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 차지연·차엘리야, ?두 자매가 아닌 두 배우로
“내가 살다 살다 직계가족이랑 이런 걸 다 해보네. 뭐해, 빨리 와!” 잔소리하는 언니와 투덜거리며 따르는 동생. 티격태격하면서도 같은 옷을 입고 나타난 차지연과 차엘리야의 모습은 딱 ‘현실 자매’다웠다. 서로가 서로를 거울처럼 여기며 살아왔다는 그들이 <더데빌>과 <호프>에서 언니와 동생이 아닌 배우 대 배우로 만난다. 무대 위의 두 배우는 과연 어떤 케미를 보여줄까?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먼저 두 분의 이름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자매지만 전혀 다른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방송을 통해 꽤 이슈가 됐죠.
차지연_ 네, 아시다시피 제 이름은 스님이 지어주셨고, 동생 이름은 성경에서 따왔어요. 국악인이셨던 저희 외할아버지께서 용한 주지스님께 제 이름을 받아 오셨대요. 반면 동생이 태어났을 때는 아버지가 신실한 기독교인이셨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의 이름을 따서 엘리야라고 이름을 지으셨죠.
차엘리야 씨는 한때 가수로 활동했다고 들었는데 어떤 계기로 뮤지컬에 뛰어들었나요?
차엘리야_ 어렸을 때는 무용수를 꿈꿨지만 부상을 입으면서 미래가 불투명해졌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얻으면서 제게도 언니와 같은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았죠. 이후 오랫동안 기획사 연습생으로 생활하며 가수를 준비했어요. 그때 연기도 함께 배웠는데, 갈수록 음악보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 커지더라고요. 처음에는 방송 진출을 꿈꿨지만, 그동안 쌓은 춤과 노래 실력을 살리면서 연기를 할 수 있는 길이 뮤지컬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2012년 <서편제> 미니 역의 커버로 뮤지컬에 데뷔했죠. 당시에는 언니의 낙하산이라는 루머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요. 예상 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맞닥뜨리니 더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서울예술단 연수단원으로 들어갔고, 앙상블로 차근차근 경력을 쌓았어요. 2017년 <서편제>에서 미니 역에 정식 캐스팅되어 돌아온 게 저한테는 뜻깊은 일이었죠. 차지연_ 동생이 뮤지컬을 한다고 했을 때 저는 말렸어요. 순진한 동생이 험한 공연계에서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결국 막지 못했죠. 피는 못 속이나 봐요.
차지연 씨가 <더데빌> 초연 당시 다른 매체와 한 인터뷰를 보니, 영혼을 팔아서라도 갖고 싶은 게 있느냐는 질문에 ‘동생의 행복’이라고 대답하셨더라고요. 딸 같은 동생이라 본인처럼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차엘리야_ 정말요? 전 몰랐어요!
차지연_ 얘는 하~나도 몰라요. 제가 죽어야 알까요? (일동 웃음) 동생 앞에서는 다독거리기보다 싫은 소리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네가 선택한 길이지 않냐. 그것마저도 버텨냈을 때 이 바닥에서 배우로 살아남을 수 있는 거다. 더 고생해라. 언니도 고생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동생이 더 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자꾸 독한 말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말은 이렇게 해놓고 뒤에선 걱정돼서 밥도 못 먹어요. 저희가 겉으로만 세 보이지 허당 자매거든요.
이번 시즌 <더데빌>에서 차지연 씨는 X-블랙과 X-화이트를, 차엘리야 씨는 그레첸을 연기하죠. 자매가 한 작품에 출연한다는 점, 더욱이 초연 당시 차지연 씨가 연기했던 그레첸 역할을 동생인 차엘리야 씨가 연기한다는 점이 흥미로워요.
차엘리야_ 언니가 참여한 <더데빌> 초연을 보고 반했어요. 그레첸의 아픔, 그레첸이 사랑하는 방법 모두 마음 깊숙이 와닿았죠. 유명하고 화려한 라이선스 작품보다 이런 작품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후로 4년간 혼자서 그레첸 넘버를 열심히 연습했어요.
차지연_ <더데빌>과 <호프>로 연달아 같은 작품에 출연하다 보니 제가 동생이 캐스팅되도록 입김을 넣었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충분히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이지만, 사실 캐스팅은 <호프>가 먼저 결정되어 있었어요. 창작산실 쇼케이스 당시 함께한 동생과 본 공연까지 함께 출연하게 된 거죠. <더데빌>을 함께할 줄은 몰랐는데 동생이 그레첸 역할이 엄청 하고 싶었나 봐요. 저한테 말도 없이 제작사 대표님을 직접 찾아간 거예요. 실용음악과 친구들을 동원해 스튜디오에서 그레첸의 넘버를 녹음해 가져갔대요. 그 사실을 나중에 대표님께 연락을 받고 알았어요. 대표님께서 저만 괜찮다면 이렇게 갈망이 있는 친구에게 신인 배우로서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두 분이 한 무대에 서는 회차를 찾기 힘들더라고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차지연_ 저희가 음색과 체격이 비슷하다 보니 그레첸과 X로 만났을 때 과연 좋은 시너지가 날까 고민이 됐어요. 제작사와 상의한 끝에 제가 X-블랙을 연기할 때는 서로 만나지 않고, X-화이트를 연기할 때만 만나기로 결정했죠. X-화이트는 항상 그레첸 주변을 맴돌면서 같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잖아요. 현실에서 저희 자매가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그걸 연기에 녹여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반면 X-블랙은 그레첸을 망가뜨리는 역할이라 서로 비슷한 인상의 배우가 연기하면 그림이 좋지 않을 것 같았죠. 또 아무리 연기라도 동생을 괴롭히고 저주하는 건 제가 못 견디겠더라고요.
차지연 씨가 1월부터 연기할 X-화이트는 X-블랙과 어떻게 다를까요?
차지연_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제 화이트는 좀 심심할 것 같기도 해요. 저에게 X-화이트는 절대적인 하나님이거든요. 제가 살아오면서 느낀 하나님을 표현하면 관객분들도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요. 사실 X-블랙도 그동안 제가 만난 악마 녀석들을 표현한 거거든요!
차지연 씨의 X-블랙이라면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관객이 줄을 이을 텐데요. 그동안 만난 악마들이 되게 매력적이었나 봐요.
차지연_ 그래서 제가 그렇게 죄 짓고 죄 짓고… (일동 웃음) 제가 최선을 다해 X-블랙을 연기하는 이유는 이런 악마와는 절대 손잡으시면 안 된다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한편 저의 X-화이트는 그런 상황에서 안 된다 말은 못하고 가슴 졸이는 존재로 표현되지 않을까 싶네요.
같은 상처를 공유한 너와 나
<호프>에서는 호프라는 한 인물을 연령대별로 나눠서 연기하잖아요. 자매인 만큼 현재 호프와 과거 호프의 높은 싱크로율이 기대되는데, 어떻게 해서 함께 캐스팅된 건가요?
차지연_ 제 소속사이자 <호프>의 제작사인 알앤디웍스 대표님께서 대본을 건네주셨어요. 창작산실에 출품할 작품이니 부담 없이 읽어보라고 하셨는데, 읽는 순간 제 가슴에 뭔가가 팍 꽂혔죠. 소박하지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분명한 작품이더라고요. 화려함에 치우친 뮤지컬 시장에 이런 작품이 필요하다, 쇼케이스에 참여해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작품 안에 현재 호프와 과거 호프가 나뉘어 등장하는 거예요. 현재 호프를 내가 연기한다면, 과거 호프는 나와 같은 아픔을 공유한 사람이 맡아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동생을 추천했죠. 저희는 힘든 가족사로 인해 샴쌍둥이처럼 서로를 지독하게 끌어안고 살아왔거든요. 마치 내가 너고 네가 나인 것처럼요. 감사하게도 그 쇼케이스 공연이 호평을 받으면서 본 공연에서도 둘이 함께하게 된 거죠.
작품은 법정극 형태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평생 원고만 지키며 살아온 호프의 삶을 들여다 봐요. 과거 호프는 70대 노인이 된 현재의 호프와 어떤 면에서 다른가요?
차엘리야_ 호프는 이름과 달리 살면서 희망이란 걸 거의 느껴본 적이 없는 인물이에요. 상처를 받고 또 받다 보니 담담해지다 못해 아집으로 똘똘 뭉친 노인이 되었죠. 오래되고 억센 나무 같은 느낌이랄까요. 과거 호프는 그렇게 되기까지 이 인물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보여주는 단계이기 때문에 아직은 혈기왕성해요. 운명과 싸워 이겨 보려고 몸부림을 치죠. 그렇게 8세부터 48세까지의 호프를 제가 연기해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과거 호프와 현재 호프는 한 사람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언니의 호프라면 제가 애쓰지 않아도 닮아 보이겠지만, (김)선영 언니의 호프는 저와 너무 달라 보일까봐 걱정이에요. 그래서 평상시 선영 언니의 사소한 습관이나 반응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어요. 또 두 호프의 연기를 지켜보면서 저 인물의 젊은 시절 모습은 어떨까 역으로 상상해 보기도 해요.
차지연_ 크으~ 아주 그냥 명배우가 납셨네.
차엘리야_ 아유, 가만히 좀 있어!
그럼 차지연 씨가 생각하는 현재의 호프는 어떤 인물인가요?
차지연_ 동생 말대로 억센 모습이 필요해요. 맞아! 아니야! 싫어! 이런 간단한 외침만으로 재판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에너지가 있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실은 그 이면에 누구보다 여린 속내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해요. 너무 여리고 순수했기 때문에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과거의 아픔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라고요. 호프는 과거를 떠올릴 때 기억과 거리를 두고 ‘그때 아팠지’라고 생각하지 못해요. 아예 그 시절로 돌아가서 ‘으악, 아파!’ 하고 느껴요. 그래서 겉으로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상태는 아니에요. 자기만의 세계와 현실 세계가 반씩 섞인 상태라고 할까요. 70대 노인이 되어 법정에 서기까지 삶에서 부딪혀온 무수한 문제를 마치 지금 일어나는 일처럼 맞닥뜨린 상태. 힘없는 어린 시절과 똑같이 무방비 상태로 그 문제들과 직면한 상태. 제가 생각하는 호프는 그래요. 호프 자신은 문제들로부터 숨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걸 다 끌어안은 채 도망다니고 있는 셈이죠.
대본을 쓴 강남 작가는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를 둘러싸고 30년간 재판을 벌여온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과 에바 호프의 실화를 접한 뒤, ‘호프에게 원고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해 이 작품을 썼다고 말했어요. 두 분 생각에 극 중 호프에게 원고란 무엇인가요?
차엘리야_ 과거 호프에게 원고란 내 걸 다 빼앗아 간 존재예요. 엄마한테 받아야 할 사랑을 포함해 내 삶의 모든 걸 다 앗아간 존재. 아주 원망스러운데 그 원고를 움켜쥐고 있어야만 나란 사람이 인정을 받을 것 같은 불안감이 있어요. 애증의 대상이죠. 부모에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건 이 세상에서 나란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런 결핍이 있는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 한구석은 어린 시절에 멈춰 있게 되죠. 저 또한 그 결핍이 어떤 건지 잘 알기 때문에 호프만 생각하면 눈물이 솟아요.
차지연_ 세월이 지나면 원고에 대한 원망은 100%에서 30% 정도로 줄어들어요. 70대의 호프가 바라보는 원고는 아무도 모르는 가장 순수한 나예요. 극 중 원고가 K라는 캐릭터로 의인화되어 표현되는데, K가 호프에게 말해 주기 시작해요. 호프가 진정으로 살고 싶었던 삶에 대해. 아마 공연을 보시면 이 부분이 크게 와닿으실 거예요.
작품 속에서 특히 인상 깊은 대사를 꼽는다면요?
차엘리야_ 호프의 대사가 기억에 남아요. 원래 동네마다 미친 사람이 하나씩 있어야 한다. 자기들이 정상이라는 기준이 필요하니까. 이건 시대를 초월한 진리인 것 같아요.
차지연_ 마지막에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이 원고를 내놓으라고 몰아치니까 78세의 호프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기 진심을 입 밖에 내요. 뭐라도 좀 붙들고 살자! 그때 울컥하더라고요. 호프를 연기하다 보면 동생 말처럼 제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게 돼요. 저희한테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거든요. 그 아픔이 과거의 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 문제가 되더라고요. 호프라는 인물이 그런 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인지 대본 리딩할 때도 저희 둘만 그렇게 울어요.
차엘리야_ 신기하더라고요. 그 많은 대사와 장면 가운데 서로 눈물이 터지는 포인트가 똑같아요.
차지연_ 그럼 연출님이 말씀하시죠. 안 돼, 벌써 울지 마! 아직 아니야! (웃음) 하지만 그렇게 한바탕 울고불고한 끝에는 따뜻하게 위로받는 느낌이에요. ‘괜찮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정말 잘 살아왔어’라고 말해 주는 작품이거든요. 저는 이 작품이 오래오래 무대에 올려져서 많은 분들이 위로를 얻어 가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인간은 누구나 어마무시한 상처로 덩어리져 있으니까요.
지난 한 해 공연계에서는 여성 캐릭터의 좁은 입지를 변화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눈에 띄었어요. <호프> 또한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대감이 생겨요. 두 분은 여성 배우로 살아가면서 무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길 원하세요?
차지연_ 지난해 <광화문 연가>의 월하, <더데빌>의 X를 연기하면서 제가 ‘젠더 프리’ 캐스팅의 대표 주자처럼 여겨지게 됐더라고요. 감사한 일이지만, 제가 처음부터 그런 타이틀을 노리고 작품을 선택했던 건 아니에요. 다만 그렇게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혀 나가는 게 저에게 더 재미있었을 따름이죠. 앞으로도 그런 재밌는 도전을 멈추지 않을 거예요.
차엘리야_ 저는 이 작품에서 관객이 성별을 떠나 호프라는 한 ‘인간’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캐릭터를 성별의 틀에 가두고 싶지 않아요. 이 인간이 지닌 외로움, 아픔, 따뜻함. 그걸 꼭 전해 드리고 싶어요. 음, 어떻게 말해야 제 생각이 잘 전달될까요.
차지연_ 그럴 땐 간단해. 이렇게 말해. 전 언니 뒤를 잘 쫓아가겠습니다! (일동 웃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4호 2019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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