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팸어랏>에서 어딘가 모자란 원탁의 기사로 출연해 큰 웃음을 주었던 정상훈과 김재범이 <스팸어랏>이 끝나자마자 코미디 연극 <아트>에 동반 도전해 눈길을 끈다. 전작에서의 인기를 그대로 소극장 무대로 이어와 코미디로 연타석 홈런을 날리는 중이다. 무대에서 개그 본능을 감추지 못했던 정상훈은 <스팸어랏>에서의 활약으로 ‘희극인간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한다는 말을 들을 만큼 코믹 연기의 달인으로 인정받았다. 반면에 김재범은 코미디와는 썩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그 의외성과 비범한 유머 코드에서 비롯된 연기로 관객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다. 다른 이유로 ‘다시 봤다’는 호평을 받고 있는 두 배우를 만났다. 진심인지 웃자고 하는 이야기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둘은 인터뷰와 농담의 경계를 마구 넘나들었다.
김재범이 먼저 인터뷰 장소에 도착했고, 곧이어 들어온 정상훈이 자리에 앉자마자 인사는 생략하고 생각나는 말부터 툭 던진다. “우리 둘, 의상을 대충 맞춘 것 같다. 상의도 안 했는데….” 사실 그다지 맞춰 입었다고 보기 어려운 의상이었는데, 정상훈은 굳이 김재범의 셔츠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도 흰 색, 너도 여기, 흰 색.” 김재범은 관심 없다는 듯이 다른 이야기로 응했다. “별로 비슷하지 않은데요? 어젯밤에 문자도 씹으시고….” 지난밤에 김재범은 술자리 합류를 바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정상훈은 잤노라 답했다. 과음한 다음 날 인터뷰 사진이 엉망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고 덧붙이며. 막 공연장 내 분장실에서 가벼운 분장을 하고 왔다는 정상훈에게 김재범이 살짝 쏘아붙인다. “그래서 혼자 분장하고 오셨습니까? 참, 너무하십니다.” 정상훈은 별로 미안한 기색이 없다. “나는 직접 분장을 할 줄 아니까 했지. 그런데 왜 에보니가 없냐?” 여성을 포함해 동석한 이들 모두 ‘에보니’가 뭔지 되묻자 그는 능숙하게 눈썹 그리는 화장 도구임을 상기시켜 주었고, 그의 태연한 반응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인터뷰 중 간간이 ‘에보니’가 없어 속상해하는 정상훈의 모습은 마치 <스팸어랏>에서 뜬금없이 ‘체리 세이지’ 운운하는 ‘Ni의 기사’ 같았다.
의상과 에보니, 음료에 대한 잡담이 이어지느라 연극 <아트>에 출연한 사정과 소감을 물어본 지 십여 분이 지난 후에야 그에 대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과거 <아트>를 관람한 적이 있는 정상훈은 잘 짜여진 코미디에 반해 꼭 한번 참여하고 싶은 작품으로 마음에 담아두었는데, 이번에 그 기회가 왔다. 그런데 혼자 덤비는 것은 조금 망설여졌나 보다. <아트>의 주인공들이 십오년지기 친구임을 감안하여, <스팸어랏>을 통해 친해진 동료 배우들과 같이 도전한다면 더 안정감 있는 호흡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김재범과 김대종을 끌어들였다. <아트>에는 오랜 친구이긴 하지만 성격은 제각각인 규태, 수현, 덕수가 등장한다. 정상훈이 규태, 김재범이 수현, 그리고 김대종이 덕수 역을 맡았다. 하지만 정작 정상훈에게 가장 인상적인 역할은 덕수였다고 한다. “배역 선정도 저희 셋에게 맡겨졌는데, 배역을 정하기 전에 함께 대본을 읽어보기로 했어요. 저는 덕수를 하고 싶었지만, 제가 그래도 형인데 어떻게 제가 좋아하는 걸로 고릅니까, 티나게.” 김재범은 수현이 ‘청담동 피부과 의사’여서 냉큼 골랐단다. 옆에서 정상훈이 “아마 성북동 의사나 일산 의사였음 안 했을 거예요. 청담동 피부과 의사, 얼마나 있어 보여요”라고 거들었다. 그렇게 첫 리딩 연습 때 고른 것이 결국 각자의 역할이 되어버렸다.
연극 경험이 없거나 적은 세 사람이 삼인극의 대사 분량을 소화하고 호흡을 맞추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친밀한 인간관계가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말이다. 아, 친한 게 꼭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이상하게 상훈 형 얼굴을 보면 웃겨요. 웃음이 한번 터지면 참을 수가 없고요. 그게 무대에서는 실수가 되는 거죠.” 김재범이 불평 아닌 불평을 털어놓는다. “제가 연기하면서 많은 배우들을 만났는데, 그중에 상훈 형처럼 무대에서 대놓고 웃을 수 있는 배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연기하다가 웃기면 참지 않고 웃으세요. 공연 중인데 말이죠. 1분이든 2분이든 대사 안 하고 웃습니다. ‘허허허허’ 하고. 그런데도 관객들이 욕도 안 하고 함께 웃으면서 ‘저 배우, 웃음 터졌구나’하고 넘어가는 걸 보면 대단하죠.” 이런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정상훈은 ‘허허허허’ 웃었다.
둘의 재담은 무대를 넘어 일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두 사람이 트위터를 통해 주고받는 멘션들의 재치에 감탄하자, ‘재밌게 보신다니 자주 해야겠다’는 정상훈식 답변이 돌아온다. “얼마 전 아이패드를 사고 나서 트위터에 발을 들여서, 슬쩍 재범이에게 말을 걸었더니 참 재밌게 답해주더라고요. 그런 맛에 저도 한마디 더 하게 되고요.” 김재범이 최근의 당황스러웠던 트위터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상훈 형이 제게 ‘대사 좀 씹지마’라는 글을 남겼더라고요. 누구나 그 글을 볼 수 있으니 깜짝 놀랐죠. 사실 그날 대사 실수가 조금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농담으로 받았죠. ‘형, 죄송해요. 형이 화내는 모습 처음 봤어요. 그렇다고 뭘 집어 던지고 그러시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라고요.” 이내 정상훈이 흥분해서 말을 잇는다. “너무 황당한 거예요. 그래서 저도 ‘그래, 내가 잘못했다. 네가 내 앞니 쪽으로 물건을 던지지만 않았어도…. 앞니 치료하는 데 돈 많이 들었다’고 썼죠. 이런 식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곤 합니다.”
이전의 연기를 기억하는 관객들에게 두 사람의 이미지는 너무도 다르다. 그런데도 어쩜 이렇게 호흡이 잘 맞는지 묻자, 둘의 관계에서 연기 스타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는 우문현답을 정상훈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앞으로 또 얼마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얼굴 생김새도 목소리도 성격도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좋아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것 같다. 그저 둘 다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김재범, 보면 볼수록 정말 재미있다
김재범은 왠지 모르게 예민하고 진지해 보여서 웃기는 데 재주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의외의 바람이지만 그는 <김종욱 찾기>에서 김종욱보다 더 웃기는 멀티맨이 하고 싶어 오디션을 봤단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멀티맨 대신 김종욱이 그의 몫이 되었지만. “그동안 소심하고 자존심 강하고 또 신경질적인 역할을 많이 한 것 같아요. 글쎄, 왜 그랬을까요?” 진지한 목소리의 그가 허심탄회하게 반문하자 좌중은 또 하릴없이 웃었다. “전작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다음 작품에 영향을 미치곤 해요. 소심한 역할을 몇 번 하다보니까 소심하게 연기하면 쉽게 표현되는 역할도 그렇게 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그렇듯 <쓰릴 미>에서 동성애자를 연기하고 나니까 <스팸어랏>의 허버트는 게이처럼 연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게이 성향을 넘어서 아주 모자란 병신같이….” 제 말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정상훈도 거들었다. “제 역할인 랜슬롯도 무식하고 모자란 인물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두 천치가 만나서, 아주….” 막을 내린 공연인데도 허버트와 랜슬롯 콤비의 강렬한 인상이 뇌리에 남아 있다. “허버트, 그 캐릭터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제가 그렇게….” 그 덕에 관객 모두 굉장히 즐거워했음을 이들에게 감사해야겠다.
연이어 코미디 무대에 선 김재범은 주성치의 코미디를 좋아한단다. “그런 연기 해보고 싶어요.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굉장히 진지하게 행동해서 웃기는 것, 또는 웃긴 상황인데도 눈물이 나는 것. <스팸어랏>하면서 느낀 건데 누군가에게 웃음을 준다는 것이 어렵더라고요. 어제는 웃겼는데 오늘은 못 웃길 수도 있으니, 매일매일 연구하고 노력해야 해요. 관객이 웃는지 아닌지, 즉각적으로 반응을 알 수 있으니까요. 한번 해봐서 앞으로 또 코미디를 연기한다면 겁이 좀 날 것 같아요.”
어떤 배우라도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내려는 욕심이 있을 것이다. 김재범 역시 만화나 다큐멘터리 등에서 만나는 수많은 인물들을 흉내 내면서 캐릭터를 연구한다고 한다. 그간 다양한 인물을 연기했던 그가 앞으로 하고 싶은 연기는 악역이다. “사연이 있어서 죄를 짓는 거 말고요. 영화 <추격자>에 나오는 것처럼 그냥 나쁜 놈이요.” 그의 이야기에서 연기에 대한 호기심과 욕심이 묻어났다. “제게 안 어울리는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사람들이 ‘아니, 네가 그런 역할을 하냐’고 의문을 가졌는데, 제가 잘해 내서 인정받고 싶어요. 연기를 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동생의 진지한 이야기를 들으니 또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정상훈이 자신의 생각을 더한다. “저는 반대로, 지금 하는 연기나 잘 하자는 생각입니다. 지금 하는 건 잘 하고 있는지….” 김재범이 끼어든다. “저한테 하시는 말씀인가요?” 정상훈이 정색하며 “아니, 무슨 소리야? 나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지”라고 말하곤 껄껄 웃는다. 배우로서, 또 동료로서 서로를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 알기에 이런 농담 따위는 그들 사이에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다.
정상훈, 당신은 어느 별에서 왔나요
정상훈은 비일상적인 캐릭터를 단순화하고 극대화시켜 표현하곤 하는데, 그럼에도 관객에게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가는 재주가 있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캐릭터라도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연기하는 것, 정상훈은 그런 작업에 매력을 느낀다. 캐릭터의 무한 변신과 극대화를 통한 코믹 연기가 좋다는 정상훈이 바랐던 역할은 <김종욱 찾기>가 특화시킨 일인다역 멀티맨이었고, 그 기회가 주어진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멀티맨 연기로 풀어보고 싶었어요. 캐릭터를 시각화시켜서 많은 인물로 변신하고, 또 짧은 등장 시간 내에 임팩트 있게 캐릭터를 드러내는 작업이 좋아요. 그런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고요.” 말이 끝나자마자 옆자리의 김재범이 또 아슬아슬한 농을 던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패로 끝났죠. 임기홍이라는 배우의 영향력이 너무 커서, 상훈 형은 완전히 묻혀버렸어요.” 정상훈은 속상해하는 대신 오히려 더 뻔뻔하게 대꾸했다. “아녜요. 엄청났어요. 당시 조중동에서 인터뷰를 하러 왔고, 저는 그때 이미 연기의 정점을 찍었죠.” 인터뷰가 차분히 진행되는가 싶다가도 불쑥 머리를 들이미는 이들의 장난기를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기는커녕 이내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스팸어랏>에는 정성화, 정상훈을 비롯하여 김재범, 김대종, 박인배 등이 출연해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주었다. 한 인터뷰에서 정상훈은 다른 배우들의 코믹 연기가 정말 뛰어나서 어떻게 하면 자신이 더 웃길 수 있을지 고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 그랬어요. 성화 형과 저는 명문 서울예대의 개그 클럽 출신이에요. 크, 체계적으로 배웠단 말이죠.” 과장되게 으스대며 좌중에게 작은 웃음을 준 후 말을 잇는다. “그런데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배우들이 나타나서 저를 당황스럽게 하더란 말입니다. 대체 왜 이렇게들 웃긴 거죠? 재범이나 대종이한테 제게 없는 걸 많이 배웠어요.” <스팸어랏>에서 아서왕 무리 앞에 무섭게 등장해 ‘체리 세이지’를 요구해놓고, 그들끼리는 굉장히 소심하게 대화하던 Ni의 기사들을 기억하는지. 정상훈은 그 캐릭터의 재미를 살리는 데 김재범의 스타일을 따랐다고 한다. 허버트를 연기할 때 얼렁뚱땅 얼버무리듯이 말하는 걸 보면서 Ni의 기사들에게도 소극적인 성격을 부여하면 재밌겠다고 생각했고, 이는 관객의 웃음보에도 적중했다.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선 정상훈은 그 매력을 몸소 느낀 듯하다. “앞으로 연극을 좀 더 경험하고 싶어요. 캐릭터를 더 깊이 있게 표현할 수 있고, 지금까지 배운 연기들을 정리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연극 <트루 웨스트>를 봤는데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이인극도 참 매력적이더라고요.”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가도 결국엔 장난처럼 마무리한다. “제일 하고 싶은 것은 일인극예요. 140개 정도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거죠. 코미디로!” 저게 가능할까, 또는 진심인가 의심이 들다가도 어떤 상상도 자유롭게 하는 것이 그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다 장난처럼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요. 항상 웃고 행복해하면서.”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9호 2011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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