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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몬테크리스토> 류정한·최현주 [No.89]

글 |배경희 사진 |김호근 2011-02-14 7,026

 

지난해 봄, 관객과 처음 만난 <몬테크리스토>는 그해 안정적으로 흥행에 성공한 거의 유일한 신작이었다. 그리고 계절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찾아온 봄, <몬테크리스토>가 재공연을 앞두고 있다. 초연의 영광을 함께한 배우들이 그대로 출연하는 가운데,  ‘프리마돈나’로 떠오른 최현주가 캐스팅 리스트에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  “그동안 내가 잊고 있던 것들을 느끼게 해줘 꼭 다시 해보고 싶었던 작품”이라고 말하는 류정한과, “이 작품의 음악에 완전히 매료됐다”고 말하는 최현주.  다른 듯, 닮은 두 배우. 두 사람은 어떤 호흡을 보여 줄까?

 

최현주가 입은 화이트 드레스는 비엘 바이 류지원, 류정한이 입은 화이트 셔츠와 베스트는 모두 지이크 파렌하이트, 블랙 수트는 트루젠, 행커치프는 닥스 제품. 벨트와 슈즈, 보타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뿌리는 변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원한다면 변하도록 노력해야 한대요. 지금은 노력하는 과정이지만, 언젠간 진심으로 변하겠죠.” - 류정한

 

“벌써 15년 차가 되셨잖아요.” 이제 막 자리를 잡고 앉아 ‘준비 완료’라는 표정을 짓고 있던 류정한이 마치 아주 무서운 꿈을 꾼 것처럼 놀라 되묻는다. “15년이요?” 잠시 동안의 정적. 음,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97년에 데뷔하셨으니까…, 햇수로 15년 맞는 데요?” “에…? 와…. 네, 맞는 것 같아요.” 또 다시 정적. “지금까지의 행보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하세요?” 분장실을 가득 채운 적막을 깨고 첫 번째 질문을 건넸다. “성공적이라기보다는…. 기특해요. 큰 사고 없이 한결같이 해온 것도 그렇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제 나이 대 배우들이 많지 않은데 그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행복하죠. 예전에는 ‘10년 됐는데 어떠세요?’라고 물으면 한 것도 없는데 그런 질문을 받으니까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제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터뷰 시작부터 지난 행보에 대해 물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작품 목록 때문이다. 류정한의 출연작들을 살펴보면 어떻게 이런 흠잡을 데 없는 결정을 해왔는지 궁금해진다. 요컨대 류정한은 가장 영리하게 작품을 선택해온 배우다. “기본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면 하고 바라지만, 일단은 제가 하고 싶고, 또 배울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작품이 다양성을 띄게 됐고, 어쨌든 제가 좋은 텍스트의 공연을 잘 잡은 것 같아요. 운이 좋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러고 나서 잠시 사이를 두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실력은 다 비슷해요. 연기를 얼마나 뛰어나게 할지, 또 노래를 얼마나 미치도록 잘 부를지 모르겠지만 배우의 실력 차라는 건, 우리가 아예 닿을 수 없는 배우 말고는 거의 백지장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배우든 작품을 잘 만나는 게 가장 큰 행운인 것 같아요.”

 

배우라는 자부심이 대단해 보이는 그에게서 그런 말을 듣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빙빙 둘러서 진짜 물어보고 싶었던 건 이거다. 오랜 시간 활동하다보면 인맥 때문에 출연하게 되는 작품이 한두 작품은 있기 마련인데, 어떻게 그런 부탁을 물리칠 수 있었는지 말이다. “인맥 때문에 작품을 했다면 제 작품 수가 두 배는 많았을 거예요. 제작자들도, 연출도 다 알아요. 쟤는 아무리 친해도 안 한다면 안 하는 걸요. 그럴 땐 정중하게 얘기해요. 같이 해서 시너지를 내고 싶지만 나하고는 너무 안 맞는 것 같고,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요. 그리고 반대로 부탁을 해본 적도 없어요. 보통 사석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 좀 시켜줘. 나 진짜 열심히 할게’ 그런 말 많이 하거든요. 해도 돼요. 캐릭터하고 안 맞으면 안 시키니까. 하고 싶은데도, 전 그 이야기를 못해요. 내 밥이 아니다 생각하면 하고 싶어도 많이 참는 편이고.” 말을 마친 그가 소리 없이 웃어 보인다.

 


이제 막 마흔의 나이에 접어든 배우. 솔직히 말하건대 류정한은 결코 다가가기 쉬운 타입은 아니다. 우아함과 오만함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예민하고 이성적으로 보이는 이 배우는 홀로 고고하게 핀 난초같다. 인터뷰 이틀 전 진행된 촬영 날 스튜디오에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은 류정한. 늦어서 미안하다고 대충 얼버무리는 배우는 많아도 먼저 와서 준비하는 배우는 많지 않다. 신인 배우가 아니라면 더더욱. “싫은 소리 듣고, 싫은 소리 하는 거 되게 싫어하나 봐요. 완벽주의…?”하고 말끝을 흐리자 그가 정정한다. “개인주의죠. 네, 제가 그렇게 자랐어요. 남한테 절대 피해 안 주고, 나도 피해 안 받자 주의였어요. 클래식 하는 사람들이 그런 경향이 있잖아요(그는 성악과 출신의 뮤지컬 배우다). 저도 그중의 한 명, 그중에서도 심했죠. 나 터치하지 마, 나도 너 안 건드릴게. 이런 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술술 이어간다. “그래서 뮤지컬을 시작했을 때 되게 힘들었어요. 내가 왜 섞여야 해? 내가 왜 저 사람의 리액션을 신경 써야 하지? 내가 딱 맞춰서 걷고, 내가 할 것 하고, 노래하면 되는데. 그러니까 연기 못한다는 얘기가 당연히 나오죠. 정말 멍청했던 것 같아요.(웃음) 그러다 조금씩 깨닫게 된 거죠. 이쪽 일이라는 게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면,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면, 상대 배우를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요.”


류정한은 본격적으로 뮤지컬을 시작한 이후 소위 톱 배우 자리를 지켜왔다. 지금까지 도드라지는 슬럼프는 없어 보이는데, 그는 매 공연마다 슬럼프에 빠진다고 했다. “<쓰릴 미> 초연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점선이라는 화가가 저를 인터뷰하신 적이 있어요. 그때 제 얼굴을 보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너는 참 너를 괴롭히는 것 같다고.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뮤지컬계에서 너 정도면 대가인데, 대가들은 세월을 거치고 나서 자기도 용서하고 남도 용서할 줄 알게 된다는 거죠. 이 정도 했으면 잘하든 못하든 좀 편하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만날 공연하기 전에 마음 졸이면 관객들도 얼마나 불안하게 볼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즐기기까지는 힘들더라도 이젠 제 자신한테도 너그러워지고 남들한테도 더 너그러워져서 좀 즐겁게 하려고요.”


자신에게 아무리 냉정하다고 해도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한두 가지쯤은 있지 않을까? “꾸준하게 공연을 하고, 또 잘하려고 노력을 해왔다는 것. 그런 노력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죠. 옛날에 잠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드라마 감독들이 드라마 한번 해보겠냐고 했을 때 할 걸 그랬나. 데뷔는 일찍 했지만 제대로 한 게 없었고, 너무너무 힘들었을 땐 얼굴을 좀 알렸으면 어땠을까 싶더라고요. 물론 얼굴을 알린다고 다 잘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됐을지 모르지만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겠죠. 텔레비전에 몇 번 나왔던 연예인으로 남았을 수도 있고요. 어쨌든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다 안하겠다고 했는데 뮤지컬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나서는 내가 여기서 얻는 만족감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안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너무너무 감사하더라고요.”


류정한은 앞으로 좀 더 오래도록 무대에서 뮤지컬 배우로 살아가고 싶다고 말한다. “내가 노력한 만큼 주변에서 알아주고,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옛날에는 인정을 거의 못 받았어요. 실력으로도 그렇고, 인간적으로도 그렇고. 30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선배들도 기특하다, 열심히 하고 있어서 좋다고 이야기해 주세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더 열심히 해야지, 내가 이 일을 하길 참 잘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차기작 <몬테크리스토>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그의 인생 이야기만 했다. 하지만 연기의 영감은 어디서 얻었고, 캐릭터를 어떻게 파고드는지, 또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듣는 것보다 인생 이야기야말로 그의 연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해답이 될지도 모른다. 더욱이 <몬테크리스토>의 주제는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이 아닌가.

 

 

 

최현주가 말했다. “전 제가 음악적인 면에서나 연기적인 면에서 뛰어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런데, 열심히 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건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증명해 온 셈이다. 

 

문을 열고 약속 장소로 들어서자, 일찍 도착해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있던 최현주가 싱긋 웃는다. 먼저 인사부터. “어젠 좀 쉬셨어요?” 이틀 전 촬영 날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그녀를 괴롭힌(?) 것에 대한 사과의 인사다. “제가 못해서 그런 거니까 괜찮아요.” 그녀가 겸손하게 말한다.(그녀와 잠깐이라도 이야기해 보면 ‘숙녀답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잠시 사소한 대화를 주고받은 뒤 그녀의 차기작 <몬테크리스토>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몬테크리스토>는 음악으로 먼저 접했어요. 오디션 제의를 받고 공연 OST를 받아서 듣는데 노래가 정말 좋았어요. 아무래도 성악을 전공했으니까 아직까지는 음악적인 부분에 치중하게 돼요. 이 작품을 하기로 결정하는 데 크게 작용한 것도 음악이고요.”


지금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는 장소는 <몬테크리스토>의 연습실. 오늘은 그녀의 첫 연습 날이다. 본격적으로 연습이 시작되기 전, 그녀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무엇보다 궁금한 건 장성한 아들이 있는 어머니인 메르세데스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어린 역할만 했는데, 메르세데스는 초반에는 어리지만 나중엔 아들이 생기잖아요. 제가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처음 맡아보는 역할이라서 어떻게 잡아갈까 고민하고 있어요. 대본상으로 메르세데스는 에드몬드가 죽은 줄 알고 있고 그 뒤에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아이가 에드몬드의 분신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물론 어머니로서 아들을 대하는 마음도 있지만 아이는 에드몬드를 잊지 못하게 하는 매개체인 것 같아요.”

 

그녀는 아직 작품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못했지만, 메르세데스의 사랑은 자신과 닮은 것 같다고 했다. “전 한눈에 반하고 불꽃같이 확 타오르는 편은 아니에요. 미지근하게, 점점, 하지만 깊게 빠져요. 그런 면에서 메르세데스하고 같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메르세데스가 에드몬드랑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가 연기하는 거니까 제 생각엔 메르세데스도 확 타오르는 타입일 것 같지 않아요. 천천히 사랑을 키워가다가 그 마음을 계속 간직하는 거죠.”

 


최현주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본 극단 시키에서의 활동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극단 시키를 통해 일본에서 먼저 활동을 시작한 배우를 여럿 알고 있지만, 일단 그녀는 서울예대 출신의 배우도 아니며 오디션을 보게 된 사연 역시 독특하다. “원래는 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가려고 했어요. 유학을 가면 공부를 계속해야 하니까 한 학기, 일 년 정도 학업을 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걸 잠깐만 해볼 생각이었어요. 저는 노래하는 걸 너무 좋아하니까 노래하면서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고민하다가 대학교 때 본 <오페라의 유령>이 생각난 거고요. 나도 한번 해볼 수 있겠구나 해서 알아봤는데 뮤지컬을 하려면 오디션을 봐야 한대요. 그래서 정보를 찾아서 오디션을 보게 됐고 그게 시키 오디션이었던 거예요.” “일본 극단 시키 오디션인 줄 모르고요?” “전혀 몰랐어요. 어차피 외국 생활도 미리 해 볼 겸, 잠깐 있다 올 생각이어서 망설임 없이 갈 수 있었죠.” 하지만 그 ‘잠깐’은 ‘4년’이라는 시간이 되고 그동안 그녀는 주역을 맡아 커리어를 쌓았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대로다. 지난 2009년에 공연된 <오페라의 유령>에서 크리스틴으로 국내로 돌아오게 된 것!  


원래는 <오페라의 유령> 공연을 마치면 일본으로 돌아가기로 했다던 그녀가 어떻게 한국에 남기로 마음을 굳힌 걸까? “제가 계약으로 시키에 묶여있다든가 꼭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니었어요. 공연을 마치면 돌아와서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는 거였고, 처음엔 저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 공연을 하다 보니 정말 좋았고, 곧바로 이런 좋은 작품을 하게 돼서 그쪽에다 말씀을 드렸죠. 선생님(아사리 게이타 대표)이 한국에서 한국어로 공연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한다면서 한국에서 할 작품이 있으면 하고 일본에도 와달라고 그러시더라고요.” 모국어로 공연하면 당연히 더 좋을 테지만 그래도 마음이 바뀌게 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일본에서 공연할 때나 한국에서 공연할 때나 크게 다른 건 없어요. 그런데 언어가 다르다는 것뿐인데 뭔가 굉장히 편해지더라고요. ‘이유가 뭐야?’라고 물어본다면 ‘편해서’라고 간단히 답할 수밖에 없지만 제 마음속에서 느껴지는 건 굉장히 다르거든요.”


최현주는 자신이 절대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우라면 모든 일에 적극적이고 끼가 넘칠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물론 그런 분들도 많지만, 저는 제가 어떻게 배우가 됐을까 싶을 정도로 보여줄 게 없는 사람이거든요. 저는 남들이 배우라고 소개해주지 않으면 주변에 묻혀서 보이지도 않을 거예요.(웃음)” 그리고 관객들이 자신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이렇게 덧붙였다. “연기 잘하는 배우를 좋아하기도 하겠지만 저 같은 사람은 그분들과 너무 다르지 않아서 다가가기 쉽고, 받아들이기 쉬워서 좋아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가끔 해요.” 다른 건 몰라도, 최현주에 대해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녀에게는 배우라는 과도한 자의식이 없다는 거다. 그래도 스스로 배우라고 느끼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 “제가 긴장을 잘해요. 그런데 그렇게 떨다가도 무대 위에 오르면 떨림이나 긴장은 사라지더라고요. 아, 내가 배우긴 배우인가 보다, 그럴 때 느껴요.” 어쨌든 최현주 스스로는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녀의 데뷔 공연에서 많은 관객들이 감동을 받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가 행여나 한 작품만 하고 일본으로 돌아가 버리면 어쩌나 마음을 졸이다 차기작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그녀의 두 번째 작품, “지난 시즌 배우들이 이 역할을 너무 잘했는데 내가 감히 해도 될까”라는 걱정으로 출연을 망설였다는 <몬테크리스토>, 그녀는 분명 전보다 더 뜨거운 박수를 받을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9호 2011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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