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실제 사례, <젠틀맨스 가이드> by 김수빈 번역가
<젠틀맨스 가이드: 사랑과 살인편>(이하 <젠틀맨스 가이드>)은 다이스퀴스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주인공 몬티가 자신보다 높은 서열의 후계자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이야기다. 따라서 관객이 몬티를 지지할 수 있도록 그의 ‘연쇄살인’이 두드러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에 죽임을 당하는 다이스퀴스들에게 악당적인 면을 부각하고 모종의 죄가 있다는 설정을 뒀다. 특히 오리지널 대본의 일부 상황이나 대사가 한국 정서상 부족하다고 판단해 국내에 맞게 캐릭터를 확실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다이스퀴스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 만들기
히아신스 다이스퀴스 :
A whole year’s worth of donations stolen.
If I’m ever to show my face in society again, I’ve got to find a new cause of my own, and quickly. Come, come, any ideas?
뭐? 1년치 기부금이 뚝 끊겨?
사교계에 다시 얼굴을 들이밀려면 참신한 불우 이웃 사업이 필요해, 빨리. 빨리. 아이디어 좀 줘봐.
자선 사업가 히아신스 다이스퀴스는 명예욕에 눈이 먼 인물로, 오리지널 대본은 기부금을 도둑맞은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녀가 꼭 죽어야 하는 이유라고 하기엔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히아신스 다이스퀴스는 불우 이웃을 도와 사교계에서 명성을 쌓았으며, 그녀가 위선과 명예욕을 가진 인물이라는 설정을 더했다. 또 국내 공연에서는 히아신스 다이스퀴스가 돕고 있던 불우 이웃은 정말 불우하지 않았으며, 해당 스캔들로 사교계 활동에 곤란을 겪는다는 배경을 깔았다.
히아신스 다이스퀴스 :
We’ll Find ourselves some lepers in the Punjab.
갠지스강의 문둥이를 찾아. (초벌 번역)
갠지스강의 떨거지를 찾아가자. (공연 버전)
히아신스 다이스퀴스는 몬티에게 새롭게 시작할 자선 사업을 조언받는다. 여러 자선 사업을 제외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불쾌함을 줄 수 있겠더라. 국내 정서에서 용납되는 기준 안에서 거슬리지 않는 표현을 찾아야만 했다. 오리지널 대본에서는 여러 이유가 나오는데, 이것을 ‘이미 그 자선 사업은 다른 누군가가 하고 있다’고 돌려 말하는 형식으로 번역했다. 또 과격한 단어를 순화했다. 특히 장애인이나 소수자를 비하하는 ‘Widow(과부)’, ‘Lepers(나병환자)’, ‘Deaf(귀머거리)’ 등의 표현이 수정됐다.
히아신스 다이스퀴스 :
Beggars and thieves, the lot of them! Imagine not rising for “God Save The King”!
빵을 주면, 칼 들고 쫓아오는 배은망덕한 애들은 불쌍하지 않아! 그냥 그지 깡패 새끼들이지! (초벌 번역)
걔네, 금식해. 줘도 안 먹어. 라마단 기간이래! 급해 죽겠는데! (공연 버전)
히아신스 다이스퀴스 :
“The dear disgusting lepers! A terribly restrictive caste system in India; they refused to accept our help! It got to the point where they’d run away at the mere sound of my voice!”
역겨운 문둥이들! 속 터지는 카스트 제도 때문에 뭐 가까이 갈
수가 있어야지, 내 목소리만 듣고도 도망가는데 어째! (초벌 번역)
걔네, 편식해. 가려 먹어. 소고기도 안 먹어, 돼지고기도 안 먹어, 손으로 막 퍼먹어, 어우 진짜! (공연 버전)
대사를 통해 히아신스 다이스퀴스의 캐릭터를 확실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그녀는 인도로 봉사 활동을 가면서 힌두교나 이슬람교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을 정도로, 다른 문화를 이해하거나 공부한 적이 없는 무식한 여자다. 따라서 생각 없이 아프리카의 언어를 겉핥기식으로 배운다거나 드넓은 초원인 세렝게티를 없애버리고 그 위에 축구장을 지어주겠다는 등의 대사로 자본주의적 무지함을 강조했다. 풍자와 희화 사이의 위태로운 기준을 지키는 것에 신경 썼고, 아프리카와 인도에 대한 희화화나 무지가 관객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몬티 : Pardon me, Miss, but don’t I know you from somewhere?
저 실례합니다만, 어디서 뵌 듯한데? (초벌 번역)
저기, 저 실례합니다만 (공연 버전)
애스퀴스 2세 : Certainly not! What are you insinuating, you insignificant upstart?!
뵙긴 뭘 봬! 어디서 수작질이야, 웬 그지 같은 놈팽이가? (초벌 번역)
실례를 왜 여기서 해, 동네 개새끼도 아니고. (공연 버전)
애스퀴스 2세 : Were you raised in a shanty town by some chee-chee punkah wallah?!
어디 저 다리 밑 판자촌에서 굴러먹다 오게 생긴 놈이 어딜 들이대! (초벌 번역)
훠이! 훠이! 가 임마! 가! 아악! 욱! 악! 하류층 냄새 나. 막 못 사는 그지 새끼 냄새 (공연 버전)
애스퀴스 2세는 ‘갑질왕자님’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처음 만난 몬티에게 하층민에 대한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하며 무시한다. 얼굴이 찌푸려지는 언행을 강조하기 위해, ‘하류층의 냄새가 난다’거나 ‘동네 개새끼’라는 과격한 표현을 사용한 이유다. 오리지널 대본에서는 잔잔하지만 예의 없는 말투의 인물이지만, 한국 공연에서는 극단적인 성격을 드러냈다.
재치로 웃음 전하기
몬티 : Without a schilling. They ever after behaved as if she and I had never even been born.
한 푼도 못 받고요. 어머니나 나나, 세상에 없는 사람 취급당했죠.
피비 : Why, Mr. Navarro...
세상에. (초벌 번역)
어머, 무슨 그런 개똥 같은 일이! (공연 버전)
피비 : On the contrary, I am most intrigued. What a beautiful story. Horrid, yes, I’m certain, but still beautiful.
그 반대예요, 가슴이 빵 터질 것 같아요.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잖아요. 끔찍하죠, 네. 하지만 아름다워. (초벌 번역)
그 반대예요, 가슴이 터질 거 같아요. 요따만 한 옥수수 알갱이가 강렬한 불꽃을 만나 빵 터지듯! (공연 버전)
피비 : She dared to marry for love!
결혼을 사랑 때문에 하다니! (초벌 번역)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해요? 마치, 소똥구리가 갓 빚은 똥그란 소똥처럼 곱고 아름다워요. (공연 버전)
헨리 다이스퀴스와 시골에서 함께 자란 피비 다이스퀴스는 촌스러운 여자다. 고운 외모와는 달리 시골스러운 말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캐릭터로 설정했다. 오리지널 대본에서는 평범하게 표현된 대사였지만, 한국 대본에는 ‘소똥’이나 ‘소똥구리’, ‘옥수수 알갱이’처럼 구수한 단어를 사용했다. 피비 다이스퀴스 역을 맡은 김아선 배우와 많은 논의를 거쳐 탄생한 표현이다.
국내 관객을 고려한 단어 찾기
피비 : Oh, this trifle is delicious!
이 트라이플 정말 맛있어요! (초벌 번역)
이 애플 케이크 정말 맛있어요! (공연 버전)
트라이플은 케이크와 과일 위에 포도주 젤리를 붓고 그 위에 커스터드와 크림을 얹은 영국 디저트다. 하지만 해당 장면에서 트라이플이 주는 의미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중요한 단어라면 원문을 살리는 것이 맞지만, 그게 아니라면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대체어를 찾는다. 트라이플과 비슷하면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애플 케이크를 떠올렸다. 단어 하나에도 관객의 정서를 고려한다는 원칙을 지켰다.
애덜버트 백작 : Well, I’m getting the evil eye, so do let’s go into dinner. If there’s anything I can’t abide.
썩 물럿거라, 이 비계야. 밥이나 먹자구.
근데 체할 것 같다. (초벌 번역)
너는 장수해라. 이 장수풍뎅이 같은 여편네야.
거대한 날개를 펴라. 퍼덕퍼덕! 청춘을 누려라! (공연 버전)
한국에서 통용되는 유머를 전하고 싶었다. 장수풍뎅이는 애덜버트 백작이 자신의 부인을 칭하는 단어로, 그의 시각을 잘 드러내야만 했다. 처음에는 비계라고 했는데, 비하의 의미가 컸고 국내 정서에 맞지 않았다. 장수풍뎅이는 두 가지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다. 화려한 애덜버트 백작 부인 의상이 장수풍뎅이를 연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후계자들이 죽어감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애덜버트 백작의 속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문자 그대로 ‘장수’를 한다는 의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5호 2019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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