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의 향기를 머금고 온 이집트의 여왕
<나인>과 <드림걸스>로 2008년과 2009년 연이어 여우조연상을, 지난해에는 <모차르트!>로 2개의 인기스타상을 받으며 매년 최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정선아, 철없고 당차서 반짝이던 공주님이 어느덧, 성숙한 향기를 머금고 여왕이 되어 돌아왔다.
“2010년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암네리스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두 군데의 시상식에서 인기스타상을 휩쓸며, “특히 관객에게 받은 상이라 기쁘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던 정선아에게, 지난해에 대한 인사를 건네니 돌아온 답변이다. 이 말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었다. “사실 2010년은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해였어요. 좋은 일들이 많은 만큼, 마음 아프고 스트레스 받는 일도 많았죠.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전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정선아였을 거예요.” 자기 안에 있는 사적인 것들에 집중하고, 뜨겁게 앓아 낸 결과, 그녀는 한층 깊어진 눈빛의 암네리스로 우리 앞에 섰다.
암네리스는 철없고, 화려한 성격의 이집트 공주다. 어느 날, 9년간 당연히 내 사랑이라 생각했던 약혼자 라다메스와 비록 노예였지만 친구라 생각했던 아이다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고, 라다메스가 그 사랑으로 반역을 저지르려는 것을 우연찮게 알게 된다.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은 그 일로 번민하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음을 명하고 여왕이 되는 암네리스는 극 중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초연 때 공연을 보면서 ‘이게 나다. 암네리스는 내가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정선아에게 5년 후 다시 만나게 된 암네리스는 특별했다. “제 성격과 비슷한 캐릭터는 현재로선 <나인>의 ‘칼라’와 <아이다>의 ‘암네리스’예요. 특히 제 인생을 두고 대입해봤을 때 지금 암네리스는 제게 꼭 맞는 옷이죠. 1막에서는 여전히 철없는 나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2막은 지난해 힘들었던 경험들과 딱 맞아떨어지는 기분이었거든요.”
잘 알려진 대로,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본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에 반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해버린 당찬 소녀였다. 뮤지컬에서는 보기 드물게 만 열여덟, <렌트>의 미미로 데뷔한 정선아의 이십 대 초반이 ‘뮤지컬 영재’로서의 날개를 활짝 펴보였던 시기였다면, 2005년 초연 오디션에서 어린 나이를 이유로 낙방한 이후, 지난해 암네리스를 맡게 되기까지 5년은 여배우로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 사이 정선아는 <지킬 앤 하이드>의 ‘루시’, <해어화>의 일패기생 ‘소연’, <나인>에서 주인공 귀도의 섹시한 정부인 ‘칼라’, <드림걸스>의 히로인 ‘디나 존스’, <모차르트!>에서 순수한 연인이었다가 결혼 후 지쳐버린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 등 다양한 역할을 오가며 무대에 올랐다.
자신이 가진 캐릭터와 매력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역할에 자신을 맞추는 연기 변신에 대한 욕심 대신, 자신이 했을 때 잘할 수 있고 빛이 날 수 있는 배역을 잘 찾아 온전히 자신의 숨을 불어넣는 작업을 차근차근 해왔다. 이러한 노력은 2008년 <나인>, 2009년 <드림걸스>로 여우조연상을 받는 결과로 이어지면서 관계자, 평단과 대중은 정선아를 더 이상 ‘열여덟, 미미로 데뷔한 영재’로만 보지 않았다.
뮤지컬에 대한 끓어오르는 열정으로 달려오던 정선아가 처음 여배우라는 자각을 하게 된 작품은 <드림걸스>였다. 디나 존스 역에 ‘한국의 비욘세 정선아’가 캐스팅된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었지만, ‘그간 미친 듯이 하고 싶지 않은 이상 오디션을 보지 않았던’ 정선아에겐 6개월간 6차에 걸친 오디션을 거쳐 역할을 얻어냈던 특별한 기억이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무대 위에서 피해를 주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을 크게 느낀 작품이었어요. 여자 세 명이 함께하는 공연이다 보니 여자들끼리의 관계, 우정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했던 작품이고요.”
여배우로서의 책임감에 대해 다시 한번 느끼고 있는 공연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아이다>. “<모차르트!>를 하면서 뮤지컬을 처음 접하고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고 메일을 주는 어린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제가 어릴 때 발탁이 되었기 때문에 어린 친구들에겐 ‘워너비’가 된 것 같더라고요. 뿌듯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가짐, 몸가짐을 조심해야겠단 생각이 들죠. ‘책임이 막중한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너무 어렸을 때 시작해서 몰랐던 것들이 이제 조금씩 보이고 있죠.” 이러한 마음은 3개월간 홀로 암네리스를 감당해내는 책임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매일 기분 좋은 설렘과 책임감으로 공연장으로 향한다는 그녀는 자못 진지한 눈빛으로 “<아이다>를 하면서 정말 행복해졌고 공연하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저한테 이런 노래하는 능력과 무대에 설 수 있는 하루하루가 정말 감사해요. 주신 것을 무대에서 펼칠 수 있어서 감사해요”라며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는다.
이제 데뷔 9년 차, 이십 대 후반의 깊이를 품게 된 이 여배우는 앞으로 ‘이 역할에는 정선아 밖에 없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똑소리 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한편, ‘워너비 정선아’를 가슴에 담고 뮤지컬을 지망하는 많은 후배들의 기억에 남는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또 (김)선영 언니처럼 여유를 간직한, 선배다운 선배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터뷰 때마다 ‘박수 칠 때 떠날 것’이라 말했다는 그녀는 “아직 박수를 덜 받았기에 떠날 수 없다”고 장난스레 말하며 덧붙였다. “정말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뮤지컬을 떠날 수는 없을 테고, 열여덟, 그 어린 시절의 나를 가능성만 보고 뽑으셨던 박 대표님처럼 옆에서 서포트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여배우 정선아에게 뮤지컬이란 무엇인지’를 물으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오는 대답은 바로 “나의 꿈, 나의 현실, 나의 인생.” 깊어진 눈빛만큼이나 곱고 아름다운 색으로 짙어진 열정도 느낄 수 있었던 만남이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0호 2011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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