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하고 매력적이지만, 새로운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는 순간 죽음을 맞는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여인 루시. 그녀의 깊은 아픔을 무대 위에서 쏟아내고 있는 두 배우 김선영과 선민에게 초연 이후 여섯 번째 앙코르 공연 중인 <지킬 앤 하이드>는 더없이 특별한 무대가 되고 있다. 가수로 활동하던 선민에게는 뮤지컬 데뷔 무대인 동시에, 2004년 <지킬 앤 하이드>의 두 번째 공연 이후 꾸준히 특유의 카리스마와 애절한 감성으로 관객을 사로잡은 김선영에게는 마지막 무대이기 때문이다. 만남과 헤어짐의 길목에서 마주한 두 여인. 10년 이상의 나이 차를 극복한 김선영과 선민이 들려준 두 사람의 아주 특별한 인연을 지면으로 전한다.
선영 씨의 소개로 선민 씨가 루시 역의 오디션에 참가했다면서요?
김선영 그게 정말 우연이었어요. 오랜만에 선민이를 만났는데 때마침 제작피디한테서 전화가 온 거예요. 루시를 할 만한 배우가 없다고. 순간, 앞에 앉아 있는 얘한테 눈길이 가는 거죠. 노래만큼은 누구보다 잘하는 친구니까. 그래서 일단 전화부터 끊고 물어봤어요. 뮤지컬에 관심 있냐고. 연기 경험 없으니 기대는 하지 말고 경험 삼아 오디션 한번 보라고 다리만 놔줬는데, 어떻게 합격을 하더라고요. 잘은 모르겠지만, 루시 역의 새로운 얼굴을 찾고 있었던 것이 좋은 인연이 된 것 같아요.
선민 사실 두려움이 있었어요. 뮤지컬을 하려면 노래, 연기, 춤 모든 방면에 재능이 있어야 하잖아요. 언니 공연을 봐오면서도 뮤지컬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디션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처음엔 고민했는데 어차피 경험 삼아 보는 거니까. 근데 1차에 붙고 나니까 욕심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2차에서 떨어지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았어요.(웃음)
두 분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나이 차가 꽤 많이 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김선영 선민이가 고 1때니까 2003년이네요. 개인적으로 학생들 보컬 레슨을 하곤 했는데 그때 아는 매니저 분이 가수 지망생이라며 이 친구를 데려왔어요. 교복 차림에 가방 메고 나타나서는 빅마마의 ‘체념’을 부르는데, 열일곱 살짜리가 어떻게 저런 소리를 내지 싶더라고요. 지금도 앳되어 보이지만 그땐 정말 애기 같았거든요. 레슨은 한두 달인가밖에 못했는데 나한테 감동을 받았는지(웃음) 가끔씩 연락을 해왔어요. 공연도 보러 오고. 스무 살 되자마자 일본에서 가수 활동을 해서 <맨 오브 라만차> 일본 공연 갔을 때도 보러 왔고요. 그렇게 계속 이어진 거예요.
선민 그렇다고 자주 만난 것도 아니에요. 루시 오디션 보라고 한 것도 거의 1년 만에 언니를 만났을 때였는데, 이렇게 공연까지 같이하게 되니까 정말 신기해요.
김선영 사실 얘가 특이한 거죠. 한참 나이가 많은 내가 뭐가 편하다고 계속 연락을 했는지…. 그래도 그게 참 고맙고 귀엽더라고요. 선생님과 제자로 만났지만 점차 친구처럼 지내게 됐어요.
선민 그땐 제가 서울 올라온 지 얼마 안 됐고, 노래 선생님을 경험한 적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언니를 만났던 거라 충격을 좀 받았던 것 같아요. 언니가 해주는 얘기나 노래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거든요.
어떤 점이 그렇게 인상적이었어요?
선민 첫 레슨 때 ‘노래를 할 때는 어떤 감정이든 이유가 네 안에 있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그냥 노래하는 거 좋아하고 들리는 대로 부르는 아이였지,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노래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 이후로도 그런 얘기를 누구한테도 들어본 적이 없고요. 노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처음으로 고민한 계기가 됐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인상적이었고, 존경하게 됐죠.
김선영 선민이뿐만 아니라 많은 친구들이 노래할 때 어떤 감정이었는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를 물어보면 ‘슬픈 것 같아요’, ‘가슴이 아파요’ 하는 막연한 얘기를 하거든요. 자기가 그 상황까지 노래를 하는 동안 아무 플랜이 없었던 거예요. 노래도 연기니까 가사 한마디, 한마디가 계획하에 나오지 않으면 듣는 사람들도 설득이 안되고 그냥 흘려듣고 말거든요. 내가 왜 이 시점에 노래를 해야 하는지, 왜 이런 표현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해요. 오디션에서 이목을 끄는 친구들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도 그들만의 정서나 정신이 없기 때문이거든요. 노래라는 건 결국 사람의 정서를 건드려야 하는데 현장에 나온 친구들을 보면 제일 중요한 부분은 놓치고 대부분 기술적으로 다가가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근래 들어 학교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게 이제 시작하는 친구들이라도 근본적인 훈련을 통해서 작품이나 캐릭터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히면 좋을 것 같아서예요.
전에 해외 스태프가 한국 배우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보컬 트레이닝 수업을 경험한 적이 있는데 상황이나 심리 변화에 대해 고민할수록 노래가 다르게 들리더라고요. 김선영 교수님과 함께 생활하게 될 한국예술원 뮤지컬학과 학생들은 무척 재밌을 것 같은데요.
김선영 그냥 학생들과 부대껴서 놀고 싶어요. 현장에서 만들어진 것을 가르치는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생각을 함께 나누고 토론하고 토의하는 창의적인 장을 만들어보고 싶거든요. 노래하는 스킬이 아니라 ‘왜’ 노래하는지에 대해 고민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개인적으로 졸업 전에 많은 작품을 섭렵하는 작업보다는 작품 분석에 대한 본질적인 교육이 더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조급한 마음에 자기들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스킬만 배우는 게 아니라, 정확히 뭘 원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왜 하는지, 작품이나 노래를 분석할 때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고민하면 좋겠어요.
그러고 보니 선민 씨도 올해부터 다시 선영 씨의 제자가 되네요.
선민 네. 사실 음악하면서 대학에 대한 미련이 없었는데 <지킬 앤 하이드>를 하면서 뮤지컬에 대한 호기심과 어떤 의지가 생겼어요. 무엇보다 언니한테 다시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게 학교를 선택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 같고요.
김선영 사실 제가 추천하기도 했어요. 뮤지컬을 하기 위해 연기를 배워야할 필요도 있었지만,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여러 가지 경험들이 음악을 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선민이 같은 친구가 있음으로 인해서 순수하게 배우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입학한 다른 학생들도 좋은 영향을 받을 것 같고요. 재밌을 것 같아요.
선민 씨의 경우 이제 시작이긴 하지만, 직접 연기를 하면서 바라본 선영 씨의 무대는 어떤 느낌인가요? 노래만 할 때와는 많이 다르지 않아요?
선민 훨씬 더 대단해 보이죠.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전 언니가 노래를 한 음, 한 음 뱉을 때마다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가진 것 같아요. 흉내를 낼 수도 없어요. 아직 누구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진 않지만, 언니를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아요. 곁에서 떠나지 않으려고요. 이번에 같은 역을 하면서 언니가 루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어요. 그것보다 언니, 이번 공연이 정말 마지막이에요?
김선영 응. 더는 힘들어서 못하겠어.(웃음) 사실 이번 공연은 마지막이라는 의미만으로도 재밌게 참여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연습을 하면서 그동안 풀어내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해결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정말 기뻤어. 똑같은 작업을 해도 내가 얼마나 의지를 갖느냐에 따라서 더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됐거든. 연습도 즐거웠고, 무대 위에 있는 게 이렇게 재밌는 일인지 처음 느꼈어. 그렇게 오랜 동안 루시 노래를 했는데 이제야 한 소절 한 소절이 내 머리와 가슴에 박히면서 입 밖으로 퍼져 나오는 걸 느끼다니 말이야.
선민 그런데 마지막이라니 아쉽지 않으세요?
김선영 전에 서주희 선배님도 이번 공연이 마지막이라는 얘기에 정색하시면서 그러시더라. 작품마다 관객들에게 영적인 해갈을 줄 수 있는 역할이 있는데 <지킬 앤 하이드>에서는 루시라고 생각한다고. 캐릭터들 중에 내면의 변화가 가장 급격하게 보이는 인물이기도 하고 말야. 어리고 풋풋한 연기만으로 되는 게 아니니 혹시나 나이 때문에 그만두는 거라면 그러지 말라고. 내 생각도 그래. 대사는 몇 마디 없지만 루시는 노래 안에서 인생과 철학을 얘기하거든. 삶의 의지나 자기의 현실을 뛰어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얘기하는데 인생을 모르면 제대로 들려줄 수가 없어. 시즌별로 가사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지금의 루시는 단순히 사랑 타령하는 비련의 여인이 아니라, 한 인물을 통해서 내 삶이 변하는 여정을 관객들과 계속 공유하는 인물이거든. 지난 시즌까지는 나도 그냥 하기에 바빴는데, 이번 공연에야 비로소 완벽하게 내 피부로 느끼고 이해하게 됐어. 그만두려는 시점에 말야. 얼마나 아이러니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루시는 지금이 정점이라고 생각해. 루시를 찾아간 시점도 그렇고, 여배우로서 가장 자신감을 보이고 루시로서 아름답게 보이는 시점도 그렇고. 캐릭터로서 온전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때 무대 위에서 펼쳐내고 다음부터는 그냥 객석에서 공연을 보고 싶어. 만약 이번에 이런 자유로움을 느끼지 못했다면 아쉬움이 남아서 늙어서도 후회를 하겠지만, 아쉬움이나 미련은 없어. 이번 공연을 통해 내가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그저 감사하고 행복해. 내 삶의 목표가 ‘멈춰있지 말자’거든. 앞으로도 계속 여배우로 살아야겠다 싶고, 내일에 대한 기대감도 더 커지고. 너도 한 세 번 이상 루시로 살아보면 이게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을 거야. 정말 좋은 기분이야.
선민 씨는 뮤지컬을 직접 해보니 어떤가요? 베테랑 배우들이 워낙 많이 참여한 프로덕션이라 부담도 컸을 것 같은데요.
선민 사람들이 제 얼굴에 ‘즐겁다’가 써있다고 할 정도로 재밌어요. 처음엔 저도 겁을 많이 먹었는데 뭔가 가르치려고 하시는 분들이 안 계셔서 거의 스트레스 없이 연습한 것 같아요. 무대에 서는 건 연습이랑 또 다른 재미가 있더라고요. 미리 알았더라면 더 재밌게 연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물론 고민하고 있는 것들이 있지만 그건 공연 끝날 때까지 계속해야 하는 일이니까 괜찮아요.
김선영 진짜 미안한 게, 오디션 볼 때도, 연습할 때도 얘한테 아무 도움을 못 줬어요. 그냥 노래에 의미를 담아서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얘기밖에 한 게 없어요. 나한테 섭섭했을 수도 있는데, 아무리 처음이라고 해도 선민이만의 루시가 분명 있을 텐데 누군가가 주입식으로 가르쳐주면 얘의 장점이 나오기도 전에 가둬질 것 같더라고요. 사실 귀찮기도 했고. 나 하나 다스리기도 힘든데.(웃음) 다행히 알아서 잘 찾아가더라고요.
선민 아휴, 서운하긴요. 뭔가 물어보면 항상 열린 마음으로 가르쳐주시는 분인 걸 알고 있는데. 오히려 멀리서 바라봐 주신 게 감사했어요. 그래서 더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거든요.
연습할 때보다 무대 위에서 더 재미있다는 걸 보니 선민 씨가 본 경기에 강한 스타일인가 봐요.
김선영 아무래도 노래를 오래해 온 친구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큰 무대에도 많이 서봤고. 그래서 공연 전에 해준 얘기가, 무대에 올라가면 온전히 네 것이니까 마음대로 하라는 거였어요.
선민 제가 제일 큰 힘을 받은 한마디에요. 마음대로 하라는 얘기가 어떤 말보다 저한테 자신감과 큰 힘을 주더라고요. 공연 끝나고 칭찬을 받는 날 대부분이 그 얘기 생각하고 무대에 오른 날이에요.
김선영 열일곱에 혼자 대구에서 올라와서 가수 준비하고, 일본에서도 혼자 지내면서 활동을 한 아이잖아요. 평범한 생활을 했던 친구들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왔고 또 노래는 더 많이 성숙해져 있고. 연기적인 유연성은 당연히 없지만 음악을 통해 갖고 있던 자신감을 무대에서 펼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또 걱정을 안했던 게, 얘가 쥐뿔도 없으면서 여유만 많거든요. 저런 여유라면 무대 위에서도 뭔가를 하겠다 싶었어요.
선민 아무것도 몰라서 가능했던 일 같아요. 그냥 해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용기가 있었던 거죠. 뮤지컬도 오래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못했을 거예요.
무대에 선 모습을 본 지인들의 반응은 어땠어요?
선민 저 혼자만 즐거운 건 아닐까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좋게들 봐주셨어요. 친구들은 제가 뭔가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면서 충격 받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김선영 기본적으로 노래 실력이 정말 훌륭하잖아요. 나도 루시를 하고 있고 앞으로 루시를 연기할 분들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선민이의 보이스 칼라만큼은 루시에 적역인 것 같아요. 앳된 이미지와는 다른 소리인데 굉장히 매력이 있어요. 허스키하면서도 뭔가 정서를 담고 있잖아요. 개인적으로 얘가 계속 뮤지컬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선민 아휴, 언니가 그런 얘기 하시면 당황스럽잖아요.
김선영 나는 보이스에 연기나 정서를 많이 채우는 타입이야. 내 소리도 대단히 독특하기보다는 뮤지컬 배우로서 적당히 적합한 정도라고 생각하거든. 근데 네 소리는 대단해. 연기를 하지 않아도 그 안에 정서가 담겨 있거든. 미안한 얘기지만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소리에도 사람을 집중시키는 뭔가가 있단 말이야. 문제는 갖고 있는 재료가 워낙 좋으니 연습을 안 한다는 거야. 너한테 계속 연기적으로 접근하라고 얘기하는 것도 이미 정서를 담고 있는 소리에 진짜 리얼한 정서를 실어주면 얼마나 더 풍부해질지 기대되기 때문이거든.
선민 그걸 알고 있는 게 신기해요. 소리가 허스키해서 그런지 중.고등학교 때부터 아무 생각 없이 노래를 불러도 작곡가 분들이 ‘너는 마흔 살이니, 이혼을 해봤니’ 하는 얘기를 종종 하셨거든요.
김선영 난 귀신이거든. 넌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는 거야. 여유도 있고 뭐든지 받아들일 준비도 되어 있고. 그래서 더 기대가 커. 섬세한 부분을 채우는 건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니까. 나도 처음엔 야생마 같았거든. 지식도, 경험도 없고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했는데 널 보면 그때가 생각나.
선영 씨는 첫 작품으로 신인상을 받으셨잖아요. 그럼 선민 씨도 그렇게 되는 건가요?(웃음)
김선영 그러니까요. 내가 로비를 한번 해볼까요?(웃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9호 2011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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