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숲속의 미녀> 김기완 , 나를 위한 춤
2011년 국립발레단 입단, 2019년 수석 무용수 승급. 발레리노 김기완의 주요 이력을 한 줄로 간단히 써야 한다면 바로 이 문장이 나올 것이다. 오늘날 이 자리에 서기까지 그가 다져온 8년이란 시간. 길거나 짧다는 말로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빛나는 시간을 보낸 후 첫 무대를 기다리는 지금, 그가 관객에게 듣길 바라는 칭찬의 말은 딱 하나다. 김기완, 정말 잘한다.
자기 자신의 테두리를 직시하는 힘
수석 무용수로 승급한 지 이제 한 달 조금 지났어요. 수석의 자리에 오른 걸 실감하나요? 아뇨, 아뇨. 승급 이후 아직 무대에 선 적이 없기도 하고, 수석이라는 직함을 달게 됐지만 이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어서 이렇다 할 실감은 안 나요. 아, 저랑 가까운 사람들, 특히 단원들이 장난칠 때는 좀 실감해요. 친한 단원 동생들은 절 ‘김수석’ 이렇게 부르거든요. (웃음) 그리고 연습하다 실수하면 놀리려고 “형, 이제 이런 거 실수하시면 안 되죠” 그러고. 동생들은 분명 농담으로 하는 말인데도, 그럴 때 문득 진짜 잘해야겠단 생각이 들어요. ‘맞아, 나 수석이지’ 하는 자각이 확 드는 거죠.
아무래도 발레단 생활에 전보다 큰 책임감을 느끼겠죠? 오늘 인터뷰하러 오기 전에도 단장님께서 수석의 무게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어요. 책임감을 안 느낄 수가 없죠. 다른 것보다 단원 생활을 좀 더 똑바르게 해야겠단 생각이 드는데, 무대에 서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꼼수 없이 진실하게 임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무용수로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요. 왜냐면 제 머릿속에도 모범적이었던 선배와 그렇지 않았던 선배가 있거든요. 매일 단체 생활을 하다 보면 서로 이런 판단을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선배로서 챙겨야 할 부분을 작은 하나라도 놓치면, 그게 저한테 화살이 돼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승급 이후 강수진 단장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고 들었어요. 단장님께서 해주신 말씀 가운데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이야기가 있나요? 계약서에 사인하고 나서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단장님께서 절 부르셨어요. 잠깐 단장실로 오라고 하셔서 저는 한 십 분 정도 이야기할 줄 알았죠. 그런데 단장실에서 나오니까 두 시간이 지나 있더라고요.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아요. 그날만큼은 단장님이 아닌 선배로서 후배를 다독여주듯 편하게 대해 주셨거든요. 그때 단장님이 그러셨어요. 기완 씨 가슴에 다시 한 번 불꽃이 팍팍 타오르도록 불을 지펴주고 싶다고. 그날은 장난으로 이미 타고 있는데 어떻게 더 태우느냐고 그랬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요. 저희 단장님은 평생 발레만 바라보며 스타 무용수의 길을 걸으셨던 분이잖아요. 저보다 앞선 경험자로서 해주시는 이야기들이 제가 알고 있던 거였는데도 굉장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승급 소식을 전하는 대부분의 기사 앞자리에 8년 만에 수석 무용수 자리에 올랐다는 설명이 나와요. 빠르게 승급했다는 뉘앙스죠. 빨랐다, 또는 늦었다, 아니면 적당했다, 스스로는 어느 쪽에 가깝게 느껴요? 사실, 욕심은 항상 있었어요. 제가 솔리스트까지 되게 빨리 올라갔거든요. 입단 2년 만에 솔리스트가 되고 나서 수석이 되기까지 6년이 걸린 셈인데, 그동안 욕심이 안 났다면 거짓말이죠. 수석이 되려면 실력이나 자세를 갖춰야 하는 건 기본이지만, 타이밍이라는 운도 필요해서 ‘난 안 되는구나’ 하고 절 둘러싼 상황을 원망했던 적도 있어요. 근데 다행히도 성격이 낙담하더라도 금세 다시 위로 올라오는 편이에요. 기본적으로 제 자신에 대해 망하진 않을 거란 믿음이 있거든요. 언젠간 망해도 오늘은 안 망한다! 이런 마인드랄까. (웃음) 그래서 지금 저한테 제일 중요한 건, ‘됐다’는 결과 자체예요. 냉정히 말해서, 단장님께서 저희 발레단으로 막 오셨을 당시에는 제 춤에 대한 믿음을 드리지 못했던 것 같거든요. 그런데 지난 6년 동안 신뢰가 쌓여서 이렇게 인정을 받게 됐으니 기쁘죠.
이번에 수석 승급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초등학교 5학년 때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면서요. 어릴 적 기억을 되돌려 보면, 처음 발레를 접했을 때 뭐에 그렇게 강렬하게 사로잡혔던 것 같아요? 그게 뭐였는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 아직도 발레 학원에 처음 갔던 날이 생각나요. 수업 첫날 저랑 동생 둘 다 발레 타이즈가 없어서 집에 있는 빙상용 스케이트복을 입고 갔거든요. 거기에 살색 여자 슈즈를 신고 온통 여자애들 사이에서 수업을 들은 거예요. 근데도 별로 창피하지가 않았어요. 그리고 며칠 뒤에 턴 동작을 배우는데, 그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제가 생각해도 저희 형제는 어렸을 때부터 발레적인 끼가 있었던 것 같아요. 가만히 있는 성격은 확실히 아니었죠. (웃음) <빌리 엘리어트>는 발레단 공연을 보러 다니던 때 발레 영화가 나왔대서 보러 간 건데, 저한테 더 특별할 수밖에 없는 게 저희 가족 넷이 처음으로 같이 본 영화예요. 그 전에는 아빠랑 영화관에 간 적이 없었거든요. 영화 자체도 너무 감명 깊게 봐서 영국 유학을 가겠다고 몇 달 동안 아침에 토스트만 먹었어요. 영국에 가려면 이런 거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혼자 막 그랬죠. (웃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스러지지 않는 법
모든 인터뷰 기사에서 엿보이는 흥미로운 태도 중 하나는 의외로 꽤 시니컬한 면이 있다는 거였어요. 예를 들면, 신체적인 능력은 부족하지만 순간적인 집중력은 좋다는 식으로 자기 객관성을 가지려고 하더라고요. 어렸을 때는 누구나 다 자기가 최고인 줄 알잖아요. 저도 학교 다닐 때는 제가 제일 잘하는 줄 알았어요. (웃음) 그런데 스무 살을 지나면서 세상에 조금씩 눈을 뜨고 보니 어떤 사람이 진짜 잘하는 건지 알게 됐죠. 특히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는 이런 스타일의 춤을 추겠다고 영상 자료 같은 걸 엄청 찾아봤는데, 이런 스타일도 있고, 저런 스타일도 있고, 두 개가 합쳐진 스타일도 있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허튼 동작을 하고 있었는지 알겠더라고요. 전 제가 부족한 게 뭔지 확실히 알아요. 스스로 못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저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죠.
마흔까지만 현직 무용수로 활동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것도 되게 현실적이었어요. 아, 제가 말한 마흔은 신체적인 나이예요. 단순히 물리적인 나이 말고요. 왜냐면 발레는 시각적인 요소가 중요한 장르인데, 제가 관객이라면 돈을 내고 망가진 근육을 보고 싶진 않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제 스스로 마지노선으로 삼을 나이를 정하고 그 이후에는 과감히 무대에서 내려오자는 목표를 세운 거예요. 그런데 사실 마흔까지 춤을 추는 무용수도 많지 않아서 그때까지만이라도 꽉 찬 춤을 출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아요.
롤모델로 삼는 사람은 누구예요? 발레리노 중 한 명을 이야기하자면, 먼 나라에 계신 마뉴엘 레그리요.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20년 넘게 스타 무용수로 활동했고, 지금은 비엔나 스테이트 발레단에 단장으로 가 계신 분이에요.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전설의 무용수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있잖아요. 마뉴엘 레그리는 그다음 세대의 발레리노로 역사에 남을 엄청난 무용수예요. 발레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죠. 전 재능보다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노력만으론 절대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의 사람도 있다고 봐요. 마뉴엘 레그리처럼요. 많은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엄청난 노력까지 하니까 뭐 다른 설명이 필요 없죠. 그리고 실제로 만나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어요.
4월에 공연할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어떤 의미가 있는 작품이에요? 처음으로 여장이란 도전을 하게 한 작품, 그리고 어릴 적 목표를 이루게 해준 작품이에요. 어렸을 때 유니버설 발레단이 하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많이 봤는데, 그때 이 작품은 나중에 꼭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특히 카라보스 마녀를요. 카라보스는 고난도 스킬 못지않은 드라마 표현력이 요구돼서 캐릭터를 표현하는 무용수의 역량에 따라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달라지는 역할이에요. 무용수의 표현력을 넓혀줄 수밖에 없는 역할이죠. 이번에 공연하면 벌써 세 시즌째 하는 건데, 그래도 다행히 작년보다 훨씬 편하게 느껴져요.
누군가 김기완의 카라보스는 사악함 그 자체라고 평하던데, 동의해요? 그런 이야기는 어디 가야 확인할 수 있나요? (웃음) 저희 발레단이 하는 마르시아 하이데 안무 버전에서는 카라보스가 원작보다 좀 더 강력하게 나와요. 그래서 연기하는 재미가 더욱 큰데, 제가 상상하는 카라보스는 못됐다기보다는 야비한 마녀예요. 오로라 공주한테 저주가 담긴 장미꽃을 건넬 때 무서운 표정을 짓지 않고 교활하게 웃는 이유도 그래서죠. 어쨌든 카라보스는 악당 캐릭터니까 나쁘게 봐주셨다니 감사할 뿐이에요. 그건 결국 제가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잖아요. 솔직히, 제가 하는 카라보스가 저도 꽤 괜찮은 것 같거든요. (웃음)
카라보스는 여자 무용수가 하는 경우도 있잖아요. 혹시 성별 관계없이 이건 진짜 멋있다고 느낀 역할이 있나요? 아, 저 그걸 확실히 느낀 역할 있어요. 롤랑 프티의 <카르멘> 속 카르멘이요. 저는 절대 할 수 없는 역할이지만, 공연을 보고 있으면 캐릭터를 어떻게 저렇게 만들었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와요. 캐릭터 자체도 매력적인데 안무도 고난도이거든요. 결국 뛰어난 무용수들이 하다 보니 공연을 볼 때마다 매번 반하게 돼요. 제가 만약 여성 무용수라면 너무너무 해보고 싶은 역할이에요.
국립발레단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뭐예요? 이 레퍼토리만큼은 우리가 제일 잘한다고 자부심을 느끼는 그런 작품이요. 현재 발레단 레퍼토리에서는 <스파르타쿠스>랑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제일 좋아해요. 두 작품은 각각의 색깔이 다르지만, 음악적인 공통점이 있거든요. 가슴에 꽉꽉 차오르는 느낌의 음악이라 해야 하나. 뭐라 정확히 설명을 못하겠는데, 두 작품 다 음악에 서정적인 선율이 있어요. <스파르타쿠스> 3막 아다지오에서 스파르타쿠스가 전장에 나가기 전에 아내와 파드되를 출 때 나오는 음악, 전 그런 스타일의 음악을 좋아해요.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도 2막 마지막에 비슷한 느낌의 음악이 나오고요. 그리고 아직 발레단 레퍼토리는 아니지만, <로미오와 줄리엣>도 정말 좋아해요. 언젠간 꼭 해보고 싶은 작품이에요.
삼십 대에 접어든 무용수로서 제일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뭐예요? 한국에서 예술을 하다 보면 경제적인 문제를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제가 돈을 많이 벌지 않더라도 못 번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주위에서 종종 그런 걱정 어린 이야기를 해주시거든요. 게다가 저도 이제 서른하나니까 경제 문제뿐만 아니라 결혼 같은 현실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그런데 그런 문제를 다 제쳐두고 발레 하나만 바라보면, 전 이 길을 선택한 제 자신에 만족해요. 보통 공연이 끝나면 분장실에 혼자 남아 잠시 멍한 채로 있곤 하는데, 만약 지금까지 제가 해온 게 싫었다면 그 시간에 후회할 때가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대체로 그때 오늘은 뭘 잘했고, 또 뭐가 부족했는지 제멋에 빠져 있거든요. (웃음) 저는 솔직히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자신을 위해 춤을 추는 것 같아요. 관객을 위해 춤을 춘다는 말은 저한테 조금 거짓말처럼 느껴지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7호 2019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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