 발견한 한국분들이 공연 후 찾아와 ‘무대에서 한국인을 볼 수 있어 자랑스러웠다’고 얘기하시곤 한다. 그때마다 뜨거운 동포애와 뿌듯함을 느낀다. 공연을 본 고등학교 연극반 학생들, 한국계 배우 지망생들과 소통하며 내 경험과 지식을 전달하는 것도 요즘 내가 배우로서 느끼는 큰 보람 중 하나다. 아직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배우가 많지 않아, 미국 무대에 도전하고 싶은 분들이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의 경험이 미국 무대에 도전하고 싶은 분들에게 동기부여가 되길 바라며, 조언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해드리고 싶다. 앞으로도 공연을 통해 더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고, 배우를 꿈꾸는 다른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살아 있는 배우가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8호 2019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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