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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마리 퀴리>, ‘마리’와 ‘퀴리’ 누가 주인공인가? [No.185]

글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 사진제공 |라이브 2019-02-08 5,078

<마리 퀴리>, ‘마리’와 ‘퀴리’ 누가 주인공인가?  

 

 

‘마리’가 품은 이야기
 

뮤지컬 <마리 퀴리>가 공연된다고 했을 때, 이 작품에 기대를 가졌던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일단 실존했던 과학자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과학은 세상의 모든 질문에 답하는 확실성의 세계관이지만 문학과 예술은 모든 확실함을 의심하는 불확실성의 질문인바, 공연으로 자리를 옮긴 과학의 이야기는 삶을 바라보는 깊은 질문으로 이어졌더랬다. 퀴리 부부가 발견한 라듐부터가 드라마틱하지 않나. 라듐은 이중적인 ‘빛’이기 때문이다. 불치병인 암을 고치는 기적의 빛이면서 살아 있는 생명체를 천천히 무너뜨리는 죽음의 빛 라듐. 라듐 때문에라도 퀴리의 이야기는 답이 아닌 질문이 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데 라듐보다 더 드라마틱한 것이 있으니 바로 마리 퀴리의 인생이다. 과학자로서 마리 퀴리는 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한 프로메테우스와 같다. 금단의 경계를 넘은 대가로 죽음보다 더한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인간에게 새로운 ‘불’을 가져다준 퀴리는 그 ‘불’ 때문에 남편과 자식은 물론 자기의 목숨마저 잃고 만다. 최초의 발견자 마리 퀴리는 최초의 피폭자인 거다. 폴란드 출신의 이방인이자 남성 중심의 과학계에서 연구를 이어가야 했던 여성으로서 마리 퀴리의 삶은 또한 어떤 것이었을까? 과학의 영역에서 그의 업적은 라듐의 발견이라는 ‘성과’이겠지만, 삶의 영역에서 그의 업적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계속됐던 배제와 무시에 무너지지 않고 생의 끝까지 달려간 삶의 ‘과정’일 거다. 마리 퀴리의 인생을 장르로 나누자면 그의 이야기는 위인전이 아니라 평전이어야 한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서사의 관심은 마리 퀴리의 빛나는 업적이 아닌 어두운 그늘을 향한다. 평전에 가까운 퀴리 부부의 이야기에 작가는 새로운 상상력을 가미했다. 라듐의 발견자인 퀴리 부부와 라듐의 피해자인 라듐 걸스를 나란히 배치한 것이다. 라듐 걸스는 라듐의 폐해를 고발하며 기업과 소송을 벌여 끝내 승리한 여성 공장 노동자들의 별칭이다. 실제로 마리 퀴리의 말년과 라듐 걸스의 소송에 십여 년 겹치는 시간이 있지만, 둘이 직접 마주친 적은 없다. 작가는 이 둘을 정면으로 끌고 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하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만약 자기가 발견한 ‘빛’이 누군가의 생명을 태워버리는 ‘불’임을 알았다면, 과학자 마리 퀴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 죽어가는 생명이 아무 권리 없는 어린 여성이고 이방인이자 노동자라면, 같은 삶의 토대를 가졌던 여성 마리 퀴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만약 자기와 가족 역시 죽음의 광선 앞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사람들임을 알았다면, 인간 마리 퀴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누구의 이야기일까?
 

이 작품은 평전은 기록할 수 없지만 예술은 상상할 수 있는 질문으로 가득 찰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의 가능성은 여기에서 멈추고 만다. 질문을 깊게 몰고 나갈 포석을 깔아놓고서도 정작 포석을 활용하는 행마는 엉뚱하게 쓰고 있으니 말이다. 문제의 핵심은 주인공인 마리가 전혀 주인공답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마리가 주인공답지 않은 가장 큰 이유. 모름지기 주인공이라면 중요한 순간에 행동하는 인간이어야 하건만 마리 퀴리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극이 시작되면서 마리는 라듐을 발견하고 노벨상도 받지만 극의 본격적인 진행은 라듐이 해롭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부터이다. 그렇다면 사실을 마주한 마리가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하느냐가 그를 주인공답게 만들어주는 근거가 될 텐데, 마리는 아직 확실한 건 없다는 말만 반복한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피에르, 안느, 루벤, 그 어떤 사람과 사건을 마주해도 마리는 그저 수동적일 뿐이다.
 

마리가 매력적이지 않은 이유는 명백하다. 진실을 마주했을 때 주인공에게는 두 가지의 덕목이 필요하다. 첫째는 진실을 사유하는 능력, 즉 논리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능력, 즉 실천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덕목은 마리의 몫이 아니다. 제목은 ‘마리 퀴리’이지만 이 극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마리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설마 주인공이 없는 걸까? 그럴 리가. 주인공은 따로 있다. 바로 피에르. 이 서사에서 진실을 사유하며 그 사유의 결과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피에르다. 앞서 언급한 질문을 끌어안고 그에 대한 선택과 대답을 하는 이는 마리여야 하건만, 이 극에서는 피에르가 그 역할을 담당하는 거다. 피에르는 라듐의 위험성에 대해 가장 먼저 반응하고 가장 먼저 실험하며 가장 먼저 증언하는 윤리적 과학자요 양심적 실천가로 묘사된다. 
 

이러한 면모는 연출을 통해 더 분명하게 각인된다. 자신의 다리에 라듐을 감아서 직접 위험성을 밝혀내려는 피에르의 행동은 과학자의 철두철미함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설정이고, 혼자 남겨진 마리가 고민하는 순간에 홀연히 그 뒤에서 그를 격려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장면은, 마리의 윤리적 선택 뒤에 피에르가 있음을 보여주는 시각적인 설명이다. 이에 비하자면 마리를 설명하는 연출의 장면은 박하다. 이 극에서 마리는 줄창 실험과 연구만 해대는데, 그 실험이 마리의 ‘행동’임을 보여주기 위한 시각적 전략은 찾아보기 힘들다. 진실을 마주함으로써 상황을 해석하고 거기서 윤리적 선택을 하는 주체는 분명 마리 퀴리여야 하건만, 진실을 증언하기 위해 목숨까지 잃는 피에르를 이길 만한 어떤 동력도 마리 퀴리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남편이 죽고서야 비로소 윤리적 각성을 하게 되는 마리의 마지막 증언이 감동적이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피에르가 멋있어 보이진 않는다. 연출이 피에르에게 무게를 실어주는 것에 비해 이 작품의 음악은 그 누구의 입장도 편을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음악은 인물의 감정보다는 극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집중한다. 진실에 대한 서로의 입장 차이와 진실을 탐색하는 여러 목소리를 담아내느라 음악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거리 두기에 가깝고, 그래서 조금은 건조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감정의 흐름에 익숙한 요즘 창작뮤지컬의 음악에 비할 때 이 작품의 음악이 다소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음악의 서정성을 기대한 관객들은 조금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표면적 주인공인 마리와 실질적 주인공인 피에르의 뮤지컬 넘버에서도 감정의 설득을 크게 종용하지 않으니 음악의 철저한 거리 두기가 언뜻 야박해 보이기도 하지만, 서사로 축적되지 못한 인물을 음악으로만 설득하려 했다면 그것 역시 좋아 보이지는 않았을 거다.  



 

여성의 이야기가 되기 위해
 

<마리 퀴리>를 향해 여성 중심의 서사를 기대한 이들이 여럿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언감생심이다. 주인공이 중심이 되지 못하는 이야기에 무슨 여성주의를 기대할 수 있겠나. 그럼에도 이 작품에는 새롭게 여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씨앗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 씨앗은 바로 젊은 여성 노동자 안느이다. 안느를 통해 여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성별 때문만은 아니다. 안느는 죽어가는 피폭자이고, 억압받는 노동자이며, 차별받는 이방인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껏 살아온 경험을 통해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와 타인을 바라볼 줄 아는, 이 작품의 유일한 주체적인 여성이다(극에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마리를 각성시키는 계기가 피에르의 죽음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행동하는 안느와의 만남이었다면, 이야기의 중심은 포석의 의도에 좀 더 가까워졌을 거다. 발견자의 위대함과 피폭된 자의 연약함이 얼굴을 마주할 때 여성주의의 서사적 상상력이 선택할 연대의 힘이 무엇인지는 명확해진다.
 

비록 성공적이지 못했다 해도 이 작품의 바탕에는 여전히 많은 가능성이 깔려 있다. 소재로서도 그렇고 관점에서도 그렇다. 그 가능성을 키우기 위해 이 작품에 필요한 건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한 스스로의 확신이다. 마리와 피에르의 위치가 바뀐 것이나, 안느의 역할이 미미한 것이나, 심지어 필요도 없이 과도하게 젊어진 루벤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 이야기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흔들려버린 이야기의 결과물이다. 과학의 서사가 됐든 여성의 서사가 됐든 작품의 색채가 분명하기 위해서는, 해야 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그 믿음이 필요하다. 

 

 

*외부 필진의 리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5호 2019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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