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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S] <안나 카레니나>, 기차역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사랑 [No.188]

글 |김주연 공연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마스트엔터테인먼트 2019-05-16 5,992

<안나 카레니나>
기차역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사랑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는 아마도 불륜에 관해 쓰인 모든 이야기들 중 가장 아름답고 잔인한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거쳐 연극, 발레, 뮤지컬, 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재해석되며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이 작품을 ‘기차’라는 키워드를 통해 들여다본다. 

 

19세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고위 관리 카레닌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아내 안나는 모스크바에 사는 오빠 스티바의 가정 문제에 도움을 주기 위해 모스크바행 기차에 오른다. 모스크바 역에서 안나는 한 잘생긴 귀족 청년과 마주치게 되는데, 여행 내내 안나의 기차 옆 자리에 앉았던 귀부인의 아들, 알렉세이 브론스키다. 첫 만남에서부터 브론스키는 안나의 매력에 본능적으로 이끌리고, 이후 무도회에서 몇 번 더 만나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정숙한 아내이자 엄마로서의 도리를 잃고 싶지 않았던 안나는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끝내기 위해 서둘러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는 기차에 오른다. 그리고 바로 그 기차에서, 모스크바에서부터 자신을 따라온 브론스키를 다시 만나고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열정을 확인하게 된다. 『안나 카레니나』의 전반부는 이처럼 안나와 브론스키의 만남과 끌림, 열병 같은 사랑에 대한 아름답고 낭만적인 묘사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이들의 첫 만남과 재회, 격정적인 사랑의 예감은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두 기차와 기차역에서 이루어진다.  



 

비극적인 운명의 암시 

이렇게만 보면 『안나 카레니나』에서 기차역은 마치 낭만적인 로맨스의 배경, 운명 같은 사랑이 이루어지는 마법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찬찬히 읽다 보면, 이 작품에서 기차역은 로맨틱한 연애 장소라기보다는 죽음과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잔인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실 음울한 기운은 가장 첫 장면, 안나가 모스크바 역에서 브론스키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다. 두 사람이 첫 만남에서 강렬한 끌림을 느끼는 순간, 기차역에는 찢어질 듯한 굉음과 비명소리가 들리고 인부 한 명이 기차에 끼어 사망했다는 끔찍한 소식이 들려온다. 두 사람의 만남부터 이미 기차역은 그들에게 드리워진 비극의 그림자를 선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이미지는 이후로도 계속된다. 작품 전반부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무도회 장면에서 안나는 새까만 드레스에 진주 목걸이를 하고 등장한다. 이는 장밋빛 명주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 키티의 싱싱한 젊음과 대비되는, 안나의 성숙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훗날 그녀가 맞이하게 될 비극적 죽음을 예고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안나는 그녀의 사랑이 시작되는 무도회에서부터 이미 상복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뛰어든 사랑에 지치고 상처 입은 안나가 일종의 노이로제 증세에 시달리다 결국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고 만다. 첫 만남에서부터 불길한 암시를 보였던 기차역은 결국 안나와 브론스키 커플의 사랑이 파국을 맞이하는 장소로서 다시 한 번 그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것이다.

 

러시아 문학에서 기차의 테마 

사실 러시아 문학에서 ‘기차’의 이미지는 『안나 카레니나』 뿐만 아니라 여러 작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의 첫 장 제목은 ‘5시행 급행열차’이다. 긴 장례식 행렬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곧 주인공 유리 지바고의 아버지가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역시 주인공 므이슈킨 공작이 스위스를 떠나 러시아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19세기까지 러시아의 가장 주요한 교통수단은 기차였다. 마차로 며칠이면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유럽 여러 나라들과는 달리, 광활한 시베리아 대륙을 품고 있는 러시아는 긴긴 기차 여행을 통해서만 먼 곳으로의 이동이 가능했고, 덕분에 철도 여행이 상당히 발전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를 잇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여전히 러시아를 대표하는 아이콘 중 하나다. 오직 앞으로만 향해 가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의적으로 멈출 수 없는 긴 기차는 그 자체로 인생을 비유하는 하나의 상징이 된다. 작가들은 기나긴 인생의 여정, 오로지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는 시간, 그리고 중간에 마음대로 내리거나 탈 수 없는 인생의 조건을 기차를 통해 종종 은유하곤 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가 비극적인 사랑을 시작하고, 또한 그 사랑을 잔혹하게 끝내는 공간으로 기차역을 택한 것은 이러한 러시아의 문학적 콘텍스트와도 이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를 기차역에서 죽게 만든 장본인인 작가 톨스토이가 죽음을 맞이한 곳 또한 러시아의 한 시골 기차역이라는 사실은 묘한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생의 말년, 유서를 쓰고 몰래 집을 나온 톨스토이는 정신적 명상을 위한 마지막 방랑길에 오르나 쇠약해진 몸 때문에 몇 정거장 가지 못하고 아스타포보라는 작은 기차역에 앓아눕게 되고, 결국 그곳에서 혼수상태에 빠진 채 세상을 떠난다. 이래저래 톨스토이와 기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 듯하다. 



 

무대와 스크린 위의 다양한 기차들  

영화로, 연극으로, 뮤지컬로 또 발레로 만들어진 수많은 <안나 카레니나>에서도 안나가 기차에 몸을 던지는 마지막 장면은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인상적인 모습으로 관객들의 마음 깊이 각인되어 왔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기차 자체보다는 철로에 몸을 던지기 직전 안나의 표정을 클로즈업함으로써 그녀의 내면적 고통을 극대화시키는 데 주력한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거대한 철제 구조물과 LED 영상을 이용해 2.5미터 길이의 기차와 19세기 러시아 기차역의 풍경을 무대 위에 생생하게 재현했다.

한편 보리스 에이프만이 안무와 연출을 맡은 발레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특별한 무대 장치 없이, 검은 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기차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집체 군무로 기차를 은유한다. 기차의 거대한 기계음을 배경으로 차례차례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기계적인 움직임 속으로, 두 팔을 벌린 안나 역 무용수가 뛰어내린다. 이들의 군무는 앞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 장면에서도, 정숙한 사모님에서 한순간에 불륜의 주인공으로 몰락한 안나를 손가락질하는 인물들의 군무를 통해 비슷하게 반복된 바 있다. 즉, 안나가 몸을 던진 기차를 이들 사교계 인물들의 군무와 같은 선에 놓음으로써, 무엇이 안나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를 시각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8호 2019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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