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야>, 영 빅이 올린 현대판 셰익스피어
Twelfth Night
셰익스피어의 ‘열두 번째 밤’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공연을 자주 보지 않는 사람들도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아무래도 영국 본토에서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가운데 비교적 덜 알려진 작품들이 종종 무대에 오르며, 세계 여러 곳에서 자주 공연되는 작품들도 프로덕션에 따라 다른 해석을 보여준다. 또한 런던뿐 아니라 영국 전역에 걸쳐 다양한 프로덕션들이 올라가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대표적인 두 단체는 런던에 있는 셰익스피어 글로브 시어터와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 위치한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RSC)다. 두 곳 다 셰익스피어 작품만 공연하는 것은 아니지만, 셰익스피어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는 만큼 그의 작품이 라인업의 주를 이룬다. 그 외에도 내셔널 시어터, 올드 빅 시어터, 돈마 웨어하우스를 비롯한 크고 작은 수많은 단체들이 다양한 스타일로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재해석하며 꾸준히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달은 그 많은 작품들 가운데 영 빅(Young Vic) 무대에 오른 <십이야>에 대해 써보려 한다. <십이야>는 1602년 2월 2일 런던의 미들 템플 홀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이야기는 쌍둥이 남매인 바이올라와 세바스찬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두 사람은 배가 폭풍에 난파당해 헤어지게 되는데, 세바스찬이 죽은 줄 아는 바이올라는 낯선 이국땅 일라리아에 도착해 남장을 하고 올시노 공작 밑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아버지와 오빠를 여읜 올리비아 백작 부인을 사랑하는 올시노 공작과, 올시노를 위해 사랑의 메신저 역할을 하다 그를 사랑하게 되는 바이올라, 남장을 한 바이올라인 ‘세자리오’에 반하는 올리비아. 이 사랑의 엇갈림이 어떤 결말을 맺는지는 그 희곡을 통해 직접 확인해 보길 바란다.
‘십이야’는 영어로 ‘Twelfth Night’, 즉 열두 번째 밤인데 이는 크리스마스로부터 12번 째 밤인 1월 6일을 가리킨다. 가톨릭에서는 이를 주현절이라 하며 예수의 출현을 축하한다. 그렇다 보니 셰익스피어가 이 시즌을 위해 작품을 썼다고 혹자는 추측하기도 한다. 그런 만큼 『십이야』는 셰익스피어의 여타 작품들 중에서도 축제적인 분위기가 강하고, 사랑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가 극 전반에 퍼져 있다. 특히 남장을 한 바이올라를 중심으로 하는 상황적인 재미와 토비 벨치 경과 멜볼리오가 중심이 되는 캐릭터적인 재미가 작품의 주요 코미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미디 요소들이 겉으로 재미를 준다면, 그 이면에는 여자가 남장을 한다거나 주정뱅이 토비 벨치 경이 청교도적 위선자인 멜볼리오에게 조소를 퍼붓는 등의 사회적 이슈들 또한 내포되어 있다. 약 400년 전에 쓰인 작품 속에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들을 다뤘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요소 때문에 한국에서도 가족극 또는 어린이극 등 다양한 형태로 공연되는 게 아닐까 싶다.
『십이야』를 둘러싼 재밌는 가설 중 하나는 올시노 공작 캐릭터가 당시 런던을 방문했던 브라치아노의 공작, 버지니오 오르시노를 바탕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2018년 끝자락에 런던에서 공연된 <십이야>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현대적으로 탄생한 <십이야>
“If music be the food of love, play on(만약 음악이 사랑을 살찌우는 양식이라면 계속해 다오).” 이는 사랑에 빠져 있는 올시노 공작의 대사이자 극을 여는 첫 대사이다. 뮤지컬로 재탄생한 영 빅의 <십이야>는 한마디로 이 대사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공연이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현대화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원어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써야 하고, 무대 세트나 의상을 현대적으로 바꾼다고 현대화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상은 현대식으로 입고 연기는 고전적으로 해도 이질감이 느껴지고, 그렇다고 원어의 운율을 지켜가며 사실적인 연기를 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공연은 그동안 런던에서 봤던 수많은 셰익스피어 공연들 중에서도 어쩌면 가장 파격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뮤지컬화하면서 대부분의 대사는 원어를 쓰되 꽤나 많은 양의 대사와 노래를 현대어로 하기 때문이다. 사실 영국뿐 아니라 대부분의 영어권 국가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공연할 때 원어를 바꾼다거나 중간중간 현대어 대사를 넣는 것, 애드리브를 하는 것은 여전히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더군다나 영 빅의 <십이야>는 러닝타임이 인터미션 없이 1시간 30분이라 더더욱 놀라웠다.
객석에 들어서서 무대를 바라보면 노팅힐 거리에서 볼 수 있는 형형색색의 건물 모형들이 세트로 세워져 있고, 무대 중앙은 차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도로 위에는 폭스바겐 마이크로버스가 뒷자리에 ‘브라더’라고 써 있는 관을 싣고 주차되어 있다.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다. 원작의 배경인 일리리아는 고대 국가로 발칸 반도 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현재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쯤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무대 세트가 형형색색의 런던 노팅힐 거리인 것이다. 이것은 연출의 의도로서 주현절인 십이야를 8월 한여름에 열리는 노팅힐 카니발로 대체시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 내에서 노팅힐이라는 지명을 언급하거나 말로써 카니발을 표현하진 않는다. 지명은 원작에 따라서 일리리아를 쓰지만 전반적인 컨셉을 노팅힐 카니발로 한 것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컨셉이 현대화를 위한 하나의 장치로만 설정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영 빅의 새로운 수장 콰메 퀘이-아마
영 빅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에 올드 빅 연극 학교에서 파생된 단체로 시작되었다. 당시 학교 선생님들을 주축으로 꾸려진 영 빅의 주된 목적은 9세에서 15세 사이의 아이들을 위해 고전 작품을 공연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2년 뒤인 1948년 중단되었는데, 그 이후 1970년 현재의 자리에 영 빅이라는 이름 아래 극장이 들어서 내셔널 시어터의 별관 극장처럼 쓰이다 1974년 독립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한다. 당시 내셔널 시어터의 예술감독이었던 로렌스 올리비에는 영 빅을 두고 “이곳에서 우리는 젊은 관객들을 위한 공연을 만들 것이고, 제작자와 작가, 배우 들을 위한 실험적인 워크숍의 장을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목표는 관객들이 다가오기 쉬운 캐주얼한 극장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높은 수준의 작품을 저렴한 티켓으로 젊은 관객층에게 선보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목표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18년 영 빅의 새로운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콰메 퀘이-아마(Kwame Kwei-Armah)는 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해 극작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며 두각을 나타낸 뒤 현재는 연출로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있다. 영 빅의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후 한 인터뷰에서 영 빅을 어떤 에너지로 끌고 갈 생각이냐는 질문에 그는 “영 빅은 현재까지 펑키한 에너지를 가지고 왔고, 나는 펑키함을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펑키함을 계속해서 유지할 생각이다”라고 답했다. 이런 그의 긍정적인 에너지와 영 빅의 펑키함, 그리고 영 빅의 기본 모토가 만난 결정체가 이번 <십이야>가 아니었나 싶다.
다시 노팅힐 카니발이라는 컨셉으로 돌아가 이야기하자면, 이는 아프리카계 영국인으로 태어난 콰메 퀘이-아마가 그동안 관심을 갖고 발전시키려 애써 온 인종 문제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그는 이안 로버츠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자신의 조상이 가나에서 팔려온 노예였다는 것을 알고 이름을 바꿨다). 이유는 노팅힐 카니발이라는 행사 자체가 캐리비언 문화가 주가 되는 카니발이기 때문이다. 이 카니발은 1950년대부터 이어져오며 런던 내에서 그 나름의 사회적 역할을 톡톡히 해왔고, 캐리비언 문화를 대표하는 카니발이 되었다. 특히 최근엔 노팅힐 부근에서 발생했던 그렌펠 타워 사건과 윈드러시 스캔들 같은 사건들로 인해 2018년의 카니발은 더욱더 의미 있는 행사였다고 한다. 그렇기에 주현절이라는 고대의 카니발을 현대의 노팅힐 카니발로 바꿈으로써 현재 관객들에게 좀 더 다가가기 쉽게 하면서도 인종적인 사회 문제를 내포해 신임 예술감독으로서의 선전 포고를 작품에 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선택 하나가 그저 단순한 재미로서의 선택이 아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에 이들의 고민과 노력, 그리고 실력에 또 한 번 감탄을 내뿜었다.
다함께 즐기는 카니발
공연 시작 10분 전, 배우들이 하나둘 무대로 나오며 음악이 흘러나오고, 배우들은 소량의 음식이 담긴 접시를 가지고 관객들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한다. 몇몇은 무대에서 춤을 추거나 관객들과 대화를 나눈다. 때문에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이 카니발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공연 시작 전 시끌시끌한 관객들의 말소리에 음악과 음식이 곁들여지면 그 시끌벅적함은 어느덧 거리에 나와 카니발을 즐기는 사람들의 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무대 구성은 그다지 멋있지도, 화려하지도 않는데, 그 멋있지 않음이 좋다. 노팅힐의 거리를 연상시키는 집들과 그걸 마치 원근법으로 그려 넣은 듯 지은 세트, 중앙을 가로지르는 차도, 형형색색의 꼬마전구와 만국기가 걸려 있는 천장, 여기에 하수구 뚜껑까지 배치해 놓는 아기자기함까지. 런던의 영 빅에서 현대판 셰익스피어의 일리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십이야>에 걸려 있는 만국기 속 태극기를 보는 느낌이란 묘한 자부심을 갖게 했다. 캐릭터들은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을 차용하여 관객들에게 다가가는 친근감을 높였다. 예를 들면, 토비 벨치 경은 동네의 주정뱅이 할아버지로, 앤드류 경은 선글라스를 끼고 스냅백을 쓴 힙스터로, 하녀인 마리아는 자메이카 억양을 쓰는 센 흑인 누나로, 그리고 광대인 페스티는 버스킹 연주자로 탄생했다. 광대 페스티 얘기를 하니 자연스레 음악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R&B, 팝 장르의 음악을 극에 입히면서 관객들은 쉽게 리듬을 타게 된다. 특히 페스티는 『겨울 이야기』의 시간, 『페리클레스』의 가우어와 비슷한 선상의 캐릭터로서, 다른 인물들을 대변하거나 때때로 그들을 지켜보며 관객과 배우들 사이를 줄타기하는 느낌이다. 페스티를 맡은 멜리사 알란이라는 배우는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고음의 가창력으로 감탄을 자아낸다. 특히 ‘Is this Love’라는 곡을 관객을 끌어당기며 완벽히 소화하고, 바이올라, 올시노 공작 그리고 올리비아의 엇갈린 마음을 집중력 있게 전달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세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또 한 명,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말볼리오이다. <십이야>를 보면 단연코 눈에 띄는 인물 중 하나가 말볼리오일 것이다. 올리비아의 집사 격인 그는 <십이야>에서 코미디의 기운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물론, 억지로 웃기려고 노력해서 웃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 말볼리오를 연기하는 제라드 캐리는 정말 대단한 코미디 연기를 보여준다. 세그웨이를 타고 등장해 탭댄스를 추는 말볼리오라니. 그의 등장만으로 관객들은 자지러진다. 말볼리오는 심지어 무대 앞에 만들어 놓은 작은 웅덩이에서 물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데 그 모습이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를 연상시켜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말볼리오의 이런 자기애가 충만한 성격을 무리하게 짜낸 게 아닌가 싶어 조금 아쉬웠다. 물론,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나 또한 공연 중 배를 잡고 웃었으니 말이다. 어찌되었든, 영 빅의 모토에 걸맞게 배우들도, 관객들도, 극장 전체가 에너지 넘치는 공연이었다.
이번 <십이야>가 특별했던 또 다른 이유는 뉴욕의 퍼블릭 시어터와 협업했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 워크숍이라는 이름 아래 1954년부터 시작된 퍼블릭 시어터는 매년 여름 센트럴 파크에서 공연되는 ‘셰익스피어 인 파크’라는 프로그램으로 뉴요커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단체이다. <십이야>는 퍼블릭 시어터의 수장인 오스카 유스티스와 영 빅의 수장인 크웨임 크웨이-아마가 공동 연출을 맡아 만들어낸 작품으로, 그 덕분에 훨씬 더 다채로운 색깔을 낼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흥미로운 점은 서른 명의 커뮤니티 코러스, 그러니까 영 빅이 위치한 동네에서 선발된 일반인 배우들이 보여주는 앙상블이었다. 프로페셔널한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테크닉적인 면에서 부족함은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연기하며 춤추고 무엇보다도 무대 위에서 즐기는 게 눈에 보였다. 특히 배우들과 일반인 배우들 사이에 벽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한 팀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공연을 만들어가는 모습은 부러울 정도였다.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 내며, 무대를 소중히 여기는 모습에 또 한 번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운명적 선택 또는 개인의 선택
내가 원하는 사랑과 어쩌면 정해져 있을지도 모를 운명의 사랑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눈앞에 있음에도 보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함과 나만 생각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그리고 조금만 눈을 뜨고 드넓게 생각하면 서로를 이해하며 화합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상적인 세상도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까지. 셰익스피어라고 해서 무조건 무게를 잡고 멋있게 연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십이야>는 맥락에 맞지 않게 그저 가볍게만 다가가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 공연이었던 것 같다. 가족끼리 봐도, 연인끼리 봐도, 친구들끼리 봐도 흥겹게 즐길 수 있는 훌륭한 가족극을 본 느낌이었다.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이 연일 터져 나오는 오늘날 무대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문제들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단 그런 문제들을 내포하면서 한 자락의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지 않을까. 물론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 생각 안에서의 선택은 개개인에게 맡겨보기로 한다. 개인의 선택은 <십이야> 인물들의 사랑의 선택처럼 존중받아 마땅하니 말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3호 2018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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