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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김무열과 함께한 <이기동 체육관> [No.89]

글 |이민선 사진 |심주호 2011-02-22 6,017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

 

‘이기동 체육관’에 걸린 시계는 멈춰 서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막으려는 듯이 일부러 건전지를 빼놓은 탓이다. 그런데 무엇이 시간이 다시 흐르도록, 멈춰버린 삶을 이어가도록 부추겼는지 이기동 관장은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벽시계에 건전지를 끼워 넣는다. 시곗바늘의 움직임을 조절하듯이, 시간의 속도와 방향도 조절할 수 있을까? 그보다 먼저, 우리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의식조차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닐지…. 김무열의 시계 속 톱니들은 제멋대로 어긋난 채 움직이다가 이제야 조금씩 들어맞기 시작했다. 시계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지만 지금에야 그의 시간은 좀 더 부드럽고 정확하게 흘러가고 있다.

 

 

땀이 주는 정직한 감동


연극 <이기동 체육관>을 본 김무열의 첫마디는 예상대로였다. “복싱 도장 다니고 싶어졌어요.”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는 관장과 복싱을 배우는 평범한 이웃들이 땀 흘려 운동하면서 긍정적으로 변하는 드라마를 본 후, 운동 좋아하기로 정평이 난 김무열이 이 작품에 호감을 느끼는 지점이 분명히 있으리란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기동 체육관>은 보험 설계사로, 시간 강사로, 또는 학생으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복싱을 배움으로써 얻는 희열을 단순히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준다. 장기간의 트레이닝을 거친 이들답게 배우들은 그저 ‘척’이 아닌 성실한 움직임으로 복싱 훈련 장면을 연기했다. 그들의 땀이 증명하는 열정이 객석에 그대로 전해져 등장인물들이 맘속에 품은 희망의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김무열 역시 그 진정성에 감흥을 느낀 모양이었다. “배우들이 복싱을 정말 잘하더라고요. 특히 이기동 관장님과 그의 딸, 정말 멋있었어요. 복싱을 통해 각자가 무언가를 찾아나가잖아요.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자신감일 수도 있고, 또 이루지 못한 꿈일 수도 있고요. 남자들이 이 공연을 본다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걸 느낄 거예요. 남자들에게는 그런, 운동을 통해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거든요.”


스포츠를 소재로 했다는 데서 예상할 수 있듯이 등장인물들이 운동을 함으로써 전에 없던 자신감과 활력을 얻게 되고, 그 긍정적 에너지는 인물들 간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소박하게나마 그들이 바랐던 일을 이루게 한다. 극 중 관장과 그의 딸, 고집 센 두 부녀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뒤틀려 있다. 둘 사이를 단절시킨 것은 복싱이지만, 결국 둘을 화해시키는 것 역시 복싱이다. “두 사람이 링 위에서 몸을 부대끼고 줄다리기하면서 마음이 조금씩 닿잖아요. 동적인 신체 에너지가 정적인 감성을 움직이게 한 거죠. 비록 원초적인 방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여요.” 김무열은 그가 느낀 <이기동 체육관>의 감동 요인을 설명했다.


김무열뿐만 아니라 많은 관객들은 복싱 대회 출전을 준비하는 관원들이 줄넘기하는 모습을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았다. 어떤 대사도 없이 모든 관원이 그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같은 동작을 한다. 극의 전개상 으레 방점이 찍힐 만한 순간에 단순한 행동을 반복할 뿐인데, 진지하게 줄을 넘는 성실함과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유대감이 느껴졌다. 김무열은 또, 관객들이 이기동 관장의 실력을 인정하게 되는 마지막의 아다지오 장면도 정말 좋았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 <삼총사>에서 김무열이 맡았던 달타냥 또한 움직임이 많은 역할이다. <삼총사>의 남자 배우들은 노래와 연기 연습뿐만 아니라 무술 연습을 병행했는데, 펜싱 자세를 익히고 기초 체력 유지를 위해 하체와 복근을 단련시키는 운동을 했다. “<삼총사>의 무술은 펜싱에 기본을 두고 있는데, 안 해본 운동을 하다 보니 안 쓰던 근육을 써야 해서 힘들었어요. 동료 배우들과 몸에 좋은 것 자주 챙겨 먹고, 평소 안 먹던 비타민도 꼬박꼬박 챙겨 먹었죠. <이기동 체육관>도 가히 다이어트성 공연이던데, 저 역시 <삼총사>를 공연한 날엔 체중이 줄곤 했어요.”


운동을 워낙 좋아하는 김무열은 브라질 전통 무예 카포에라를 배운 적이 있고, 지금은 근접 격투술을 배우고 있단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데 익숙해지는 것은 배우에게 장점으로 작용하리라 짐작된다. “운동을 하면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더 많이 알 수 있고 믿음감도 생겨요. 건강을 위해서는 물론이고 자신감을 북돋우고자, 또는 정신적인 동기 부여로서 운동을 합니다. 아, 이 말은 꼭 좀 전해주세요. 제가 운동하는 목적이 마치 몸을 보여주기 위한 것에만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정말 오햅니다. 자신감을 키우려고 운동을 했는데, 요즘은 오히려 눈치 보면서 운동을 자제하게 된다니까요.(웃음)”

 

 

나만의 시간을 채우는 비법

연초에 으레 하는 인사로 김무열에게 새해에 품은 결심을 물었다. 최근 몇 년간 뮤지컬 무대가 아닌 곳에서도 배우로서의 활약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이지만, 그 활동 영역 내에서 조금이나마 발전을 모색하려는 것이 그의 올해 목표이다. “배우는 제3자의 객관적인 시각을 통해 가치가 입증되는 존재잖아요. 제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치와 외부로부터의 것을 비교했을 때 후자가 더 중요해요. 하지만 절대로, 제 자신이 갖추기 바라는 가치를 포기할 수는 없고요. 올해의 목표는 두 가지 기준에서 볼 때 균등하게 한 단계 상승하는 배우가 되는 것입니다. 제 자신이 인정하는 가치와 대중이 제게 느끼는 가치가 함께 올라갔으면 하는 기대를 하고 있어요.” 뮤지컬계에 데뷔한 이래 관객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고, 이후 TV와 스크린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다양한 연기를 보여준 그는 그간의 작업을 통해 스스로 얻은 교훈을 머릿속에 되새겼다.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고 빠르게 움직일 줄도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손자병법』에서 이를 ‘풍림화산’이라고 일컫죠. 움직일 때는 바람처럼 재빠르게 하고, 기다릴 때는 숲처럼 고요하게 있고, 공격할 때는 불처럼 맹렬하게 하며, 머물러야 할 때는 산처럼 묵직하게 있으라고요.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내용입니다.”


김무열은 지난 몇 년간 여러 장르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것에 비해 2010년에 비교적 조용한 행보를 보였고,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일을 겪기도 했다. 지난해를 반추하며, 그는 아픈 마음을 추스르느라 의도치 않았던 휴식 기간을 가지게 되었고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걱정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연기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무대에 서는 것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했다. “다른 일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무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무대에 서는 순간 무척 행복한 거예요. 그동안 많은 어려운 일들이 있었고 저와 함께 슬퍼한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에게 너무 미안할 정도로 저는 무대에 서면 행복했어요.” 마음은 아프고 혼란스러웠지만, 결국 자신이 얼마나 연기하는 일을 좋아하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면 스스로도 행복해지듯이,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면서 자신도 즐거워지는 일을 하고 있다며, 김무열은 그림자가 걷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김무열은 지금 청춘의 마지막 문을 지나는 중이고, 나이의 앞자리 숫자도 바뀌었다. 그가 갓 스무 살을 넘겼을 때부터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가세마저 기울었다. 대학의 문턱을 넘지 못해 남들보다 한 해 더 입시 준비를 해야 했다. 어린 나이, 김무열 스스로 여린 감성을 지닌 때였다고 표현한 스무 살에 그는 누구 못지않게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무대에 선 후 좋은 작품,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엄청난 성장의 나날들로 그의 이십대가 채워졌다. “공교롭게도 이십 대의 시작과 끝이 같게, 스물아홉 살에도 굉장히 힘든 일들이 있었잖아요. 스스로 저의 이십 대를 되돌아보니 지독히 힘들었고 또 지독히 운이 좋았어요.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예술보다 삶이 먼저라고. 예술은 삶을 모방한 것이니까요. 이전까지는 제가 삶을 산 것인지, 예술을 한 것인지, 또는 공부를 한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제는 삶을 살려고요. 지금까지 경험한 것에 감사하고, 그 시간들 절대로 잊지 않고 꼭꼭 담아두고서 서른, 또 마흔을 맞으려고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9호 2011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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