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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해적>과 <최후진술>, 엄마 해적이 최후진술 했으니 울지 마세요 [No.188]

글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 사진제공 |장인엔터테인먼트 2019-05-08 4,271

<해적>과 <최후진술>
엄마,  해적이 최후진술 했으니 울지 마세요.


 

팀플레이의 결과물

다작이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오르는 직군은 배우이다. 요즘은 한 명의 배우를 같은 날에 다른 공연에서 만날 수 있다더라. 다작을 넘어 이제는 동시작(?)의 경지에 이른 지경이다. 그런데 다작을 하는 배우 못지않게 다작을 생산한 작가가 있다. 이희준이다. 대충 생각나는 대극장 뮤지컬만 해도 <미인>, <신흥무관학교>, <다윈 영의 악의 기원>, 벌써 세 작품이다. 중소극장 규모의 작품도 이에 못지않다. <천사에 관하여: 타락천사 편>, <최후진술>에, 정기적으로 올라가는 <마마, 돈 크라이>까지 합하면 이건 하루에 두 탕 뛰는 배우 저리 가라 할 일정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2018년에는 이희준의 작품만으로 평일 관람 일정을 채울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더 놀라운 건 재공연 작품보다 신작의 비율이 높다는 사실. 이렇게 다작이 가능한 배경에는 ‘팀 이희준’이 있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사람들이 팀을 이루면 작업은 훨씬 원활해지게 마련일 테니 말이다. 여러 이름이 있지만 자주 등장하는 선수 명단은 정해져 있다. 김운기는 이희준 작품의 전담 연출가이고, 박정아도 앞에서 언급한 목록 중 절반이 넘는 작품을 함께한 단골 작곡 파트너인바, 이 세 사람이 함께 만든 작품은 <사춘기>를 시작으로 <마마, 돈 크라이>를 거쳐 최근 공연되고 있는 <해적>과 <최후진술>까지 여럿이다. 이 작품들에는 ‘팀 이희준’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러 개의 작품이지만 묶어서 이야기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이 때문이다. 



 

낭만으로 달려가지만

‘팀 이희준’의 작업에는 낭만적인 경향이 농후하다. 그의 주인공들을 보시라. 뱀파이어, 마피아, 보드빌 광대, 혁명가 등등 대부분 비일상적이거나 예외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에게는 자기 세계의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다는 공통된 욕망이 있다. 천재 뱀파이어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아버지가 있고, 보드빌 광대에게는 부당한 요구로 찍어 누르는 마피아가 있으며, 혁명가에게는 전복시켜야 할 세상이 있다.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만드는 유토피아이거나 아니면 꺾이지 않는 결기로 지켜 나가는 나의 세계이거나. 물론 이런 일을 가능케 하는 궁극적인 힘은 예술과 사랑이다.  

<해적>과 <최후진술> 역시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에 있다. <해적>의 주인공은 ‘육지에서 쫓겨나고 바다에서 길을 잃은’,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해적들이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하나다. 해적들의 유토피아인 로즈 아일랜드에서 보물을 찾아 함께 모여 사는 것. 설사 이 세상이 우리의 목을 매달아버린다 해도 ‘달빛 아래에서 가고 싶은 곳을 향해 자유롭게 떠도는 우리들만의 항해’는 끝나지 않으리니, 이 멋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소설로 남을 것이다! <최후진술>의 주인공 갈릴레이는 아예 죽어서 여행을 시작한다. 귀족의 후원에 기대야 하고 교회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위대한 과학자가 던지는 일갈은 진실을 왜곡하는 더러운 권위를 향한다.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니가 뭘 알아!’ ‘조그만 창 하나로 어둠 속의 별을 볼 수 있다면’ 다시 살아갈 수 있으니, 세상에 다시 돌아간다 해도 니들이 원하는 책 따위는 쓰지 않을 것이다! 

이 두 작품에서도 작가의 낭만적 자의식은 반복되어 나타난다. 주류의 중심에 있는 작가에게 이런 비주류의 자의식이 깊게 뿌리박혀 있다는 사실이 다소 의아하긴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이희준으로 하여금 계속 자기 작품을 만들게 하는 원동력인 것은 분명하다. 작품 곳곳에는 인정할 수 없는 권위와 이해할 수 없는 요구에 짜증스러운 작가 이희준이 숨어 있다. 일례로 <최후진술>에서 밀턴이 부르는 곡을 보시라. ‘당신의 글을 감히 내가 어떻게 고쳐요’라는 가사의 맥락에는 난도질당하는 자기 글을 바라보는 작가의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작가의 고뇌와 슬픔과 시간으로 낳은 글을 어떻게 그리 쉽게 찢어발길 수 있나, 글이란 온전히 그 사람일진대. 이희준의 작품에서는 무례한 권위에 대항하는 결기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희준의 작품에서 자주 보게 되는 극적 비논리가 이해가 되기도 한다. 어쩌면 잘 짜인 극이라는 틀이야말로 그의 낭만적 기질이 거부하고 싶은 가장 큰 권위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인물의 동기가 분명하고 사건은 플롯의 논리로 잘 짜여서 결말에서는 주제와 의미가 뚜렷해지는 이야기. 이런 기준으로 봤을 때는 이희준의 작품에서 이야기할 만한 미덕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의 작품에서는 극적 논리보다는 감정의 흐름을 거칠게 따라가고 싶은 욕망이 보인다. 판타지의 장치를 사용하거나, 인물과 사건에 비약이 많은 것도 그렇고, 과장된 비장함과 발랄한 경쾌함은 논리가 아닌 기분으로 자주 엮인다. 이게 정말 잘 엮였다면 관객의 기분도 한결 나아졌을 것이다. 



 

퇴보한 제자리걸음

이희준이 작가로서 지닌 결기와 비전에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그의 공연에는 좀체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 그런 결기를 실현하기 위한 공연의 전략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공연의 세계를 추구하는데 공연은 자꾸 작가에게 의지한다. 이 팀의 맹점이 여기에 있다. 잘 짜인 극의 권위에서 벗어나려면 잘 만든 공연의 솜씨를 갖춰야 한다. 대본의 언어를 대신할 공연의 언어가 있어야 하는 거다. 하지만 ‘팀 이희준’의 공연은 언제나 이 지점에서 무너진다. 

<해적>의 달이나 <최후진술>의 별 같은, 요즘은 찾아보기도 힘들 만큼 촌스러운 조명의 활용은 크게 양보해서 레트로의 복고 취향이라고 치자. 각각 다른 곳에 놓은 네 마리의 앵무새를 조명으로 비추면서 같은 앵무새가 날아다니는 거라고 우기는 뻔뻔함이 차라리 의도적인 거였다면 좋았을 거다. 일인 다역을 설정하면서도 캐릭터의 변화를 그저 치마 한 장 두르는 것으로 해결하는 이 단순함은 배우와 연출의 공동 책임이다. 역할 바꾸기가 줄 수 있는 어떤 흥미도 끌어내지 못할 만큼 표현력이 부족하고 상상력이 빈약하다면 배우의 수를 늘리는 게 훨씬 낫다. 이들의 작품이 주로 2인극인 까닭에 미학적인 전략은 없다. 그저 경제적인 이유일 뿐. 

연출의 상상력으로 번역되어야 할 텍스트를 문자 그대로 올려버리는 무대화의 무능함은 예전부터 노정된 ‘팀 이희준’의 문제이다. 이들의 작품은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품을 떠날 때 공연다운 맛을 찾았더랬다. <마마, 돈 크라이>가 그렇잖나. 이 작품이 어떻게 마니아를 사로잡는 극으로 성장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텍스트는 여전해도 무대가 보는 맛을 키우고 배우가 즐길 맛을 제공할 때 작품은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장면을 잇기보다 장면마다 부각시키는 박정아의 음악도 이런 연출의 개입이 있을 때 더 잘 살아난다. 마치 드라마의 ‘짤’처럼 박정아의 음악은 장면의 임팩트를 ‘짤’의 호흡으로 살리기 때문이다. 단 유념해야 할 것은 ‘짤’을 이으면 의외로 재미가 없어진다는 사실. 연출은 시각뿐 아니라 청각에도 공연의 외피를 입혀야 하건만 이 작품들에서 연출이 만들어낸 부분이 무엇인지는 예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어렵다. 

초창기 그들이 선보인 일련의 공연은 당시 창작뮤지컬과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독특함이 눈에 띄었더랬다. <마마, 돈 크라이> 이후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이 창작뮤지컬 동네에 쏟아진 것을 보자면 이들의 작업이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부류의 작품이 많아진 지금, 과거의 빈틈을 그대로 안고 있는 ‘팀 이희준’의 작업은 비교우위의 개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물론 예전보다 나아진 감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내용으로 보자면 그저 성별 불문일 뿐인데 거기에 젠더 프리 캐스팅이라는 거창한 개념을 붙이는 것이나, 여러 페어를 구성해 반복 관람을 유도하는 것이나, 그 과정에서 퀴어의 코드를 만들어내는 것이나, 지금의 관객들에게 작품을 어필할 수 있는 다양한 마케팅 전술을 구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전엔 자기네들끼리 뚝딱거리며 뭔가를 만들어내는 공방의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납품 기준에 적합한 원제품을 생산하는 가내수공업을 보는 기분이다. 극의 논리가 자리를 비운 틈새를 시장의 논리가 차지한 셈이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발전도 있겠고 적응도 있겠지만 그보다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퇴보. 

 

*외부 필진의 리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8호 2019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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