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온 킹> 줄리 테이머, 무대 위에 떠오른 사바나의 태양
정식으로 막이 오르기 전, 객석 뒤에서 등장한 배우들이 동물 퍼펫을 조종하며 아프리카의 온갖 동물이 되어 관객들을 놀랜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프닝 넘버는 그 유명한 ‘Circle of Life’. 오래전 뉴욕에서 <라이온 킹>을 뮤지컬로 처음 봤을 때의 강렬한 시작을 잊을 수가 없다. 무대에 모여든 배우들이 각자 맡은 퍼펫과 한 몸이 되어 퍼펫에 숨을 불어넣으면 무대는 곧바로 아프리카 초원이 되니 말이다. <라이온 킹>은 1997년에 초연된 작품이니, 현재 퍼펫 사용으로 가장 유명한 연극인 <워 호스>가 만들어지기 이미 한참 전에 뛰어난 퍼펫 뮤지컬이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 모든 마법 같은 순간 뒤에는 연출가 줄리 테이머가 있었다.
줄리 테이머에 대한 원고를 선뜻 쓰기로 한 것은 그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라이온 킹>을 처음 봤을 때는 작품의 연출이 줄리 테이머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핑계일지는 몰라도 <라이온 킹>을 볼 때만 해도 연기나 공연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던 터라 머릿속엔 그저 재미있다는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줄리 테이머라는 연출가를 알게 된 것은 공연이 아닌 영화를 통해서였다. 그 영화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제부터 그녀가 어떤 길을 걸어온 사람인지 이야기해 볼까 한다.
남달랐던 출발
줄리 테이머는 1952년 12월 15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뉴튼에서 태어난다. 엄마 엘리자베스 번스타인은 정치학 교수이자 사회 활동가였고, 아빠 멜빈 테이머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그의 어린 시절을 되짚어 보면, 열 살 때 보스턴 칠드런스 시어터에 가입해 다수의 작품에 출연할 만큼 어려서부터 무대에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열여섯 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프랑스 파리의 자크 르코크 연극 학교로 유학을 떠나는데, 이곳에서 마임을 배우게 된다. 또한 파리 유학 생활 중 처음으로 가면을 사용한 공연을 접했으며 영화에 빠진 것도 이 시기였다. 이렇듯 파리 생활은 그녀에게 많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줬지만, 그녀의 예술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대학교를 졸업하며 받은 장학금으로 스물한 살에 떠난 인도네시아 여행이다. 애초에 3개월만 있다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4년이나 머물게 된 인도네시아는 줄리 테이머가 현재까지도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경험으로 이때를 언급할 만큼 그녀에게 강렬한 경험을 남긴다. 줄리 테이머는 인도네시아에 머무는 동안 일본, 수단, 독일, 미국 등 세계 각국에서 온 배우, 음악가, 무용수, 퍼펫티어들로 구성된 마스크·댄스 컴퍼니인 떼아뜨르 로(Teatr Loh)를 만들어 전역을 돌며 공연한다. 불과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말이다.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공연했던 작품은 <웨이 오브 스노>와 <티라이>로, 줄리 테이머가 뉴욕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1980년 라 마마 극장에 <티라이>가 오르면서 그녀의 본격적인 커리어가 시작된다. 바로 다음 프로젝트인 <하가다>는 퍼블릭 시어터와 협업한 것인데, 1980년대 당시 라 마마에 공연을 올리거나 퍼블릭 시어터와 협업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리고 1986년, 줄리 테이머는 그녀의 첫 셰익스피어 작품인 <템페스트>를 연출한다.
아마 줄리 테이머의 공연이나 영화를 한두 편 이상 본 사람이라면, 그가 퍼펫과 마스크를 활용해 얼마나 독특한 비주얼을 연출하는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공연은 영화 같고, 영화는 공연처럼 연출된 그의 작품들은 보고 듣고 느끼는 재미가 남다르다. 특히 상상력을 자극하는 연출력은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상상을 펼치도록 만드는 힘을 지녔다. 여기서 잠깐 한 강연에서 그가 한 말을 옮겨보겠다. “아티스트로서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의 진실함을 끝까지 유지해야 해요. 하지만 지금 이 시간의 우리 삶 속에는 관객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들에게도 빛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야 하죠.” 나는 이 말이 이렇게 들렸다. 공연을 만드는 시어터 메이커들은 극장을 찾은 관객들을 또한 시어터 메이커의 일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무대 예술은 공연을 만들어내는 사람과 그 공연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같은 시간 한데 공존할 수 있도록 밸런스를 찾는 작업 아닐까. 줄리 테이머는 그의 영원한 대표작이 된 <라이온 킹>을 만들 때도 이런 고민을 거듭했다고 한다.
표의문자처럼 탄생한 <라이온 킹>
줄리 테이머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표의문자에 비유해 설명한다. 세 번의 붓질로 대나무 숲을 나타내는 그림 문자처럼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작품의 본질에 다가간다는 것이다. <라이온 킹> 역시 이 같은 고민 끝에 탄생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본질과 관념은 무엇일까. 거대한 스토리를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한다면 무엇일까. 줄리 테이머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지며 작품 컨셉을 찾아갔다고 하는데, 그렇게 떠오른 이미지가 바로 삶의 순환을 상징하는 ‘서클(원)’이다. 심바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무파사의 가면이 둥그런 원을 품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바닥에 펼쳐진 커다란 원 모양의 실크 천이 무대 바닥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으로 가뭄이 든 프라이드 랜드를 표현하는 방식이나 가젤들이 뛰어다닐 때 가젤 퍼펫이 붙어 있는 수레 바퀴에서도 이 같은 삶의 순환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줄리 테이머가 <라이온 킹> 연출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관객들은 객석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무대가 허구의 공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배우들이 머리 위에 잔디가 꽂혀 있는 판을 쓰고 걸어 다니면 여기가 사바나 초원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조금의 의심도 없이요. 전 무대가 지닌 이런 진실함을 사랑해요. 관객들이 스스로 빈 공간을 채워간다는 점도 제가 무대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 태양이 떠오를 때, 관객들은 그게 진짜 태양이 아니라 나무 막대에 연결된 실크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바닥에 놓여 있던 천이 서서히 위로 들려 올려지는 순간 그것이 떠오르는 태양이라는 걸 관객들 스스로 알죠. 여기서 정말 아름다운 사실은, 관객들이 태양이라고 믿는 그것이 그저 실크와 나무 막대로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이때 관객들이 받는 감동은 예술적 표현에서 오는 것이죠. 그래서 무대 예술은 이야기를 어떻게 구현해 내느냐가 중요해요. 어떤 방법과 기술을 사용하느냐가 스토리만큼 중요하죠.” 이 내용은 줄리 테이머가 강연에서 밝힌 이야기인데, 이렇듯 줄리 테이머는 작품에 임할 때마다 작품과 관객의 관계를 생각하며 스토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고민하며 앞으로 나아갔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의 이런 고민들은 영화를 찍을 때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독창적인 비주얼 미학
앞서 잠시 얘기했듯 나는 줄리 테이머를 영화감독으로 먼저 알았다. 셰익스피어의 『타이투스 안드로니카스』를 각색한 첫 장편 영화 <타이투스>(1999)와 20세기 대표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를 담은 <프리다>(2002), 그리고 역시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곡을 바탕으로 한 <템페스트>(2010). 내가 줄리 테이머의 팬이 된 것은 이 세 영화를 통해서다. 우선, 줄리 테이머의 영화 대표작으로 꼽히는 <프리다>는 그녀의 삶과 철학이 예술이라는 장르와 하나됨을 마치 비디오 아트처럼 표현했다. 앤서니 홉킨스라는 엄청난 배우를 내세운 <타이투스>는 셰익스피어 작품들 중 가장 잔혹하고 비극적인 작품이 지닌 어두움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영상미를 보여준다. 마치 한 편의 공연 같은 미장센에 특수 효과까지 더해져 무대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리얼리티를 구현해 낸다. 반면 <템페스트>는 셰익스피어의 후기 작품으로 마법과 괴물, 요정 등 판타지적인 요소가 담겨 있어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양쪽에 많은 상상력을 요구하는 작품이다. 때문에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은 IBM과의 협업을 통해 실시간 모션캡처 기술을 사용한 하이테크 버전의 <템페스트>를 선보인 적도 있다. 어찌됐든 줄리 테이머의 <템페스트>가 중요한 이유는 그만의 영상미가 CG효과를 만나면서 엄청난 시너지를 냈기 때문이다. 또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마법사 프로페스 역할의 캐스팅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보통은 남자 배우가 맡은 이 역할에 헬렌 미렌을 캐스팅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2010년에 개봉한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줄리 테이머는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젠더 프리 캐스팅을 일찌감치 시도한 셈이다. 그리고 헬렌 미렌은 역시나 대단한 연기를 보여준다. 이 세 영화는 기회가 된다면 꼭 보길 추천하고 싶다.
줄리 테이머는 뮤지컬과 영화 외에 다수의 오페라도 연출했다. 특히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과 협업한 모차트르의 <마술피리>는 마스크와 퍼펫을 활용해 스타일리시한 비주얼을 보여주는 그녀의 장기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전통 공연으로 자리매김했을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아 2018년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어김없이 공연됐다. 이렇듯 언제나 승승장구한 듯 보이지만, 그녀에게 힘든 시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11년 브로드웨이 역사상 사건 사고가 가장 많은 작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뮤지컬 <스파이더 맨>의 초연 연출이 바로 줄리 테이머였기 때문이다. <스파이더 맨>은 배우들의 잦은 부상 탓에 오프닝 날짜를 예정된 계획보다 훨씬 미뤘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80회라는 이례적인 프리뷰 공연을 거쳐 정식 개막하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긴 작품이다.
게다가 줄리 테이머는 이 프리뷰 기간에 연출에서 하차하게 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줄리 테이머의 가장 최근 브로드웨이 공연인 연극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
다음은 오프라 윈프리가 줄리 테이머를 인터뷰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이 인터뷰를 지면에 옮기는 이유는 미국 내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여성 리더라 할 수 있는 오프라 윈프리와 여성 아티스트에게 척박한 미국 공연 예술계에서 많은 업적을 일구어 낸 줄리 테이머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인터뷰를 읽으며 나 역시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기에 일부를 번역해 옮겨본다.
오프라_ 당신의 창작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또 어디서 영감을 얻는지요.
줄리_ 창작 방식은 맡은 역할에 따라 달라져요. 예를 들어 연출을 할 때는 나만의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도 있지만, 배우들에게도 많은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노력해요. 연출은 심리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어요. 연출은 마치 장군이 되는 것과 같죠. 그리고 작업할 땐 항상 체계적이어야 해요. 영화를 찍을 때는 5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엄청난 질문을 쏟아내니까요.
오프라_ 배우가 당신과 다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을 때 기분이 좋은가요?
줄리_ 그럼요. 만약 배우에게 강력한 비전이 있다면 더 좋은 작품을 위해서 제 아이디어를 버릴 수 있죠. 앤서니 홉킨스와의 작업이 그 완벽한 예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폭군 같은 남자 연출가들은 자기 자신만의 비전에 푹 빠져서 다른 사람들이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을 무서워하죠. 반면 여자 연출가들은 폭군처럼 굴 수 없어요. 그렇게 하면 그냥 나쁜 년이 돼버리거든요. 안타까운 일이죠. 전 저와 작업하는 사람들이 “이 아이디어 어떻게 생각해? 내 아이디어하고 당신 아이디어가 어떻게 맞아떨어지는지 한번 보자”라고 말해 주는 게 좋아요.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누구든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프라_ 당신의 아티스트로서 경험이 정말 풍부해요. 연출가, 조각가, 디자이너, 크리에이터 등등. 당신 자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 내리나요?
줄리_ 전 가끔씩 제 자신을 ‘플레이 메이커(Play maker)’라 불러요. 하지만 이건 그냥 단어일 뿐이에요. 전 저한테 타이틀이나 직업명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프라_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다르게 본다고 생각하나요?
줄리_ 전 우리 모두가 각자 고유의 테두리 안에서 세상을 다르게 바라본다고 생각해요.
오프라_ 당신이 자신 있게 확신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줄리_ 누구나 무언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는 것이요. 제가 확신하는 바는 그 어떤 것도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죠. 제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다음은 무엇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예요. 하지만 확신이 없는 것에 개의치는 않아요. 무슨 일이든 흥미로울 것이고, 도전하고 싶을 테고, 절 흥분시킬 거라는 것을 확신하니까요.
- 2001년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 中
줄리 테이머는 스물다섯이든, 마흔다섯이든, 예순다섯이든, 나이와 상관없이 도전을 멈추지 않고 살아왔다. 새로운 시도 앞에 겁먹지 않고 도전 자체를 즐기면서 말이다. 공연예술을 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꼭 한 번쯤 만나보고 싶은 연출가가 아닐 수 없다. 그녀가 예술가로서 어떤 행보를 이어갈지는 알 수 없지만,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기대되는 것 같다. 지금 뉴욕에 있다면 <마술피리>를 보러 갈 수 있을 텐데 아쉬워하며, 언젠가는 줄리 테이머라는 연출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밤을 보내본다.
대표작
뮤지컬 <라이온 킹>(1997)
영화 <프리다>(2002)
오페라 <마술피리>(2005)
연극 <한여름 밤의 꿈>(2013)
<라이온 킹>
<마술피리>
<스파이더 맨>
<프리다>
<타이투스>
<템페스트>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4호 2019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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