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에너지를 재충전하기 위해 뉴욕으로 건너갔던 고영빈이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를 통해 활동을 재개한다. 정확히 일 년.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뉴욕에서 가진 오랜만의 휴식은 그에게 보약이 되었나보다. 언제나 부드러운 미소로 상대를 맞아주던 그의 얼굴에는 여유마저 넘치고 있었다.
<레인 맨>을 마치고 갑자기 뉴욕으로 떠나서 많은 분들이 놀랐던 것 같아요.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음, 그땐 작품을 열심히 잘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하는 것마다 실망스럽고 못하는 것 같고. 사람이 점점 위축되니까 무대가 무서워지는 거예요. 특히 뮤지컬 무대가. 제가 노래를 잘하는 배우가 아니다보니 벽에 많이 부딪쳤던 것 같아요. 잠깐이라도 떠나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그런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생각을 좀 하고 싶었어요. 과연 내가 이 길을 계속 가도 되는 것일까 하는. 15년 넘게 쉬지 않고 해온 일들,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뭘 잘하고 못하는지를 정리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정리는 잘 됐어요? 어느 정도는요. 재능이 없거나 내가 하기 싫으면 그만둬야지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는데 아직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미국 가서 제일 먼저 느낀 건 무대 밖에서 내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였어요. 극단 시키에서 같이 있었던 동생들은 야무지게 일본어 자격증을 따서 미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댄스 학원 다니고 오디션도 보러 다니고, 아르바이트하면서도 레슨 꾸준히 잘 받아서 꼬마들 가르치는 일까지 하고 있더라고요. 창피했어요. 그동안 내게 주어진 것들이 너무 많다보니 감사하기는커녕 귀찮아하면서 안일하게 시간을 보냈으니까. 열심히 살아야겠다 싶었어요. 내년이면 벌써 마흔이거든요. 노후의 안정적이고 편안하고 깊이 있는 삶을 위해서는 지금부터 10년을 정말 열심히 뛰어야 할 것 같아요. 일도 열심히 하고 다른 분야의 공부도 더 해보고 싶어요. 어학 공부나 그동안 게을러서 못했던 음악 이론, 피아노도.
뉴욕에선 뭐하며 지냈어요? 공연은 당연히 많이 챙겨 봤겠죠? 공연을 많이 보긴 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안 본 공연들이 워낙 많아서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특히 오프 공연들은. 거기서 뭘 특별히 했다기보다는 어학원 다니고 공연 보고, 한국 들어오기 석 달 전부터는 발레 레슨 받고 그 외의 시간은 그냥 ‘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종일 공원에 누워 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종일 걸어 다니면서 사람 구경하고. 정말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골목골목을 걷고 또 걸었어요. 그런 시간을 여기선 누리지 못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땅을 한 시간 이상 밟아본 기억이 서른 넘어서는 없거든요. 늘 네비게이션을 따라 다니느라 골목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았죠. 누군가와 함께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지는 거. 나 혼자서, 아무 관심도 없이.
왜 그랬던 것 같아요? 글쎄요, 그냥 오랫동안 혼자 살다보니 삶을 즐기기보다는 그저 잘 살아야겠다, 남들과 똑같으면 안 된다, 나는 특별해야 한다, 뭐 이런 생각들을 주로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다른 것’에 집착하게 된 것 같고. 남들 안 가본 곳에 가고 싶고 안 해본 거 하고 싶고. 근데 뉴욕에서 지내면서 처음으로 내가 하면 같은 일도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다른 것을 찾기보다는 내가 해서 달라지면 되는 건데 그걸 계속 피했던 것 같아요. 남들이 했다고 하면 관심도 없고 하기도 싫고. 너무 먼 미래, 큰 목표를 생각하느라 지금 당장 해야 할 것들을 놓치는 경우도 허다했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 그 길이 보이는 건데 괜히 고민하다가 후회한 적도 많고. 여하튼 되게 복잡하고 말도 안 되는 생활들을 했어요, 내가. 다행히 지금은 눈이 맑아졌어요. 생각도 진취적으로 하게 됐고. 놀다보니까 나이에 맞게 배도 나오고 햇빛 많이 봐서 피부도 많이 늙고 주름도 생기고 흰머리도 더 늘었고요.(웃음) 근데 그게 거북하거나 싫지가 않아요. 이런 자연스러움을 무대 위에서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죠.
그동안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나요? 자연스러움보다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식의 작업들을 해온 거 같아요. ‘나 이만큼 했습니다’ 하고 보여줬는데 남들이 인정 안 해주면 화나고, 남들 의식하고 잘 보이려고, 욕 안 먹으려고 애쓰며 살았죠. 남들 하는 건 다 마음에 안 들었고 잘나가는 사람에 대한 시기도 있었고. 근데 이제는 좀 자유로워지고 싶어요. 남보다는 나 스스로에게 창피하지 않고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이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면 더 좋겠지만 내가 열심히 했으면 그걸로 됐어요.
스스로 만족할 정도로 열심히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나에 대한 기대치를 확 낮췄어요.(웃음) 우선은 단순히 시간을 기준으로 삼으려고요. 작품을 위해 내가 몇 시간을 투자했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작품에 빠져 있었는지가 기준이에요. 시간을 투자하고 즐겁게 일했다면 당연히 결과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기보다는 노래 한 번 더 부르는 게 낫다고 생각을 고쳐먹었죠. 오늘의 1분 1초를 아껴서 열심히 살면 그걸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왠지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무대가 기대되는데요. 그나저나 이 작품은 어떻게 출연하게 된 건가요? 참 감사한 게, 예전에 극단 시키에 있을 때에도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겨울연가> 측에서 전화가 왔는데 이번에도 그랬어요. 내가 약속한 1년은 다 지나가고 있는데 놀기만 한 거예요. 사람들이 뉴욕서 뭐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나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 거죠. 공부를 더 할까 싶다가도 주머니 사정이 걱정되기도 하고. 그때 마침 연락이 왔어요. 작년에 공연을 보면서 내가 하면 좋겠다, 잘할 수 있겠다 싶었던 작품이었거든요. 좋은 느낌을 갖고 있던 작품인데 연락이 와서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됐구나’ 생각했죠.
공연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요? 우리 인생에서 가장 흔하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이 좋았어요. 보통 뮤지컬 무대는 조금은 과장되고 판타지적이고 상상을 초월하는 스토리를 담아내는데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는 이상할 정도로 솔직하고 담백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엘빈도 참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의외로 토마스 역을 맡았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토마스는 어떤 인물인가요? 다들 그렇게 얘기하는데, 토마스 하기를 잘한 것 같아요. (왜요?) 앨빈을 했으면 더 쉽게 갔을 거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토마스는 고영빈이에요. 가장 보통 사람인 거죠. 아주 특별한, 천사 같은 친구 앨빈을 만나서 죄책감도 생기고 능력도 없어 보이고. 보통 사람이 약간은 특별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그런 이야기가 바로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예요.
토마스의 어떤 점이 그렇게 당신을 닮았나요? 살다보면 내가 분명히 틀릴 수도 있고 아니라고 느낄 때가 있잖아요. 근데 내가 이미 맞다고 했으면 아니라고 생각해도 창피하지만 고집을 부릴 때가 있어요. 토마스도 마찬가지예요. 앨빈이 자기 글의 근원이고 그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부정하잖아요.
실제로 엘빈 같은 친구가 곁에 있는 것 같아요? 아, 갑자기 슬퍼지는 것 같아요. 앨빈처럼 삶에 영향을 미치는 친구는 없는 것 같아요. 아, 특별한 친구를 뒀으니 토마스가 특별한 사람일 수도 있겠어요.
토마스 역에 카이와 더블 캐스팅되었어요. 노래 잘하기로 유명한 사람인데 살짝 얄밉지 않아요? 내가 노래 잘하는 사람들 좀 미워하는 걸 아는군요. 하하. 근데 카이는 순수하고 열심히 하는 친구라 노래 잘해도 밉진 않아요.(웃음) 가끔 나도 기차 화통처럼 멋있게 내지를 수 있을 정도로 노래를 잘하는 테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근데 그때마다 다시 생각을 하죠. 나는 나만의 무기가 있다고. 내 목소리는 드라마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 목소리가 아닌가 싶어요. 물론 고음역대에서는 나를 저해하고 방해하는 요소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노래 레슨을 따로 받지는 않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 내가 고집부리는 게 있어요. 어디 가서 발성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레슨을 받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좋아졌겠죠. 고음역대도 쉽게 뚫었을 거고. 하지만 누구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이 작품은 새롭게 시작하는 고영빈 배우의 첫 번째 작품일 수 있겠어요. 섣부른 질문이긴 하지만 어때요, 자신 있나요? 조심스럽긴 하지만 조금 자신이 있어요. 여태까지 했던 작품들보다 사람들을 조금 더 감동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음악적으로도 전보다 향상됐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고. 여러 가지 연기를 해볼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어서 기대가 돼요. (이)석준 형에 대한 믿음과 더 많이 준비하고 싶게끔 열어놓고 있는 연습 분위기 덕분인 것 같기도 해요. 작품을 생각하면 심장 박동 수가 빨라져요. 공연이 다 끝난 후에도 사람들이 객석을 떠나지 못하는 상황이 꼭 한번 왔으면 좋겠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7호 2011년 10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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