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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뱀파이어 아더>, 아더와 함께 죽어버린 이야기 [No.184]

글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 사진제공 |컴퍼니연작 2019-01-08 4,811

<뱀파이어 아더>, 아더와 함께 죽어버린 이야기

 


 

이야기가 없는 이야기

분명히 집중해서 봤는데 정작 내용을 이야기하라면 한참을 머뭇거리게 되는 작품들이 있다. 대략 이럴 때이다. 첫째, 정말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몇 번을 곱씹어도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 경우이다. 둘째, 별다른 이유도 없이 지지부진하게 심각할 때. 주인공들은 내내 외롭고도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는데 왜 그런지 도통 이유를 모르겠으니 외롭고 괴로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셋째, 이야기가 시작되긴 했는데 끝이 흐지부지할 때. 흥미진진하게 시작했다가 어영부영 끝나버리기 일쑤인데, 시작하는 설정이 이야기의 전부일 때가 대개 이런 경우이다. 시작한 지 30분이 지나면 그때부터 이야기는 길게 잡아 늘인 엿가락이 되고 만다.
 

최근 뮤지컬계에는 이 세 가지의 경우를 공통분모로 가진 작품들이 많은 것도 문제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을 작품의 결함으로 보는 게 아니라 흥행 코드로 받아들이는 통념이다. 창작이란 없음에서 있음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창조일진대, 마땅히 있어야 할 것마저 깡그리 없애버리는 이런 부류의 작품에 창작이라는 숭고한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이런 작품에 나타나는 공통점은 이 안에 아무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분명 서사의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겨 있어야 할 이야기가 없는 거다.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 이야기를 창작이라고 부르는 건 정확한 사실의 진술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지금 여기엔 너무나도 많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어쨌든 흥행하지 않았나요? 맞다. 하지만 이런 작품이 모두 흥행에 성공한 것도 아니다. 이런 이야기 자체가 흥행의 코드가 아님을 방증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흥행을 어떤 관점에서 받아들여야 할까? 그 결과는 창작의 르네상스라기보다는 오히려 뮤지컬의 종말론에 가깝다. 요즘 공연되는 작품들을 향한 평가가 그 증거이다. 그 작품? 음악‘은’ 좋더라! 뮤지컬에서 음악이 좋은 건 미덕임에 틀림없지만 요즘의 이 말은 그런 의미를 훨씬 넘어섰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원래 뮤지컬의 넘버는 서사와 어우러질 때 그 진폭이 커지는 것이건만, 작금의 ‘음악은 좋다’는 평가에는 서사를 털어냈을 때 음악의 진가가 드러난다는 뜻이 들어 있으니 말이다. 당위성도 필요성도 없이 걸리적거리는 이야기는 오히려 음악을 평범하게 만들 뿐이니, 뮤지컬 공연보다 작곡가들의 개인 콘서트에서 연주되는 음악이 훨씬 좋다는 관객 평가의 밑변에는 기대할 것 없는 서사에 대한 냉소가 깔려 있다. 이런 작품의 음악이 진짜 좋은지는 따로 살펴보아야 할 주제이지만, 서사가 귀찮은 음악은 더 이상 뮤지컬의 음악이 아니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서사와 음악이 어우러지지 못할 때 뮤지컬이어야 할 이유는 점차 희미해진다. 



 

시작을 끝으로 착각한 서사

<뱀파이어 아더> 역시 음악은 좋다는 말로 회자되는 작품이다. 신인 작곡가 김드리는 전작 <줄리 앤 폴>이나 <붉은 정원>에서 아기자기하면서도 우아하고 격정적이면서도 장난스러울 줄 아는, 자유분방한 선율의 서정성과 극을 이끌어가는 음악의 유려함을 보여줬더랬다. 작품의 제목보다 자기 이름으로 존재감을 새겼다는 점에서 보자면 이번 작품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작업이었을 터다. 하지만 <뱀파이어 아더>의 음악은, 주식의 개념으로 보자면 손절매에 가깝다. 주가는 하락하는데 가격상승의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더 이상 손해를 보기 전에 갖고 있는 주식을 싼값에 팔아 청산하는 것처럼, 이 작품의 음악은 의욕이나 상상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주어진 대본의 빈틈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게끔 그저 필요에 따라 무난하게 채워 넣는 데 집중한 것처럼 보인다.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공격전이라기보다는 방어전에 가까워지는 느낌이랄까. 초반의 재기 발랄함은 후반에 들어서 평이해질뿐더러 이유 없는 멜랑콜리는 작곡가가 선택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다가오는바, 음악이 좋다는 무조건적인 찬사에 동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음악이 이 정도라도 감당해 주지 않았더라면 이 이야기가 과연 공연으로 완성될 수 있었을까? 이 작품의 이야기에는 재료만 있을 뿐, 그 재료를 이야기로 요리한 흔적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맛있는 요리를 기대하며 뚜껑을 열었는데 재료만 담겨 있는 냄비를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아직 송곳니도 자라지 않고 날지도 못하는 뱀파이어 소년 아더가 있고, 평생 소년의 수발을 들어온 남자 존이 있으며,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외딴 저택을 찾아온 소녀 엠마가 있다. 그런데 이 재료들에는 손질이 안 된 부분이 꽤나 많다. 평생 토마토 주스를 피인 줄 알고 마셔온 이 순진무구한 소년의 나이를 도대체 몇 살 정도로 봐야 할까? 집착도 순정도 책임도 아닌, 남자와 죽은 여자는 도대체 무슨 관계였던 걸까? 길거리를 전전하는 부랑자 소녀가 쿠키를 그렇게 잘 구울 수 있다니, 도대체 언제 어디서 배운 걸까? 설정부터 납득되지 않는 무리수가 도처에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의 서사가 보여주는 가장 큰 무지함은 서사의 시작점과 종착점이 헷갈리고 있다는 것이다. 설정에서 예측되는 이 작품의 서사는 크게 두 덩어리이다. 아더가 자기 정체성의 진실을 발견하는 데까지가 전반부일 테고, 그 진실 앞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는지, 그리고 그 결단에 따른 대가를 지불하며 성장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데까지가 후반부일 터다. ‘뱀파이어’라는 거짓된 정체성에서 ‘아더’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찾아가는 이야기일 때 이야기는 자기의 성을 벗어나 비로소 독립된 인간으로 첫걸음을 내딛는 소년의 성장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엉뚱한 데서 끝나버리고 만다. 자신이 뱀파이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드라마의 전부인 거다. 시작부터 이미 눈치챈 사실(누가 봐도 아더는 뱀파이어가 아닌 것을!)을 마치 대단한 진실인 것처럼(햇빛에 손 한 번만 뻗으면 알 수 있는 사실이 진실이라니!) 이야기하는 것도 우습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펼쳐져야 할 지점에서 갑작스레 끝나버리니 황당하기만 하다. 이 작품의 서사를 꼼꼼하게 살펴보기 어려운 것은 이야기가 비어 있어서가 아니라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이 작품의 유일한 사실이요, 진실이다.   


 

종말을 부추기는 죽음 

정말 당황스러운 것은 이야기가 끝을 맺는 방식이다. 자기 정체성의 진실을 깨닫고 성을 떠나려는 순간 소년은 남자가 쏜 총에 맞아 죽는다. 설마 죽을까 했는데 정말 죽더라. 이렇게 아무 이유도, 의미도 없는 죽음이라니. 디즈니 왕국의 해맑은 공주 라푼젤도 자기를 성에 가둔 마녀를 죽임으로써 자유를 찾고, 순수 자체인 동승 도념이도 자기 아버지 같았던 주지스님을 떠나면서 성장의 길로 나서건만, 뱀파이어씩이나 됐던 소년은 자기를 가둔 자의 손에(자기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도 아니다!) 허무하게 죽어버린다. 자기의 세계에서 떠나는 성장도, 서로를 통해 다른 세계를 탐색하는 사랑도, 하다못해 자기를 가둔 사람을 향한 복수도, 그 어떤 서사도 되지 못한 채 이야기는 숨을 거두고 마는 거다. 소년의 죽음은 이야기의 죽음에 다름 아니다. 자기가 진짜 죽인 게 무엇인지 작가는 알고 있을까. 
 

극작의 논리로 생각하면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이 결론은 어쩌면 무의식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가짜 뱀파이어로 살기 위해서는, 밤마다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뻘짓을 반복해도 곧 하늘을 날 수 있을 거라는 격려를 받으면서, 비록 토마토 주스밖에 먹지 못한다 해도 안전한 저택 안에서 수발을 받으면서, 자기에 대한 의심 따위는 없이 편안하게 지내면 그만이다. 만약 세상 밖 진짜의 세계로 한 발짝이라도 나간다면? 죽을지도 모른다! 이 안전한 ‘코드’의 저택을 뒤로하고 창작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 작가가 느끼는 두려움이 이런 것이라면,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소년의 죽음을 형상화한 것이라면, 작가의 손을 꼭 붙잡고 그래도 한 발 내디뎌 성장통의 세계로 들어서기를 권하련다. 고통을 통과하며 자라갈 것인지 아니면 편하게 안주하며 시들어갈 것인지 선택할 때 이것 하나는 꼭 기억하길 바란다. 이야기의 죽음이야말로 작가의 죽음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 종말을 피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4호 2019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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